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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80화 (80/210)

◈ 080.

-…….

마녀들의 맏언니, 하와와는 흐뭇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택 밖 연무장, 상시 조용했던 그곳이 북적거리며 여러 소음이 들려왔다. 자신의 두 동생 역시 그사이에 섞여 신난 얼굴로 움직이고 있는 광경은 정말 보기 좋은 것이었다.

‘검은 현자.’

신비로운 분위기와 유려한 외모를 지닌 남자. 그를 저택에 들인 것은 누누이 말했듯 도박에 가까웠다.

고대 신의 잔재를 봉인하고 있던 지하 결계에 데려간 것 역시 그 사실을 판별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주인인 《영원》의 동료라면 무엇이든 보여주지 않을까.

다행히 그 도박은 잭팟을 터트렸고, 이제는 완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죠. 유예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북쪽 숲에 온 것도 다 무언가의 운명인 것이리라.

교단의 공세가 거세지는 상황에서 현자의 합류는 그야말로 천군만마의 가세와 같았다.

-…….

마법사 간의 대련이 끝났는지 소란스러웠던 밖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슬쩍 시선을 보내니 일레이나나 엘레오노라는 물론 막냇동생인 호에엥 역시 지친 모습으로 제 언니인 헤으응의 무릎을 벤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사랑스럽다, 아무리 만들어진 생명체인 호문클루스라고 하지만 자신들 역시 엄연히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감정의 변화를 느꼈고, 좋고 나쁨의 호불호도 뚜렷했으며, 살고자 하는 의지 역시 충만했다.

하지만.

쿨럭.

하와와의 입으로 시뻘건 선혈이 토해져 나왔다. 호문클루스는 만들어진 생명이기에 보통의 인간보다 한참 수명이 길다. 더욱이 대마도사에 이를 정도라면 기벽 년은 더 살 수 있을 터였지만, 그녀의 선조들은 누구랄 것 없이 이백 년을 넘기지 못한 채 단명했다.

이유인즉, 침입자의 격퇴로 인한 마모였다. 설화석을 얻으러 슬금슬금 숲으로 기어들어 오는 부류는 괜찮았지만, 고대 신의 잔재를 얻기 위해 결계를 돌파하려는 교단의 시도는 수백 년 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생명을 담보로 힘을 끌어내어 찬란한 불꽃을 피워 올리는 것으로 적들을 격퇴했다.

장녀인 하와와가 올해로 120살에 이르렀다. 50년 전, 대마도사에 이르렀을 때, 맏언니를 잃는 것으로 둘째 헤으응을 얻었고, 이십 년 전 마지막 남은 언니를 잃는 것으로 호에엥을 얻었다. 이상할 건 없다. 그저 이제 자신의 순번이 돌아왔을 뿐. 사랑스러운 동생들에게까지 이 운명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몸이 버틸 수 있는 것은 고작 한 번뿐. 다가올 싸움은 자신의 생사를 가를 것이 분명했다.

“내상이 제법 심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예상보다 더 좋지 않나 보군.”

-…….

문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하와와는 힘 빠진 미소를 짓고는 손을 휘둘러 흘러나온 피를 전부 지워버렸다.

-벌써 올라오셨나요. 대련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혼자 뭐하나 싶어서.”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녀의 앞에 앉았다. 밖에서 지쳐 쓰러져 뻗어있는 이들과 달리 그의 얼굴엔 한점 지침이 없다. 하와와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얼마 남았지?”

-…운이 좋아야 다음 한 번이에요.

“두 동생 말고 다른 호문클루스는? 굳이 세 명의 체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나?”

-주인님께서 정한 조건이라 저희가 변경하는 건 불가능해요. 설사 현자님이라 하실지라도.

“그러면 다음 대체자는 네가 죽어야 나오는 건가.”

-그렇겠죠. 천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북쪽 숲의 결계는 그렇게 유지됐답니다.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하와와를 바라보았다.

호문클루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가공된 정령일 터다. 그러니 호문클루스 주제에 이토록 강해질 수 있는 것일 터. 하지만 인간을 닮았고, 인간을 흉내내었다는 것은 그들이 지닌 원초적인 욕구까지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이 되었다.

-…저희 자매의 존재 의의는 이 결계를 유지하는 것이랍니다. 설사 제가 죽는다고 하여도 호에엥이 있어요. 그 아이는 잠재력이 뛰어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절 대신할 수 있겠지요.

“그 빈자리는 또 다른 하와와가 채우고?”

-자연스러운 이치랍니다. 적어도 이 북쪽 숲에선.

이진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지랄 같은 운명이었다. 천여 년 전 얼굴도 모르는 이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이때까지 수십, 수백의 선배들이 해왔던 것처럼 이 숲에 얽매이는 꼴이라니.

‘지독한 짓이네.’

「가디언」

게임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개념이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면 참 개 같은 짓을 해놨다며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겼으리라.

“이다음에 교단이 습격해왔을 때 너는 후방에서 다른 애들을 보조해. 괜히 앞으로 나섰다가 상처만 악화시키지 말고.”

-그러겠습니다.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은 순순히 나왔지만, 절대 따를 생각 없다는 것이 그 표정에서 드러나지 않는가.

“지금 당장은 무리인데, 일단 교단 놈들 쓰러뜨리고 저걸 어떻게 할 방법을 생각해보자. 내버려 두면 이 지긋지긋한 굴레는 계속 반복될 테니까 아예 원인을 없애버리는 것이 낫겠지.”

-…고대 신의 잔재를 없앨 수 있단 말입니까.

