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3.
미르엘이 성벽 위를 박차며 달려 나갔을 때 푸르스름한 빛이 서린 검이 망령들의 육신을 무참히 난자했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원혼을 해방해주고자 단호하게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원래 미르엘은 호에엥과 함께 북서쪽 성벽을 담당했지만, 밑에서 일어난 싸움에 중앙 쪽이 무너져 내려 황급히 지원을 왔다.
저 멀리에서 검은 광택을 뽐내는 데스나이트 무리가 망령을 찢어발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몇만에 달하는 망령들을 옭아매기에는 역부족. 기어코 얼어붙은 성벽을 타고, 혹은 무너진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호에엥 씨!”
-맡겨 주세요!
어느 정도 성벽 위가 정리되자 미르엘은 뒤쪽에 있던 그녀를 불렀다. 호에엥은 양 갈래머리를 들썩이며 스태프를 휘둘렀고, 부서진 성벽 사이로 빙벽이 솟구치며 그 틈을 메워버렸다.
-돌격해!
다시 한번 스태프가 휘둘러지자 빙결의 기사들이 성벽을 넘어온 망령 군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개개인의 전력을 따지자면 이쪽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그렇기에 큰 피해 없이 안쪽으로 진입한 놈들을 전부 쓰러뜨릴 수 있었고 잠시간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일단 여기는 대충 마무리됐고.”
격하게 움직였기 때문인지 한겨울 날씨임에도 땀이 흘러내렸다. 미르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고, 성밖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으로 시선을 돌렸다.
쾅-! 쾅-!
시커먼 황소같이 생긴 괴물과 이진한이 충돌할 때마다 큰 광음과 함께 지축이 울려왔다.
어찌나 거친 싸움인지 그 주위로 숲의 경관이 남아나지 않는다. 벌써 성벽 앞으로는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진 모습이었다.
-이기시겠죠. 주인님과 같은 고대 영웅 중 한 분이신데.
“…그렇겠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호에엥의 말에 미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두 명의 싸움이었지만, 전장을 번뜩이는 빛은 수십 명이 한 명을 몰아세우는 것과 같았다.
벼락이 떨어지고, 불꽃이 용솟음치고, 날카로운 바람을 실은 화살이 그사이를 꿰뚫고, 그림자가 발을 묶으며 눈 부신 빛에 허공을 베어 갈랐다.
천변만화(千變萬化)의 현자라는 이름이 더 없이 어울리는 광경.
대체 어떻게 한 사람의 몸으로 저러한 경지에 올랐을까 심히 궁금증이 일었다.
-언니한테 방금 연락이 왔는데 북동쪽 성벽은 아직 괜찮나 봐요. 나무가 빼곡한 지형이라 망령들도 그곳을 넘어오는 것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양이에요.
“다행이네요. 제일 격전지인 이곳을 사수했으니 얼마간은 더 버틸 수 있겠죠.”
-그래요, 얼마간은.
원초적인 원흉인 유령 성채를 박살 내지 않는다면 이 위험은 계속되리라. 미르엘은 성벽의 난간을 꽉 붙든 채 그가 얼른 저 검은 황소를 쓰러뜨려 주길 응원했다.
-……!
그때 호에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미르엘 역시 움찔하며 돌아보자,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쪽이 공격받고 있어요!
“언니? 하와와, 헤으응 어느 쪽이요?”
헤으응 쪽이라면 자신의 주인까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일 터.
미르엘은 그 말에 긴장하며 즉시 뛰쳐나갈 준비를 했지만, 호에엥은 뒤쪽의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하 결계 쪽으로 누군가 침범했어요! 이쪽 성벽은 맡길게요! 헤으응 언니도 곧바로 합류한다고 전해왔어요!
“잠……!”
미르엘은 손을 뻗었지만, 제지할 틈도 없이 호에엥은 허공에 빙판길을 만들어 저택 쪽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고 때마침 성벽을 기어 올라와 모습을 드러낸 망령의 목을 베어냈다.
