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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86화 (86/210)

◈ 086.

[Lv.1004 투르마크 줄루를 처치했습니다!]

[「서브 퀘스트」 ─ ∑미궁의 지배자 달성]

퉤.

“별것도 아닌 놈이.”

이진한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투르마크의 몸을 짓밟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상대했던 괴물들에 비해 레벨이 낮으니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은 그것을 비웃듯 무지막지한 방어력으로 끊임없이 몸을 날려왔고 결국엔 치열한 육탄전으로까지 이어졌다.

종래엔 초월 마법을 두 개나 사용하고 악마화의 힘을 일 점에 집중시킨 끝에서야 그 목을 베어낼 수 있었다.

‘힘이랑 시간의 소모가 생각보다 큰 데.’

이진한은 고개를 돌려 저택 부근을 바라보았다. 저쪽도 나름대로 고전 중인 듯 심상치 않은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나 포션을 꺼내 숨도 쉬지 않은 채 그것을 들이켰다.

“베르너 님!”

성벽의 잔해를 딛은 엘레오노라가 훌쩍 몸을 날려 그의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쓰러뜨리신 건가요?”

“응. 진짜 더럽게 단단하더라. 예상외의 전력이라 조금 애먹었어.”

“저택 쪽도 습격받는 중인가 봐요. 싸우는 도중 헤으응과 호에엥 둘 다 뛰쳐나갔어요. 베르너 님도 격전 이후라 힘드시겠지만…….”

엘레오노라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마법사이니 저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이곳 못지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일 터.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 전부 무사히 데려올 테니까.”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대충 닦아낸 그는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하와와 쪽에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여기보다 못한 상대는 아닐 터.

그러던 차 문득 투르마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마기에 완전히 동화되어버린 듯 목이 잘려 죽은 후에도 악마화가 풀리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도 잘 들어가지 않는 몸뚱이면 제법 쓸모가 많을 터.

그렇기에 제법 혹했으나, 이진한의 손은 뚝 잘린 소의 머리로 향했다.

“…그건 왜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아서.”

검은 소, 흑우(黑牛)의 뿔을 붙잡은 그는 엘레오노라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맡긴다. 성벽이 함락될 것 같으면 미르엘이랑 저택 쪽으로 물러나고.”

“맡겨주세요. 무너지기 전까지 지켜보일게요.”

“거참 든든하네.”

그녀를 향해 씩 웃어준 이진한은 이내 힘껏 땅을 박찼다. 등 뒤로 활성화된 이카루스의 날개가 허공을 선회하며 추진력을 더했고, 순식간에 저택의 상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도 클라이막스인가.”

하늘과 땅을 뒤덮은 강대한 마기가 마치 세기말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트루마크보다 더 상위 존재가 맞았는지 그녀들 앞에 선 남자는 대현자의 파악하지 않아도 선명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막대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쉬아아악-!

검붉은 빛이 베리어를 꿰뚫고 빙벽을 부순다. 헤으응이 힘껏 대항해보지만, 마르바스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성검 듀란달을 반 토막 냈던 것처럼 헤으응의 검이 끝에서부터 마모되기 시작했다.

툭.

그 사이로 내려선 이진한은 손을 뻗어 헤으응의 뒷덜미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

“버티느라 수고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할 테니까.”

휙!

그녀를 들어 뒤쪽에 있던 이들에게 던지며 왼손에 든 트루마크의 머리를 앞으로 가져갔다.

“뒤로 물러나 있어라.”

지이이잉─.

쏘아진 검붉은 빛이 미노타우로스의 머리와 격돌했다. 주위로 탄 내가 자욱해지며 그 검은 피부가 녹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진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저 앞에 서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쉽게 망가질 거였으면 쓰러뜨리는 데 그렇게 애먹지도 않았지.”

“…….”

트루마크의 머리는 상대의 공격이 끝날 때까지 어렵지 않게 버텨내었다. 물론 일 점에 집중 당한 부위부터 시작해서 안쪽이 문드러졌지만, 이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낸 것으로 그 역할은 충분히 다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선물이다. 네 수하지? 튼튼하긴 하더라. 베어버리는 데 애 좀 먹었어.”