“조금 어렵긴 한데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내가 온갖 클래스에 능통하다고 해서 현자라고 불리는 건 알고 있지? 당연히 흑마법, 네크로맨서 계열도 할 줄 아는데 계약 맺은 존재 중에 바포메트라는 고대 악마가 있거든. 어제 지하에서 좋다고 마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걸 보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허나, 그 전부를 흡수하게 된다면 현자님도 부담이 될…….

“누가 전부 흡수한대. 고대 신의 잔재니, 뭐니 해도 어차피 거대한 기운 덩어리일 뿐이다. 그 존재를 이루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소실되면 형태가 허물어져서 증발하겠지. 하늘 위로 던져서 흩뿌리면 알아서 소멸하지 않을까?”

-…후후.

하와와는 웃음을 흘렸다.

가설에 가설을 더한 막무가내일 뿐인 이야기였지만, 말하는 사람의 이름이 있으니 제법 그럴듯한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탁.

단번에 찻잔을 비운 이진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와와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희생하겠느니, 뭐니 하는 생각은 고이 접어서 넣어둬.”

-그럴게요.

“대답은 잘하네.”

-힘내주세요. 제가 무리하지 않게.

하와와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들어올리며 파이팅이란 태도를 취했다. 이전과 다름없는 그 모습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을 따름이었다.

***

북쪽 숲의 도시, 노스 벨헤드렘.

얼마 전까지 이진한 일행이 묶었던 여관 근처로 거대한 몸의 남자가 자리 잡았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린 그의 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몰려들었고, 종래엔 무슨 종교의 회합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보고하라.」

가볍게 내뱉어진 그 말 한마디에 장내에 있던 이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복종의 모습을 보였다.

유일하게 그 가운데 서 있던 남자, 하우젠나임이 손끝을 떨며 고개를 들었고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명하신 대로 원정대에 섞여들어 북쪽 숲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결과 마녀 중 「빙검」과 「인형사」는 확인했지만, 모종의 변수로 인해 「하얀 마녀」의 신원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모종의 변수?」

거대한 기운을 지닌 존재의 눈동자로 흥미가 깃들었다. 그 시선을 직격으로 받은 하우젠나임의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지만,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의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최소 간부급의 강자였습니다. 정체를 숨기고 원정대에 참가한 것을 보니 그들 역시 애초부터 마녀와 접촉하는 것이 목적인 듯했습니다. 종래엔 그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흠.」

“…추측하기로는, 예의 그 드래곤 슬레이어로 예상됩니다. 마르바스 교단과 충돌해 교주 아이돈을 쓰러뜨린.”

「마르바스, 그 추악한 종자들을 대신 죽여준 것은 치하할 만한 일이지만, 내 앞길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

권좌에 앉은 남자가 팔걸이에 기대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유희로서는 더없이 걸맞은 상대다. 이 시각을 기점으로 이곳 노스 벨헤드렘을 접수하고 죽음의 군세를 일으켜 북쪽 숲으로 진군한다.」

“명을 받듭니다!”

권좌의 양옆으로 도열해 있던 이들이 목숨을 불사할 각오로 외침을 토해냈고,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도시에 곳곳에 비명과 소음이 난무한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노스 벨헤드렘엔 원주민과 설화석의 원정을 위해 체류하던 이들이 수천 명은 머무르고 있던 차였다. 당연히 용병도 많았고, 제법 명성이 있는 실력자 역시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먹고 마시는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바. 누구는 술을 마시다가, 누구는 식사하던 중 중독되어 피를 토하며 죽고, 누구는 잠을 자다가 창문 사이로 흘러 들어온 연기에 뒤덮여 질식했다.

더러는 그 이변을 눈치채고 광장으로 나와 일단의 무리와 싸우기 위한 준비를 했지만,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습격은 변수를 허용치 않았고 그들 모두 예외 없이 이 차디찬 날씨 가운데 얼어붙은 대지 위에 누운 시체가 되었을 따름이었다.

“총 4827구의 시신. 준비되었습니다.”

「시작하도록.」

남자의 시선을 받은 흑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혼제의 마법을 시행한다. 그사이 흘러내리던 피가 얼어붙은 시체들 사이로 농밀한 마기가 내려앉았고, 저마다 관절을 비틀며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남자는 씩 웃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망자의 부대, 이 정도면 숲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기에 충분한 전력이리라.

「그마저도 부족하다면.」

꽈아악.

언월도를 잡은 그의 손 위로 시퍼런 핏줄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점차 시커먼 색으로 물들었고, 인간과는 다른 무언가의 형태로 바뀌었다.

「내가 직접 열면 그만이니.」

쿵.

남자가 언월도의 끝을 얼어붙은 대지에 내려찍었을 때, 망자의 군단을 대동한 교단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

【347:58:24】

북쪽 숲에서의 삼 일째의 날.

“후아….”

이진한은 홀로 온천을 이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여성들과 함께 온천을 이용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렇기에 그녀들이 수련에 매진하는 사이 홀로 느긋하게 여유를 즐겼고, 종래엔 술까지 꺼내와 북쪽 숲의 경관을 안주 삼아 잔을 기울이는 것을 반복했다.

“분위기 죽이네. 이따가 밤에도 와야지.”

시간의 유예는 아직 넉넉했고, 교단은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간 고생했으니 조금 더 쉬라는 것일까. 하루 정도는 더 나태하게 보내도 괜찮을 것 같기에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음?”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밖에서 울려 퍼졌다. 이진한이 등 뒤로 고개를 젖히며 문가를 거꾸로 바라보았을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베, 베르너 님! 도시가, 도시가!”

엘레오노라는 상당히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숨도 쉬지 않은 채 뛰어온 것인지 호흡은 거칠었고, 땀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이 그 시야를 가렸다.

“도시가! 도, 아…….”

온천 안쪽을 바라본 엘레오노라의 얼굴이 제 머리카락의 색처럼 새빨갛게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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