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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84화 (84/210)

◈ 084.

뒷짐을 진 남자가 여유롭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느 가문의 귀공자인 듯 외모는 유려하기 짝이 없다. 찬란한 금발은 마치 흘러내릴 듯했고, 얼굴은 마치 솜씨 좋은 명장이 조각해놓은 듯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지이잉─!

남자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곳곳에 설치된 함정이 빛을 발한다. 새빨간 초고열의 레이저가 허공을 꿰뚫거나, 보이지 않는 바람의 칼날이 날카롭게 그 위를 훑는 등, 어지간한 실력자라도 버텨내지 못할 공격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잡스럽구나.”

하지만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 자신의 주위에 닿는 모든 공격을 무위로 되돌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올릴 뿐이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끝이 없었다. 망령 군단이 성벽을 공격함과 동시에 은밀히 이곳으로 들어와 내려왔건만, 어째서인지 목적지에 다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썩어도 《영원》의 계보를 이었다는 것인가. 문지기 주제에 분에 넘치는 일이로군.”

끝없이 반복되는 통로에 갇힌 것이리라.

공간 마법을 특기로 하는 《영원》의 이름에 어울리는 듯싶었지만, 고작 발을 묶는 것이 끝이니 좀스럽기 그지없는 수단이었다.

쉬아악!

남자가 뒷짐을 풀고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손가락 끝으로 검붉은 빛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파멸의 이름을 닮은 그것은 곧 장내의 모든 것을 찢어발겼고, 공간 자체를 왜곡시켜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이 장소 자체를 소멸시켜버렸다.

툭.

종래에 등장한 것은 이전과 달리 한 점의 빛조차 들지 않는 칙칙한 분위기의 계단.

남자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전보단 낫군.”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계단이 끝나는 통로 앞으로 강력한 결계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것만 넘으면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된 장소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이전과 같이 파멸의 빛을 피워올렸지만, 마지막 결계라 그런 것인지 이전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견고함을 자랑했다.

“…귀찮게 하는군. 설령 그렇다 한들!”

콰직.

결계 위로 손을 올리고 그것을 찢을 듯 움켜쥐었다. 그러자 허공으로 유리에 금이 가듯 자글자글한 균열이 생겨났고, 이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툭툭 그것을 털어낸 남자는 천천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렇게 몇 걸음 떼기도 직전 시뻘건 화마의 세례가 쏟아져 내린바.

남자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쉬아악!

세찬 돌풍이 일어나 불길을 막아 세운다. 달궈진 공기로 인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힘겨루기의 연속. 그 직후 느닷없는 냉기가 눈에 보이는 전역을 뒤덮으며 쇄도해왔다.

저저적─.

혀를 날름거리고 있던 불꽃마저 그것을 피해내지 못했다.

장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한 그것은 이내 남자의 손아귀에까지 도달한다.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는 마치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것처럼 가볍게 손을 털었다.

파스스.

떨어져 나온 얼음 결정이 허공에 흩날린다. 남자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으며 얼어붙은 불꽃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네놈이 그 ‘마녀’인가. 다른 하나는, 보랏빛 머리카락. 그렇군, 저 드래곤 슬레이어의 동료인가. 고작해야 마도사 수준이라. 신경 쓸 가치는 없겠군.”

“누가 신경 쓸 가치가 없어?!”

일레이나는 욱한 표정으로 마나를 끌어올렸다.

공격을 받는 즉시 하와와를 통해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일단은 그녀의 두 자매가 곧바로 이곳에 합류하고 있는 터.

자신들의 승리 조건은 베르너가 적을 쓰러뜨리고 이쪽에 합류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나도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거든!”

일레이나의 손이 복잡한 수결을 맺었다.

상대는 마족과 계약한 존재.

그러니 일반적인 마법으로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다행히 자신의 부전공은 악마 관련 연구.

당연히 그에 관한 대비책도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투둑.

