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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81화 (81/210)

◈ 081.

이진한은 온천을 나와 황급히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널찍한 응접실엔 이미 모두가 모여 있었다. 빈자리에 대충 털썩 앉으니 벽면에서 송출되고 있는 외부 화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까악.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노스 벨헤드렘 위로 짙은 그림자가 끼어있다. 농밀한 마기와 죽음의 잔향이 만들어낸 여파.

이곳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카만 까마귀들이 곳곳을 날아다니며 시체 위를 횡보했다.

-노스 벨헤드렘이 함락되었습니다. 도시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로 망자의 군단을 일으켰어요.

“이런 미친 새끼들.”

욕지거리를 내뱉는 이진한의 손끝이 떨려왔다.

노스 벨헤드렘은 절대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 적어도 오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었을 터. 교단은 그런 이들을 전부 죽이고 자신들의 군세로 삼았다는 말이 되었다.

‘거기다 유령 성채까지.’

초월지경인 사령술사의 전유물 「유령 성채」.

과거 미들턴에서 싸웠던 교주 아이돈이 궁지에 몰렸을 때 망자의 군단과 함께 사용하려 했던 마법이었지만, 진홍의 보옥에 파묻힌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망령 군단이 집요하게 이쪽을 물고 늘어질 테고, 뒤이어 활성화된 성채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지옥의 군세가 이쪽에 닥쳐올 것이다.

견적만 짜도 머리가 아파져 오는 상황이었다.

“도시에 있는 이들을 전부 죽였다고 해도 하루 이틀이면 각지로 소문이 다 퍼져나갈 거예요. 신성 왕국 쪽은 교단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니 금세 진압하러 오겠죠.”

일레이나가 의견을 내놓았다. 신성 왕국과 교단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추론할 수 있는 타당한 생각이었지만, ‘월드’의 생리를 익히 알고 있는 이진한은 조금 다른 의견이었다.

“과연 신성 왕국이 곧바로 올까?”

“…네?”

“교단이 은밀함을 버리고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총공세를 펼친 목표는 명백해. 최단 시간 내에 이쪽을 공격해 함락시키겠다는 거지. 하지만 신성 왕국에서 그러한 사정을 고려할 이유가 없잖아? 《영원》의 계보를 잇는 마녀들이 있다고 해도 북쪽 숲을 위해 싸움 도중 이곳에 난입할 것 같지는 않은데.”

자신이 신성 왕국의 군세를 이끄는 이었더라면 잠시 사태를 관망하다가 어느 한쪽이 무너지거나 적잖은 소모를 했을 때를 노렸을 터.

북쪽 숲의 마녀는 애초에 이곳에 침입하는 모든 이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 가운데 양측의 힘을 깎아내고 공격을 가한다면 두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

일레이나 역시 그것에 생각이 닿았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방비는 어떻게 되지?”

-수성의 준비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예전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대규모로 공격을 가해온 전적도 몇 번 있었으니까요. 수성에 나선다면 그리 단시일 내에 무너지진 않을 거예요.

하와와는 북쪽 숲의 시스템을 허공에 띄워 보여주었다. 이 저택을 감싸는 성벽, 그리고 그 위에서 닥쳐오는 적을 막을 빙결의 군세와 곳곳에 장치된 함정들까지. 확실히 무시할 전력은 아니었다.

‘빙결의 군세가 오백인가. 저들에 비해 턱없이 적지만, 애초에 이쪽은 성벽 위만 틀어막으면 되니.’

시스템을 가동하는 에너지는 고대 신의 잔재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임의로 축적해 이용하는 듯싶었다. 이 정도라면 적어도 며칠 정도는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으리라.

“준비되면 바로 발동해. 정면은 내가 막는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성벽 한쪽씩 맡아. 그간 열심히 수련했으니 실전에서 성과를 보여야지?”

“네!”

“맡겨주십시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일레이나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일레이나 너는 하와와 옆에 붙어 있어. 북쪽 숲에선 그녀가 핵심이다.”

