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9.
캉-!
거친 고성이 연무장 가운데 울려 퍼진다. 헤으응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기세로 이진한을 공격한 뒤, 그 반동을 이용해 다시 거리를 벌리며 태세를 가다듬었다.
‘묵직하네.’
800에 달하는 레벨을 허투루 먹은 것이 아닌지 무라마사를 때리는 힘이 사뭇 묵직했다.
“그러면…….”
이진한은 천천히 무라마사를 들어 올렸다.
그 본인이 사용하는 독자적인 검술이 있었지만, 구태여 무라마사를 꺼내든 이유는 따로 있지 않은가.
두 다리를 굳건히 받친 채 카타나를 들어올려 중단의 자세를 취하자, 기억 속에 있던 검호와 똑닮은 모습이 되었다.
…문득 떠올린 것인데, 어딘가 유이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카타나, 사무라이. 설마 검호의 출신은 남쪽 해상 왕국인가. 유이치가 세운 그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뜬금없이 나타났던 사무라이의 개연성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
헤으응의 얼굴에 긴장이 깃든다. 카타나를 치켜세운 그의 기세가 한층 더 달라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한두 마디 조언을 얻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지만, 막상 이 상황에까지 이르니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파밧-!
헤으응이 땅을 박찼을 때 얼어붙은 대지의 파편이 흩날리며 결계의 벽면을 때린다. 이진한은 그녀가 미르엘처럼 주위를 얼려 사각에서 공격이라도 해오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헤으응은 오로지 제 검에 전력을 담았다.
콰아아앙-!
바닥으로 자글자글한 균열이 생겼다. 그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낸 이진한이 살짝 두 눈을 크게 뜰 정도의 위력. 헤으응은 카타나를 강타한 힘을 이용해 몸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일순간 가속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파앗!
내질러진 발끝이 턱을 스칠 듯 빗나갔다. 이진한이 슬쩍 뒤로 몸을 빼내자 빗나간 힘을 이용해 재차 균형을 잡은 헤으응이 연격을 내질러왔다.
쉭! 쉭!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검이 찔러질 때마다 머리카락 끝자락이 얼어붙는다. 종래엔 얼음 가루가 부서져 내리며 허공이 반짝일 정도였다.
“합!”
피하기만 하던 이진한의 움직임 사이로 빈틈이 드러났다. 헤으응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기다란 오러 블레이드가 그 검에서 솟구치며 그 위치로 검을 쑤셔박았다.
“제법 날카롭기는 한데.”
무라마사의 날이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찌르기는 일점을 꿰뚫는 만큼 강한 위력을 자랑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큰 빈틈을 드러내기에 검술 중에선 손에 꼽을 정도로 리스크가 컸다. 헤으응 정도의 실력자라면 설사 상대가 비등한 실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어렵지 않게 카운터를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진한은 결코 비등한 실력을 지녔다고 할 수 없는 상대였다.
캉-!
백색 검신이 궤도를 잃고 튕겨 나간다. 헤으응은 이를 악물고 그것을 비틀어 제 앞으로 끌어당기려 했지만, 이진한의 눈은 이미 검호와 같이 그 권역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
‘과연.’
카타나, 무라마사를 쥐니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검호가 사용했던 검성의 검술은 카타나에 맞춰 특화된 것. 반절 이상에 다다랐을 때 이미 신속에 이르렀고, 권역 내에서 그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서걱.
-…큭.
헤으응의 앞섬이 잘려나갔다. 본래라면 나풀거리는 옷깃 사이로 쩍 갈라진 상처가 생겼겠지만, 이진한이 그 끝에서 손속을 둔 덕분에 옷만 베이는 선에서 그쳤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목숨의 위기를 느꼈는지 몇 번이고 땅을 박차 물러났고, 한참이나 거리를 벌린 뒤에야 한숨을 내쉬며 제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검호의 검입니까.
“그래. 이번이 두 번째 사용하는 것인데 아직 좀 어설프네.”
이진한은 무라마사의 날을 톡톡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반 검으로 펼치다가 카타나를 사용하니 이질감이 확 줄어든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범용성이 떨어진다는 것.
카타나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면 검술 자체를 뜯어고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위력 면에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화되어 있네.’
제대로 마나를 싣고 알맞은 순간에 일격을 가한다면 검술 스킬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위력을 자랑할 터.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만큼 숙고해봐야 할 문제였다.
“그러면 대련은 대충 끝난 건가요?”
“그렇지.”
일레이나가 결계 사이로 슬쩍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헤으응 정도면 방금의 공방으로도 많은 것을 느꼈으리라.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미르엘 역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사색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쪽의 대련을 보며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그러면 이제 제 차례군요.”
“너도?”
“네. 하루 기다렸으면 많이 기다린 거죠. 더욱이 이터널의 애머시스트라 불리는데 《영원》의 마법을 보고도 참으라고요?”
그녀는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곤 자신이 들어온 결계의 틈을 바라보았다.
“자, 당신들도 어서 들어와요.”
“…저도 실례할게요.”
-…시, 실례합니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엘레오노라 뿐만 아니라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를 호에엥이었다.
어린 꼬마의 모습에 양 갈래머리를 흔들며 쫄래쫄래 엘레오노라의 뒤를 따라온 그녀는 곧 이진한의 앞에 머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저, 저도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가요!
“괜찮긴 한데, 네 언니한테 배우는 게 더 낫지 않나?”
-저희 쪽에도 주인님의 마법에 대한 건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언니도 내심 궁금해하던 눈치였는데, 아직 상태가 좋지 못하다 보니까요.