남자를 중심으로 방위마다 네 개의 비석이 솟아오른다. 각각 적, 청, 황, 흑의 색을 띤 그것이 서로 이어지며 원을 그렸고, 이내 백색의 선을 만들어내며 공간을 속박했다.

“가르티아의 성역? 호오, 설마 이 시대에 이런 구닥다리 마법을 기억하는 자가 있다니.”

「가르티아의 성역」

옛적 신탁을 받아 마법을 버리고 성인(聖人)이 된 성 가르티아가 고안해낸 술식으로 부정한 존재의 발을 묶는 마법이었다.

단 한 톨이라도 부정한 기운을 지닌 이는 그 선을 넘을 수 없으며, 성 가르티아는 이 마법으로 자신들 사이에 섞여 있던 변절자를 찾아내었다.

파직.

남자가 흥미 어린 눈길로 가볍게 발을 내딛자, 백색 선이 점멸하며 격한 반응을 끌어내었다.

곧이어 그 발끝에 연기가 서리며 조금씩 타들어 가는바.

의심할 여지 없는 선명한 위력에 그는 헛웃음을 토해냈다.

“성 가르티아. 마법사 주제에 성인이 되어 성가시던 녀석이었던가. 끝에선 내 수작질에 넘어간 인간들에게 배신당해 죽었지. 꼴사납게 몸부림치는 그 꼴이란.”

“…뭐?”

마법사 가운데서도 성인이 된 위인을 욕보이는 그를 향해 빌어먹을 새끼라고 엿을 날리려던 일레이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 가르티아가 활동하던 시기는 족히 오백 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하지만 남자의 태도는 마치 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가.

-…조심하세요. 그는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있을 뿐, 인간이 아닙니다.

“하! 만들어진 생명체인 호문클루스 따위가 그딴 이야기를 지껄이는가. 저 지옥 밑바닥에 처박혀 있는 《영원》이 실소를 흘리겠군.”

“이 개새끼가!”

우상과도 같은 《영원》을 욕하다니.

일레이나는 성역의 범위를 줄이며 그 강도를 높였다. 그러자 남자의 몸 곳곳이 타들어 가는바.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하와와에게 눈짓을 보냈다.

“지금이 기회에요!”

-맡겨 주세요

남자의 머리 위에서부터 복잡한 마법진이 떠오른다. 일레이나는 그것이 베르너가 익히 사용해온 초월 마법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 술식을 바라보았다.

-초월마법 「만년서리」.

절대 영도. 극한에 다다른 추위가 형상화되어 남자에게로 떨어져 내린다.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머리끝이 얼어 붙어오고, 새하얀 입김이 절로 새어 나올 정도의 차가움. 하지만 만년서리는 오히려 남자의 몸을 차가운 불꽃으로 불사르며 소멸시켜나갔다.

“하하하! 호문클루스 주제에 초월 마법을 사용하는가!”

살점이 시커멓게 변해 떨어지고 뼈는 가루가 되어감에도 남자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박장대소를 하며 손뼉을 치기까지 해오지 않는가. 일레이나는 질린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허세를 부리는 거예요.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다 할지라도 만년 서리의 한기는 그 안까지 파고들 겁니다.

“맞는 말이군. 평범한 마족이라면 감히 초월 마법을 버텨내지 못했겠지.”

남자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열 개에 달하는 손가락 중 전부 스러져 떨어진 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단 두 개. 대단히 볼품없는 모습이었으나, 오랜만에 맞이한 초월 마법에 흥이 차올랐다.

“허나, 그 주체가 거짓과 기만을 상징하는 악마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겠지.”

“……!”

일레이나의 두 눈이 커졌다.

분명 가르티아의 성역에 갇혀 전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선 그의 모습은 막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 다름이 없는 멀쩡한 상태였으니.

-…이건.

하와와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인지 굳은 얼굴로 두 주먹을 꽉 쥔다. 남자는 그런 그녀들의 반응이 더 없이 마음에 드는 듯 가볍게 고개를 꺾으며 그 수려한 외모를 보였다.

