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5.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목을 썰어주마.
헤으응은 서늘한 안광을 흩뿌리며 메피스토의 목에 검날을 세웠다. 호에엥은 그 틈을 타서 쓰러진 하와와와 일레이나를 챙겨 멀찍이 거리를 둔 뒤 치료 마법을 전개했다.
-일레이나 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괜찮아요. 응급처치는 했으니까 그 사람이 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예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쉰 뒤 재차 포션을 들이키며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옷이 더러워졌나. 아무리 나라도 육체를 재구성하는 일은 귀찮은데 말이지.”
그는 자신의 목에 검이 겨눠졌음에도 태연한 얼굴로 가슴 부근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헤으응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자신이 말한 대로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고, 곧 그 목을 순식간에 베어냈다. 아니, 목뿐만이 아니었다. 새하얀 검광이 번뜩이자 그 육신이 수십 개로 나뉘었고, 곧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쓰러뜨린 건가요?
“…아니. 아까도 분명.”
일레이나가 호에엥의 말에 대답할 찰나, 누군가 그녀와 하와와의 어깨를 가벼운 손길로 부여잡았다.
“성급한 성격들이로군. 이 메피스토는 예의와 예절을 중요시하는 악마인데 말이지.”
“……!”
순식간에 뒤를 잡힌 그들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호에엥이었다. 순진무구한 얼굴과 달리 더없이 날카로운 얼음 기둥을 바닥에서부터 솟구친 그녀는 다시금 그 가슴을 꿰뚫으려 했지만, 메피스토는 이전과 같이 쉽사리 당해주지 않았다.
“쯧쯧. 단조롭기 짝이 없는 공격이야.”
허공에 들려진 그의 손가락 앞으로 파멸의 빛이 서리자 호에엥이 거칠게 스태프를 휘둘러 그들을 보호하는 빙벽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단 일 초도 막지 못한 채 뚫려버리자 그녀는 제 몸으로 언니와 일레이나를 지키려 했다.
-숙여!
그 가운데 헤으응은 순식간에 벽면을 타고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 나왔다.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가 서린 검이 직선으로 쇄도한 레이저의 궤도를 꺾었고, 이내 벽면이 길게 찢어지며 깊은 흔적을 남겼다.
-…….
헤으응은 굳은 얼굴로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검을 쥔 손이 잘게 떨려온다. 어찌나 밀도 높은 기운인지 조금이라도 경계를 늦췄다면 검째로 밀려나 저 벽처럼 찢겨나갔으리라.
“이 몸으로 더 출력을 내는 건 곤란한 일인데. 뭐, 상관없나. 어차피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메피스토는 슬쩍 몸을 돌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뿔의 조각.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된 장소에 드디어 도착할 수 있었다.
-…도달했다 한들 어찌할 셈이죠? 《영원》께서 만들어 놓으신 결계를 당신들의 힘으로 열기는 어려울 것인데.
“우리가 그렇게 어수룩해 보이나.”
하와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메피스토는 품에서 작은 큐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영원》이 만든 결계는 《영원》이 만든 아티팩트로 상대해야겠지. 들어 봤는지 모르겠지만, 「봉파자(封破磁)」라는 것이네. 이런 결계나 봉인 따위를 이렇게 하면….”
콰직.
봉파자가 닿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자글자글한 균열이 생겨난다. 그것은 곧 유리가 깨어져 나가듯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으니, 메피스토는 어떠냐는 듯 조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떤가. 이름은 괴상해도 성능은 확실하지? 다름 아닌 《영원》이 만들어낸 것이니까.”
“…그런.”
일레이나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봉파자」라니, 이터널 학파의 소속으로 《영원》의 연구를 끊임없이 해왔던 자신조차 듣지 못했던 이름. 입구를 막고 있던 결계를 종잇장처럼 손쉽게 찢어버린 것으로 보아 고대 신의 잔재에 도달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가요. 그것이 당신들의 노림수였군요.
“조커라고 해두지. 구하는 데 애썼으니.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당황하는 태도는 아닌데?”
메피스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원》이 남긴 유산으로 그들의 희망을 짓밟은 다면 그것만큼의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저 보랏빛 마도사처럼 절망 어린 얼굴을 해줬으면 좋겠지만, 백색의 호문클루스는 이때까지와 마찬가지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몇백 년이란 시간 동안, 이 결계가 한 번도 돌파당하지 않았을 것 같나요?
“…뭐?”
-그간 셀 수 없을 정도의 공격을 받았고, 드물지만 외적들이 이곳까지 닥쳐온 적도 있었죠.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명도 저 안에 도달할 수 없었어요.
파아앗─!
바닥, 벽, 천장. 그 모두가 막대한 마력에 집어삼켜 진다. 하와와는 입가에 진한 핏줄기를 흘리면서도 옅은 미소를 품은 채 말했다.
-그리고.
“…무슨.”
-대마도사를 너무 얕보시는 게 아니신가요? 아무리 제 상태가 아니었더라도 사력을 다했더라면 아직 당신은 저 계단 위를 헤매고 있을 거예요.
그 손가락이 길고 복잡한 수결을 맺는다. 지금까지 한껏 여유로움을 띄고 있던 메피스토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이미 늦었어요. 「무간(無間)」
짝!
가벼운 손뼉 소리와 함께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소용돌이에 휩쓸린 듯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광경. 일레이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제 옆에 있던 호에엥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뿐이었다.