그 정도로 좋지 않은 것인가. 이진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저택을 바라볼 찰나, 호에엥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금 허리를 숙였다.
-아, 안 될까요?
“안 될 거야 없지. 네 특성은 소환인가?”
-아, 네. 정확히는 연금에서 주물과 매개를 통한 소환이에요.
“흠.”
이진한은 전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매개라는 것은 다른 자매들과 같이 얼음, 그리고 주물은 같은 형태의 소환 물을 찍어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다수의 약자와 싸우는 데는 더없이 적합한 능력이네.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건 몇 기 정도지?”
-뒤를 생각하지 않고 사용한다면 100기 정도를 한 번이 움직일 수 있어요. 적정선은 5, 60 정도고요!
빙결의 기사 하나하나가 익스퍼트 중급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호에엥의 경지가 일레이나와 비슷한 것을 생각하자면 말도 안 되는 효율.
헤으응 역시 자랑스러운지 제 동생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호에엥은 역대 자매 중 소환사로서의 잠재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성장하면 저 정도는 우습게 뛰어넘겠죠.
-헤헤.
이진한은 시선을 돌려 잠자코 기다리던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를 바라보았다.
“일레이나는 원하는 것이 뻔하고, 엘레오노라 너도?”
“저도 마도사로서 정점에 이르신 《영원》의 대마도사님을 존경해왔거든요.”
언제는 검은 현자를 제일 좋아했다고 말했으면서, 이진한은 속으로 툴툴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단 너희들이 펼칠 수 있는 《영원》의 마법을 펼쳐봐.”
“…없는데요?”
“없다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해온 일레이나의 말에 이진한은 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지하에서 말씀드린 건 빈말이 아니었어요. 이터널 학파는 그분의 자취를 쫓으며 《영원》 여러 마법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발전시켰지만, 정작 중요한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죠. 그래서 아직 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어요. 저야 옛날 기록과 논문 수백 개를 독파한 끝에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는 거고요.”
“…하긴, 그렇겠네.”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그의 태도에 일레이나는 두 눈을 끄덕였다. 같은 동료였으니 혹시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진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하는 것이었다.
“《영원》의 오리지널 마법은 최소 초월지경에 올라야 쓸 수 있어.”
“그, 지하에서 보여주셨던 것도요?”
“이거?”
이진한이 손을 들어올리자 각기 다른 색의 불빛이 점멸하더니, 익숙한 형태의 다각형을 이루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회전했다.
“네네네네네! 그거요, 그거! 어느 고대 문헌에서 읽은 건데, 《영원》의 마법은 그 형태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어요.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한다. 네 말대로 그녀가 사용하던 모든 마법의 근원이었지.”
이터널(Eternal)의 《영원》.
그녀의 이명은 어떻게 영원이라 명명되었는가. ‘월드’ 내에서 공간 마법과 마찬가지로 시간 관련 마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영원》은 초월지경에 올랐을 때 모종의 깨달음을 얻었는지 편법을 사용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마법 술식을 창조해내었다.
‘예전에 술 마시다가 대체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자신도 이것저것 해보다가 운 좋게 들어맞은 거라고 했지.’
실제로 이진한 자신도 그것을 따라 해보았지만, 무엇이 문제였던 것인지 가장 기본 골조인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발현시키는 것이 한계였다.
“…….”
혹시 모르기에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상대의 정체나 검호의 검술 같은 것도 어렵지 않게 간파해내는 대현자의 눈 역시 그 편린 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그러면 지금은 불가능한 건가요.”
일레이나는 어깨를 털썩 떨어뜨리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서 기본조차 익힐 수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진한은 고개를 저었다.
“《영원》의 마법은 불가능해도 다른 마법들은 봐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 예전에는 술식이 다르다고 힘들다고 하셨잖아요.”
“이 눈에 익숙해졌거든. 지금은 충분하다.”
이진한은 제 눈을 두드리며 말했다.
대현자에 다다르기 전 현자의 눈으로는 단편적인 정보밖에 파악하지 못했다. 그마저도 머릿속으론 이해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요소들이었다.
대현자에 오른 직후도 마찬가지였으나, 몇 번의 싸움을 경험한 끝에 대현자의 눈이 주는 정보를 완전하게 받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미르엘과 같이 실전 방식으로 하는 게 좋겠지. 모두 함께 덤벼봐. 작전을 상의해도 좋고 차례를 정해도 좋고 마음대로.”
그가 손을 까딱이자, 여성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잠시 시간을.”
“얼마든지.”
일레이나를 필두로 한 세 여성은 쑥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진한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허공으로 그녀들의 정보를 정리한 상태창을 띄웠다.
‘엘레오노라는 바람, 일레이나는 화염 속성에 특화되어 있다. 일레이나 쪽은 평상시에도 즐겨 사용하는 마법이 그 부류인 것을 보니 스스로 알고 있겠지. 문제라면 엘레오노라 쪽인데.’
바람 속성은 마법 중에서도 효율이 좋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수 측에서의 수준이지, 조금만 상위 경지로 올라가면 어떤 분야보다 빠르게 도태되는 분야인바. 정말로 효율을 말하기 위해선 다른 마법에 특기 속성인 바람을 섞어 사용해야 했다.
‘일단 될 수 있는 대로 다 뜯어 고쳐본다.’
선명히 활성화된 대현자의 눈으로 그녀들의 마력 회로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세히 드러났다.
회로뿐만이 아니었다, 마나의 축적, 흐름, 발현, 발동 방식, 습관, 그리고 오류까지.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할 수 있었다.
“이제 슬슬 성장해주지 않으면 이쪽이 곤란하니까.”
그녀들을 바라보는 이진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