“…제발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후방 쪽으로 적이 우회해 올 것이라는 점은 이미 작전 구상 단계에서 예측한 상황이었다. 적이 마냥 멍청하지 않은 이상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고대 신의 잔재를 손에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기에 일행 중 가장 강한 전력인 일레이나를 하와와와 함께 배치했고, 이진한이 직접 결계까지 손을 봤다.
그럼에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이 불길함은 무엇일까.
꽈아악.
미르엘은 다시금 성벽을 올라온 망령의 머리를 부수는 것으로 제 근심을 떨쳐냈다.
***
-그것으로 끝인가. 기껏 이 모습이 되었는데 김새기 그지없군.
“…진짜 더럽게 단단하네.”
힘껏 제 근육을 뽐내는 트루마크의 모습에 이진한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욱신거리는 손목을 돌렸다.
마법이면 마법, 화살이면 화살, 주술이면 주술, 검이면 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녀석의 방어를 뚫기 힘들었다.
그러면서 육탄 돌진해오는 파괴력 또한 얕볼 수 없는 것이 한 번 휘말리게 되면 전신의 뼈가 바스러질 정도의 파공성을 흩날리며 주변 지형을 난잡하게 헤집었다.
‘성벽이 무너진 건 호에엥 쪽에서 어떻게 메꿔준 것 같지만, 한 번 균열이 일었으니 두 번째는 더 크게 나겠지.’
더군다나 조금 전까지 위쪽에서 느껴졌던 호에엥의 기운이 황급히 성벽을 이탈해 저택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 명백했다.
“…쯧, 조커는 아껴두려 했는데.”
이진한은 혀를 차며 용아청성창과 블랙 다이아몬드를 인벤토리로 돌려보냈다. 그 모습을 본 투르마크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또 무슨 신비한 술수를 부려올 테냐. 정면에서 그것을 받아내어 가루로 만들어버리겠다. 그러한 전신에 충만한 자신감이 검은 광택이 되어 맴돌았다.
“와라.”
마검(魔劍) 그라나다(Granada).
고대 악마를 상징하는 시커먼 마검이 이진한의 손에 쥐어졌다.
-…그것은.
트루마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과 같은 성질의 힘을 내포한 마검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 되는 존재라면 마검을 다룰 만하다며 납득했을 때, 돌연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쉬아아아악!
짙은 마기가 이진한의 전신을 휘감는다. 마치 새로운 외피가 씌워지는 것처럼 달라붙기 시작했고, 종래엔 신체의 형태마저 일부 바꿔버렸다.
-…네놈이 어떻게!
트루마크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악마화는 계약자 가운데서도 일부만이 내려받을 수 있는 권능.
그렇다면 저 드래곤 슬레이어 역시 자신들과 같이 72의 마왕 중 한 존재를 섬기는 자란 말인가.
“…거, 시끄럽네. 그만 좀 떽떽거려.”
이진한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바포메트의 계약자 - 악마화(惡魔化)】
〔잔여 마기 ─「♠」─ ●●●●●●●●●●〕
-모든 스테이터스가 10% 증가합니다.
-물리 저항 마법 저항력 증가.
-신성 계열 저항력 대폭 감소.
-어떤 식으로든 피격을 당한 대상은 치유력 감소 및 저주를 입습니다.
-다음 단계까지의 숙련도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대 신의 잔재를 흡수해서 그런 것인지 잔여 마기가 상태창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검호를 상대로 싸울 때도 3개면 충분했던 차에 10개까지 차 있는 것을 보면 투르마크를 찢어발기고도 남을 터,
‘다음 단계?’
그의 시선은 제일 밑줄로 향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악마화인데 벌서 다음 단계로 가는 숙련도를 충족했다는 것일까. 제법 궁금한 이야기였지만, 아쉽게도 그쪽에 신경 쏟고만 있을 여유는 없었다.
쐐애애애애액-!