이진한은 메피스토의 발치에 그것을 툭 던졌다. 그는 데굴데굴 굴러들어온 소의 머리를 바라보더니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줄루를 쓰러뜨렸다고?”

“깜찍하게 부르네. 아니면, 스물여섯 번째 사도라 애착이 가는 건가?”

“…네놈.”

메피스토는 손끝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줄루는 절대 약하지 않다. 그렇기에 드래곤 슬레이어니 용사니 한다고 할지라도 이리 빨리 그를 쓰러뜨리고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툭.

메피스토는 발치에 닿은 줄루의 머리를 들어 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리 쉽게 갈 친구가 아니었거늘. 내 실책이로구나.”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트루마크의 머리를 머리에 흡수했다.

“사도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성국과 결탁했는가.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 내 계획을 망친 것도 모자라 이리도 성가시게 만들어주다니.”

“거, 알아서 줄줄이 오해해주니 고맙네.”

이야기를 들으니 대충 신성 왕국 쪽도 이 녀석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일 터. 그렇게 된다면 추후 그들과 협력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상대의 주류가 마족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이진한은 흘깃 뒤쪽을 돌아보았다.

하와와는 생명력이 상당 부분 소진된 듯싶었지만, 안색이 창백한 것 치고 잘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두 자매도 조금 지저분해진 것 빼고는 별 이상이 없…….

“…일레이나, 너.”

“아, 이거요?”

일레이나는 살짝 지친 시선으로 텅 빈 어깨를 으쓱였다.

“저 새끼가 그랬어요. 고칠 수는 있는 거죠?”

“…있어. 없어도 할 수 있게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마라. 원한다면 하나 더 달아줄게. 예비용으로.”

“누구를 키메라로 만들 생각이에요? 솔직히 아파 죽겠지만, 어떻게든 참고 있을 테니까 복수 좀 해줘요.”

그녀는 피딱지가 굳은 얼굴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적절하게 조치했는지 위험한 상황까진 가지 않은 듯싶었으나, 팔이 뜯겨나가는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이진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용아청성창과 마검을 손에 쥐었다.

“저놈 사지를 갈아버릴 테니까 물러나 있어.”

날 것처럼 툭 튀어나온 대답에 일레이나는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면서 웃음을 토했다.

“그런 교양 없어 보이는 말에 설레는 것도 생전 처음이에요.”

쿵-!

그와 동시에 이진한은 거칠게 땅을 박차며 메피스토에게 몸을 날렸다. 마검 그라나다에서 뿜어져 나온 농밀한 마기가 전신을 감쌌고, 다시 한번 악마화(惡魔化)가 발동되며 그 신체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이건!”

메피스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신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쇄도해오는 그 기운의 응집은 분명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마기(魔氣)였다.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부터 용솟음치는 것처럼 거대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형태로 일렁이며 이쪽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거대한 아가리를 부풀려왔다.

우웅─.

놀람은 잠시, 곧 그의 손 위로 검붉은 파멸의 빛이 서렸다. 나선의 형태로 휘몰아친 마기는 곧 일직선으로 쏘아졌고, 자신에게 부닥쳐온 적의 심장을 꿰뚫을 듯했다.

쿵-!

하지만 그것은 이내 아무것도 없는 대지를 뚫고 헛되게 사라진다. 메피스토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돌렸을 때, 그보다 먼저 뒤를 점한 이진한이 기다랗게 찢어진 샛노란 두 눈을 번뜩였다.

“느려.”

쉬아아아아악-!

마검에서 솟구친 농밀한 마기가 그 전신을 강타한다.

메피스토는 그 가운데서도 두 팔을 교차해 직격당하는 것을 막아냈지만, 그 여력까진 해소하지 못해 한참을 날아가 대지 가운데 처박히고 말았다.

“…놈.”

메피스토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구덩이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익숙지 않은 몸으로 움직이느라 얼토당토않은 공격에 몇 번이고 육신을 재구성해야 했다.