“요인의 경호라는 건가요. 알겠어요.”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 마도사 한 명이 갖는 의미는 제법 크다. 하지만 대마도사인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이상 그녀는 하와와의 호위로 두는 것이 옳을 터.

-둘도 각자 역할을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힘낼게요!

하와와의 말에 헤으응과 호에엥이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흩어졌다. 이진한은 곧 지하 결계의 입구로 향하는 하와와와 일레이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막대한 기운의 군집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대현자의 눈이 활성화되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눈 내린 숲의 풍경을 지나고 얼어붙은 동토를 넘어서자 노스 벨헤드렘부터 천천히 진군해오는 망령의 군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한 명 한 명이 바로 직전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곳에 살고 있던 주민도 있고, 돈을 위해 온 상인이나 용병들도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예외 없이 죽었고, 그 이후에도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지긋지긋하게 많네.”

지평선을 까마득하게 매우며 몰려오는 꼴을 보자니 저번에 미들턴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지만, 이번은 대부분 인간의 형태인 것이 다른 점이었다. 마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 펼쳐지자 절로 손끝이 떨려왔다.

구구구궁─.

그와 동시에 저택을 감싸고 있는 숲의 경계로부터 지면이 솟구치며 이 주위를 둘러싸는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석재로 이루어진 성벽은 이미 여러 차례 이곳에 닥쳐온 적을 막아낸 것인지 적지 않은 상흔이 새겨져 있다. 곧 저택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그곳에 흡수되었고, 손상된 부분을 수복하며 더 단단한 모양새로 정형화시켰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성벽 위로 거의 오백에 달하는 빙결의 병사들이 생성되어 각자 병장기를 움켜쥔 채 다가올 적들을 기다렸다.

“별 피해 없이 막으면 좋겠는데.”

이진한은 작게 중얼거리며 성벽을 붙잡고 섰다. 저들의 목표는 고대 신의 잔재. 막대한 인원으로 공격해온다고 할지라도 단시간에 이곳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쪽의 시선을 끌며 필시 은밀하게 뒤를 공략할 터.

‘초월지경에 오른 존재는 한 명 이상이겠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이돈을 죽이고 일부나마 마왕의 격을 꺾었다.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어쭙잖은 전력으로 덤벼오지 않을 터.

그러니 최소한 두 명은 보냈으리라.

가장 손쉬운 공략 방법은 한 명이 이 앞쪽에서 군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목을 끌고, 다른 한 명은 직접 닥쳐 들어와 지하를 향하는 것이었다.

이쪽의 승리 요건은 얼마나 상대를 빨리 쓰러뜨리고 지하 쪽으로 합류해주는가.

일레이나에게 하와와의 보조를 부탁하긴 했지만, 그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망령 군단은 북쪽 숲 가장자리에 당도하자 그곳에 멈춰서 진영을 구축했다. 숲 안쪽에 수많은 함정을 비롯해 마물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아는 것인지 사뭇 조심스러워진 움직임이었다.

파아아앗-!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아무런 예고도 없이 허공으로 수없이 많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자잘한 마법은 무시한 채 가장 복잡하게 생겨난 술식을 바라보자 대현자의 눈이 그것을 순식간에 해석해나갔다.

화염 속성 대단위 마법 「살라만더의 요람」.

이 얼어붙은 숲을 전부 불태우며 진입해올 요량인 듯 시뻘건 불씨가 흩날리며 심상치 않은 폭풍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

“누구 앞에서 주름 자랑이야.”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스태프를 꺼냈다.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의 드래곤 하트로 만들어진 스태프 「블랙 다이아몬드」가 영롱한 빛을 발했고, 곧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마법진 위로 번쩍이는 섬광이 내리꽂혔다.

파각-파가각-!

마법은 높은 경지에 이를수록 섬세한 제어를 요구한다. 이진한은 그 흐름을 강제로 비틀었고 숲 위에 떠 올랐던 마법진들은 서로 충돌하며 제대로 된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 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더욱이 「살라만더의 요람」 같은 대단위 마법의 실패는 그 대가가 혹독한바. 숲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던 그 불씨는 망령 군단 위로 쏟아져 순식간에 수십을 태워버렸다.