이진한의 의식이 다른 쪽으로 빠진 틈을 타 투르마크가 다시금 제 몸을 포탄처럼 날려온 것이었다.
이미 코앞까지 닥쳐온 상황. 어설프게 피했다가는 몸 한쪽이 우그러지거나 팔다리가 뜯겨 나갈 것이 분명했다.
“후우.”
이진한은 왼손을 슬쩍 뒤로 당겼다. 짧게 숨을 내뱉는 것으로 준비 동작을 다지고, 허리를 힘껏 비트는 것으로 닥쳐오던 투르마크의 머리를 가격했다.
콰아아아앙-!
본래의 몸이었더라면 이쪽이 다시금 성벽에 파묻혀 핏덩이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찰나. 하지만 그 주먹질에 밀려난 것은 오히려 트루마크 쪽이었다.
-……!
쏘아진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난 녀석은 어정쩡한 자세로 잔해더미를 구르고 있었다.
검은 광택을 자랑하던 껍질은 잔뜩 균열이 간 채 우그러진 차. 트루마크는 충격받은 얼굴로 제 뺨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었다.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그그그극.
마검의 위로 짙은 마기가 휘몰아친다. 그것은 이내 잘 벼린 칼날의 형태를 이루었고, 그의 목을 향해 겨눠졌다.
“내 뒤에 있는 악마가, 네 뒤에 있는 마족보다 강한가 보지.”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가 씩 웃었다.
***
쿵.
위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에 일레이나는 제 손톱을 깨물었다. 지축을 울리는 심상치 않은 충격만 하더라도 벌써 수십 차례. 생각보다 싸움이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초조하신가요.
“…당연하죠. 다른 동료들이 위에서 싸우고 있는데.”
-그러면 조금 더 믿음을 주세요. 당신의 동료분들은 그럴 만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야 그렇, 긴 한데…….”
일레이나는 살짝 어색한 표정으로 하와와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닌 호문클루스의 몸으로 아직 자신은 바라보지도 못하는 경지인 초월지경에 도달한 자. 자칭 《영원》의 계보를 잇는다는 이터널 학파의 그 누구보다 그 계보를 짙게 물려받았다.
실질적으로는 선조와도 같은 존재이기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태도를 정하지 못했다. 하와와는 그런 일레이나의 심중을 짐작한 것인지 옅게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너무 어렵게 대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현자님의 동료는 제게 있어서도 존중할 만한 분들이니.
“존중이라니. 그건 너무 과분한, 데요.”
실질적인 경지의 수준으로 따지자면 자신은 그녀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에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하와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같은 《영원》의 계보를 이었기에 저는 알 수 있어요. 당신은 머지않아 지금보다 더 뛰어난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안에 내재된 잠재력은 저보다 더 뛰어난 듯하니까요.
“…너무 칭찬만 해주시는데요.”
선조 격의, 그것도 대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존재에게 잔뜩 칭찬을 받자 일레이나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현자님께서도 그것을 아시고 당신을 곁에 두시는 것이겠죠. 다른 두 분과 달리 당신은 직접 선택하신 거라면서요?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정말 내가 대단한 잠재력을 품고 있는 걸까?
하와와의 말도 그렇고, 베르너가 구태여 자신을 맹약이라는 이름으로 옭아매어 데려온 것도 그렇고 하여튼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콰아아아아앙-!
그때 이전과는 사뭇 다른 진동이 천장을 뒤흔들었다. 방심하고 있던 일레이나의 몸이 비틀거릴 정도의 충격. 그녀는 벽을 부여잡으며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신나게 날뛰시는 것 같네요. 말로는 교양을 찾으면서 막상 싸움이 닥치면 전투광이 따로 없다니까. …왜 그래요?”
하와와의 얼굴이 경직된 채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새하얀 결정으로 이루어진 스태프를 쥐었다.
-아무래도 저희 차례인 것 같네요. 누군가 위쪽의 결계가 돌파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