고작 이런 인간들에게 애를 먹는 것은 악마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 부릅뜬 그의 눈 위로 실핏줄이 올라오며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순식간에 그 앞으로 닥쳐온 이진한이 푸른 창끝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천벌을 내리듯 하늘이 울부짖기 시작했고, 떨어져 내리는 자색 뇌전이 슬슬 땅거미가 져가던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콰아아아아앙-!

토지의 파편이 비산하고 메케한 냄새가 주변을 휩쓴다. 메피스토는 그 가운데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기 그지없군. 열등한 버러지 따위가 누구에게 기어오르는가!”

폭발적인 마기가 그를 중심으로 피어오른다. 마치 해일처럼 밀려오는 그 기세는 이진한이 무심코 한 발자국 물러났을 정도로 강대한 것.

하지만 그는 다시금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한 자루의 카타나를 쥐었다.

신도(神刀) 무라마사(村正).

악마화와 가장 잘 맞는 무구는 마검 그라나다였으나, 순간적인 폭발력은 무라마사에 비할 것이 없었다.

쉬아아아악-!

시퍼런 검날이 이제껏 휘둘러졌던 어느 공격보다 빠른 속도로 반원을 그린다. 메피스토는 더 이상의 횡포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듯 힘껏 팔을 뻗었다. 이제껏 레이저처럼 쏘아지기만 하던 검붉은 마기가 검의 형태를 갖췄고 그는 그것을 힘껏 잡아챘다.

“…이!”

이제부턴 좀 다를 것이다. 그렇게 말할 찰나, 무라마사의 궤적이 겹치며 메피스토의 두 팔을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끄, 끄아아아악!”

무라마사에 실려있던 마기가 그 상처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녀석의 몸을 집어삼킨다. 메피스토는 악에 받친 절규를 내지르면서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고, 전신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이건 일단 일레이나의 몫이다.”

이진한은 차가운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그의 두 팔을 힘껏 짓밟아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뭉개버렸다.

“…으, 어어어.”

메피스토에 이르러선 거의 폐인이 되어버린 상태.

바포메트의 마기에 먹힌 것인지 살점이 녹아 흘러내리며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무라마사의 끝으로 녀석의 미간을 툭 건드렸다.

“같잖은 수작은 그만 부리고.”

“…티가 많이 났는가? 보통 이러면 쓰러뜨린 줄 알고 좋아하던데.”

“작은 극단에서 일하는 삼류 배우보다 어설프기 짝이 없더군.”

“쩝.”

차가운 반응에 메피스토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깔끔했던 옷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삭았고 완벽한 조형을 자랑했던 신체는 곳곳에 뼈마디가 보일 정도로 피폐해졌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나와 같은 악마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조금 놀랐지만, 용사니, 뭐니 하면서 호들갑 떠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군. 이 정도면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일 텐데.”

“난들 알겠나. 마르바스 그 자식이 지레 겁을 먹고 허겁지겁 죽이려고 하더라. 그래서 그 심장에 성검을 박아줬지.”

“그 성검은 파괴되어 없고?”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딱히 부정하지 않은 채 무라마사를 들어 메피스토의 목에 겨눴다.

“없어도 질 것 같지는 않은데.”

“천만에. 악마와 계약하고 마검을 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변수랄 정도는 아니다. 성검이 있었으면 몰랐을까.”

메피스토는 제 목에 겨눠진 신도를 슬쩍 밀어내고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었다.

“뭐, 예정보단 조금 이르긴 하지만 고대 신의 잔재를 옮기는 데 필요로 했던 일이니.”

쿠웅─!

눈코입 할 것 없이 구멍이란 구멍에서 농밀한 마기가 솟구친다. 동시에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육신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서서히 제 몸집을 부풀리며 주변 대지를 잡아 먹어가기 시작했다.

종래엔 저택의 크기보다 더 큰 덩치로 이진한을 내려다보았으니.

머리는 뱀이요, 몸은 사자, 등 뒤엔 박쥐의 날개가 달린 것이 유적지에 봉인되어 있던 베히모스와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풍기는 기운은 감히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본인은 거짓과 기만에서 태어난 악마.』

메피스토는 천천히 제 고개를 숙이며 사뭇 격식 있는 태도로 이진한에게 고했다.

『그 이름은 메피스토다.』

거짓과 기만의 악마가 그 앞에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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