“소개하지. 나는 기만과 거짓을 일삼는 악마─”

웅웅.

다섯 손가락이 모두 달린 손이 들어 올려진다. 곧 그 위로 검붉은 파멸의 빛이 서렸고, 이내 허공을 꿰뚫었다.

“「메피스토(Mephisto)」라 한다.”

“피해!”

일레이나는 그것의 궤적의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와와는 이 결계의 중심, 이진한에게서 그녀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레이나로선 선택지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촤아악!

허공으로 시뻘건 핏방울이 흩날린다. 동시에 어깨부터 뜯겨나간 팔 한 짝이 바닥을 굴렀고, 그것보다 조금 더 떨어진 장소에서 일레이나는 하와와를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땅 위로 나뒹굴었다.

-읏, 일레이나 님! 팔이!

“…나도 아니까, 신경 쓰지 마요.”

일레이나는 손끝을 벌벌 떨며 몸을 일으켰다. 입안으로 피 맛이 느껴지는 것이 혀를 씹은 듯했지만, 어깨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다른 감각들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더럽게 아프네.’

속으로 오만가지 욕지거리를 뱉어낸 일레이나는 몇 번의 헛구역질과 비틀거린 끝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되었고 쫙 빼입은 로브는 피로 엉망이 되어버렸으나 표적이 된 하와와는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매번 참고 견디는 건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바로 치료해드릴게요.

하와와가 다급한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치유 마법을 발동시켰지만, 일레이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다시금 검붉은 파멸의 빛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가 벽면에 깊은 잔흔을 남기며 사라졌다.

“치료할 여유는, 없어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바닥을 구르던 일레이나는 신음을 억누르며 몸을 일으켰고, 파우치에서 포션을 꺼내 대충 어깨에 흩뿌렸다.

“저 녀석을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봐요.”

기껏 준비한 가르티아의 성역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지금 상태로 다른 마법을 발동하는 것인 무리일 터. 그렇기에 하와와에게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 스태프를 쥐었다.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쉬아악!

대마도사가 움직이는 막대한 마나가 다시금 장내를 휘어잡는다. 농밀한 빙결의 결정이 그 앞에 응집되었고, 이내 한 자루의 기다란 창을 만들어냈다.

“항마(降魔)의 창? 《영원》의 마법인가. 빙결 속성에 다른 속성을 담기는 힘들 것이거늘.”

-가라!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하와와의 염원을 담은 빙창이 쏘아진다. 메피스토 역시 다시금 검붉은 파멸의 빛을 피워올려 그것에 대응하는바. 그 둘은 정확히 중간 지점에서 격돌하며 한 치의 물러남 없는 백중지세의 결착을 벌였다.

“신기한지로고. 오랜만에 인계에 나온 값어치가 있었군.”

메피스토는 어깨를 으쓱이며 감탄을 토해냈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이내 땅 밑에서 솟아오른 듯 둘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짤막한 유희는 여기까지다.”

콱.

메피스토는 두 손을 뻗어 하와와와 일레이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뼈를 으스러뜨려 죽이려는 듯 힘을 가해왔고, 일레이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그 손에 매달려 발버둥을 쳤다.

‘아, 안 돼…….’

시야로 블랙 아웃이 일어난다. 이제 머지않아 의식이 끊기면 정말로 끝을 맞이하는 것일 터. 우습게도 이런 상황에 이르자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

“…컥.”

돌연 감각이 되돌아왔다.

다시금 땅에 엎어진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왼쪽 어깨에서 오는 통증에 신음을 토해내면서도 고개를 비틀어 앞을 바라보았다.

“…가지가지 귀찮게 하는군.”

날카로운 얼음 가시 몇 개가 메피스토의 가슴을 꿰뚫고 솟아 있다. 자신들의 목을 부여잡고 있던 두 팔은 누군가 베어낸 듯 깔끔한 단면으로 마기를 풀풀 흘려대었다.

-언니!

-도우러 왔습니다.

헤으응과 호에엥 자매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사나운 표정으로 메피스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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