“대마도사는 없는 것 같고.”

이진한은 가늘어진 눈으로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일반 흑마법사들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같은 대마도사 경지에 오른 존재라면 어렵지 않게 조금 전의 방해를 막아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을 보니 유령 성채를 만든 초월지경의 네크로맨서는 아직 노스 벨헤드렘에 머물고 있거나, 어지간히 고고한 성격을 지녀 잡스러운 일 따위를 하기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클래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그 뒤로 흑마법사들은 빈번하게 마법의 발동을 시도해왔다. 이쪽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듯 수십 개의 마법을 서로 다른 방위에서 만들어내었지만, 이진한이 누구인가. 그깟 눈속임 따위로는 경지를 초월한 대마도사를 농락하기엔 한참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드디어 무거운 발걸음을 떼시나.”

그렇게 얼마간 소리 없는 전초전이 벌어졌을 찰나, 먼저 인내심의 한계가 도달한 것은 저들 쪽이었다.

쿵.

몇만에 달하는 망령 군단이 진군해오기 시작했다. 새하얀 대지가 짓밟히며 앞을 가로막는 거목들을 전부 드러내며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디뎌온다. 하지만 섣불리 들어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북쪽 숲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앙!

숲 곳곳에 거친 폭발이 일어났다. 침입자를 막기 위한 함정으로, 개중엔 이진한이 직접 설치해놓은 것도 적잖게 자리했다. 고요했던 겨울 숲은 느닷없는 여파에 휘말려 만신창이가 되어간다. 하지만 애초에 이 숲이 만들어진 이유가 저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니 거침없이 이용해줄 뿐이었다.

“숫자로 밀고 들어올 셈인가.”

망령 군단은 멈추지 않았다. 자아 없이 오직 명령에만 따르는 존재들은 제 몸이 갈가리 찢겨나가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며 그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무려 오만에 달하는 군세이니 물량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의도일 터. 이진한은 그것을 눈 뜨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파아앗-!

가볍게 마나를 끌어올리자 하늘 위로 대단위 마법이 펼쳐진다. 초월 마법도 아니고 일반 마도사 클래스의 마법이야 몇 번이고 사용해도 지장이 없다. 그러니 신나게 숲으로 들어온 이들에게 쏟아부으며 차곡차곡 그들을 쳐부숴 나갔다.

“이래도 안 나와?”

녹아 흐르는 땅 위에 쓰러진 망령이 도합 일만 여경에 달했을 때, 그는 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망령뿐이 아니었다. 후방에서 흑마법사들이 연신 분전하며 마법을 발동했지만, 이진한은 그들의 머리 위로 샛노란 번개 하나씩 선물해주었다. 제법 피해가 쌓인 것인지 이제는 대놓고 마법을 사용하려 하는 간 큰 녀석은 없었다.

하지만 물량에는 장사 없다고 망령 군단은 성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얼마 뒤 아직 몇만이나 되는 아귀들이 이곳을 타고 넘으려 할 터.

하지만 이진한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누군 못 쓰는 줄 알고”

「망령 군단」의 스킬 자체는 초월지경에 오른 사령 술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시체를 조종하는 사령술은 그보다 하위 클래스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바. 「망령 군단」과 비교하자면 거느릴 수 있는 군세의 숫자는 부족하겠지만, 재료를 합성하거나 강화하지 않는다면 한 개체의 강함은 비슷비슷했다.

일전 미들턴이나 사람이 많은 곳에선 흑마법사로 오인당할 수 있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까지 그럴 이유는 없었다.

“「일어나라, 동토에 쓰러진 패배자들이여. 땅을 딛고, 검을 쥐고, 너희들의 안식을 방해한 이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세워라.」”

네크로맨서 클래스 스킬 「서먼 스켈레톤」

누덕누덕한 옷가지와 썩어가는 살점을 지닌 망령의 시체들이 덜덜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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