파아앗-!
눈 부신 빛이 점멸한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저택의 풍경.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함께 지하에서 순식간에 지상으로 이동해 있었다.
“…이, 건.”
메피스토가 크게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진동과 저 멀리서부터 퍼져 오는 매캐한 죽음의 냄새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지하는 이제 봉인되었답니다. 향후 몇십 년간은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겠죠.
「무간(無間)」은 특정 공간과 이어진 사이를 없애버리는 초월 마법. 즉, 고대 신의 잔재가 있는 지하까지 들어가는 길은 이제 없어졌다.
-…원래라면 그 직후 거대한 폭발이 이곳을 전부 휩쓸어 살아 있는 생명체를 지워버렸겠죠.
그 이후에는 다시 고대 신의 잔재로부터 흘러나온 기운으로 인해 자신들, 호문클루스가 태어날 터. 수십 년이 지나고 「무간」 마법이 풀리게 된다면 결계 안은 다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리라.
-…언니.
-괜찮아요, 걱정할 것 없답니다.
하와와는 울먹거리는 호에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스러운 동생들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베르너란 변수가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에 도박을 걸었고,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폭발의 발동을 막았다.
다만, 「무간」은 막대한 기운을 요구하는 마법이었다. 그 총량은 대마도사가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할 정도의 것.
즉, 하와와는 제 모든 생명력을 끌어다 마법을 발동한 것이었다.
‘아직, 아슬아슬하지만 괜찮아. 적어도 이 순간은 버틸 수 있어.’
애초에 이전의 전투로 큰 상처를 입은 자신의 상태로는 완전한 「무간」을 발동시키는 것은 불가능. 그렇기에 잔재의 힘을 빌렸고, 존재의 확립이 아슬아슬해지기 직전에 소모를 멈출 수 있었다.
“…고작 인간의 마법 따위로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조금 돌아가게 된 것뿐이다. 봉파자만 있다면 그따위 수작쯤은.”
-그렇겠죠. 아무리 제 마법이 뛰어나다고 한들 《영원》께서 창조하신 아티팩트를 막긴 어려울 테죠. 하지만….
적어도 검은 현자, 베르너 님이 오실 때까지 버틸 순 있으리라.
빠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진다. 메피스토는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거짓과 기만을 상징하는 악마. 상대를 농락하고 능멸하는 것은 이쪽의 역할이었어야 했다.
‘그런 내가 도리어 넘어갔다?’
악마로서 자신의 본질이 부정당한 것은 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 머리가 뜨거워지는 분노와 함께 그의 전신으로 시커먼 마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좋다, 칭찬해주도록 하마. 이 메피스토의 진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할 줄이야.”
쉬아아악-!
메피스토의 등 뒤로 한 쌍의 시커먼 날개가 펼쳐졌다. 동시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주변을 휩쓸었고, 하늘과 땅을 뒤덮기 시작했다.
-모두 제 뒤로!
맏언니인 하와와가 무력화된 가운데 둘째인 헤으응만이 메피스토에 맞설 수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검을 들었고, 호에엥은 하와와와 일레이나의 팔을 잡아끌어 그 뒤로 물러났다.
“어디 그 알량한 힘으로 막아보아라.”
하늘 위로 들어 올린 메피스토의 손끝으로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세의 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지가 갈라지고 허공이 울부짖으며 기다란 비명을 내뱉었다. 검붉은 스파크가 간헐적으로 주변에 내리치는 가운데 거짓과 기만을 즐겨 삼는 악마의 눈동자만이 붉은빛을 번뜩이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큭.”
일레이나는 왼쪽 어깨를 붙잡으며 신음을 토해냈다.
‘언제쯤 올 거예요!’
팔 한쪽이 날아갔고,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이 정도 버텼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여느 때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입가에는 잔뜩 겁먹은 자신들을 놀리는 듯한 미소를 품은 채 멋들어진 모습으로 등장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멸망의 빛이 검은 현자보다 먼저 그들에게 닥쳐왔다.
-언니!
호에엥이 스태프 끝을 바닥에 찍으며 전력을 다해 마나를 끌어올렸다.
마도사 클래스 상위 마법 「설조(雪鳥)의 둥지」
마치 새의 날개를 형상화한 빙벽이 그들을 둘러싼다. 남은 마나를 전부 쥐어짠 덕분인지 지금까지와는 수준이 다른 강도의 단단함이 그 위에 서렸고, 일레이나 역시 신음을 억누르며 빙벽 위에 그 위에 몇 겹이나 되는 베리어를 펼치며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썼다.
“가소롭군.”
쉬아아악-!
메피스토의 비웃음과 동시에 검붉은 파멸의 빛이 순식간에 그 위를 베어 가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일레이나가 펼친 베리어가 찢겨나가고, 설조의 둥지마저 그 날개가 쩍 갈라지며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윽…!
오로지 홀로 그 앞을 지킨 헤으응만이 검을 치켜세우며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올리는 것으로 맞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새하얀 빛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식되었고 그 끝을 예감한 그녀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물러서지 않은 것은 그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는바. 하다못해 자신을 희생해 뒤에 있는 이들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버티느라 수고했다.”
-……!
그 직후 헤으응은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제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할 테니까.”
상처투성이의 검은 현자는 어둠을 품은 듯한 짙은 흑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녀들 사이로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