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8.
“수천 명이요? 고대 영웅은 일곱이 전부 아니었어요?”
“정말 우리 일곱이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일레이나의 의문에 이진한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신이야 신. 물론 완전한 신은 아니고 데미갓, 반신(半神) 정도긴 했지만, 고작해야 인간 몇몇이 달려든다고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는 건 큰 오산이지.”
장엄한 싸움이었다.
1부 퀘스트를 하며 끌어낸 각 국가의 군대가 연합을 맺고, 고대 악신의 토벌이라는 대업 하에 하나로 뭉쳤다.
일천의 기사가 결사의 각오로 고대 신의 발을 묶고, 일백의 마도사가 심장이 쪼그라들 때까지 마법을 사용해 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그들도 사람이었던 걸까.’
어디서부터 게임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가.
이진한은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자신의 앞에서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한 그녀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호칭이 붙은 고대 영웅들은 각자 그 군단을 이끌던 대표다.”
“그 하나하나가 베르너 님처럼 강했나요?”
“그렇지. 근소하게 차이는 있었지만, 전부 각 클래스에서 정점을 찍은 자들이었지.”
월드의 랭커 중 10위 아니, 7위 안에 드는 진짜배기 괴물들. 먼 이야기도 아니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싸움이었기에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혹시, 이런 질문은 실례입니까?”
“뭔데?”
“고대 영웅 중 최강은 누구였나요?”
주저하는 표정으로 물어온 미르엘의 모습에 이진한은 피식 웃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서, 누구예요?”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 역시 흥미가 동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봐온다.
이진한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갈리지. 누구는 대단위 공격에 특화되어있고, 어떤 클래스는 특정 클래스를 상대하는 대에 특화되어있으니. 일단 그런 건 다 제쳐두고 대인 전투로만 보자면.”
“보자면?”
“《불굴》이겠네.”
“《불굴》의 광전사요? 조금 의외네요?”
“왜? 《영원》이 차지할 줄 알았어?”
“아니요. 당신이라면 망설임 없이 《지혜》라고 할 줄 알았거든요.”
《지혜》의 검은 현자. 즉, 그 본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진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들어 일레이나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말투가 좀 거슬린다? 내가 대단한 건 맞지만, 자기 객관화는 잘 되어 있거든? 그리고 최강이라고 해봤자 다 근소한 차이야. 어느 한순간에 변수로 뒤집힐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아앗! 폭력 반대!”
또 한 번 이마에 딱밤을 맞은 일레이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상처를 부여잡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던 엘레오노라는 짐짓 궁금하단 표정으로 물어왔다.
“《불굴》은 어떤 분이셨어요?”
“음.”
이진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불굴》의 이름은 나카무라 유이치. 한국 쪽 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인 일본인으로 그가 월드를 플레이하면서 만났던 유저 중엔 가장 똑똑하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자랑했다.
‘잘 섞여 지냈지.’
예전에 넌지시 물어보니 한국에 교수로 온 이유가 ‘월드’ 때문이라 했다.
자국인 일본에도 월드가 있긴 했지만, 한국만큼 활성화돼있진 않았다. 그렇기에 이왕이면 제대로 즐겨보고 싶은 마음에 한국으로 이직했고, 지금 이렇게 랭커까지 올라왔다며 자랑도 했었다.
딱히 이 나라에 대한 악감정도 없었고, 오히려 환상적인 나라라며 호감이 가득해 랭커 무리에서도 별 잡음 없이 잘 섞여 들었다.
다만.
“한 마디로 미친놈이었지.”
“…네?”
“전쟁광이라는 이름이 딱 맞을 정도였어.”
전투에 들어가는 순간 사람이 180도 바뀌었다. 일본을 벗어났어도 사무라이 정신만은 버리지 않았느니, 뭐니 하면서 피 튀기는 전장을 찾아 헤맸다.
그런 그에게 강한 힘과 무지막지한 내구력을 자랑하는 클래스인 광전사는 딱 들어맞았다. 준수한 피지컬에 대학 교수를 할 정도로 뛰어난 머리가 합쳐지니 그야말로 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도 한 세 번 싸워봤는데 두 번 지고 마지막에 겨우 한 번 이겼지.”
첫 전투에선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어떻게 카운터만 정확하게 집어서 공격해올 수 있냐고 묻자 유이치는 씩 웃으며 전부 분석해왔노라 말했다.
그걸 분석 한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싶었지만, 다른 랭커들과도 싸울 때 그 전투 기록 하나하나를 조사해 가는 것을 보면 빈말은 아닌 듯싶었다.
그렇기에 이진한 역시 그 방법을 따라 했다. 유이치의 패턴을 면밀하게 분석했고 공략을 구상한 뒤에 다시 결투를 신청했다.
그렇게 성사된 두 번째 매치에선 정말로 근소한 차이로 아쉽게 패배했지만, 마지막엔 열합 내에 압도적인 격차로 찍어 누를 수 있었다.
결과가 나온 직후 시뻘게진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을 때의 그 느낌이란.
듣기로는 완벽하게 승리를 거머쥔 것은 자신이 처음이라 했다.
‘…그러면 내가 최강인가?’
《불굴》의 광전사, 나카무라 유이치.
이 세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원정 이후 대륙의 남부로 내려갔고, 그 끄트머리에서 해상 왕국을 세웠다. 참으로 그 다운 결말이 아닌 듯싶었다.
-저, 저기…….
그러던 찰나에 누군가 머뭇거리며 그들 사이로 다가왔다. 마녀 중 둘째인 헤으응으로,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베베 꼬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가르침?”
-네. 자매 중 검사는 저 혼자라 싸우는 걸 빼면 홀로 수련했거든요.
“어려울 건 없지.”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미르엘을 바라보았다. 잠시간 멍하니 있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눈치챘고 흠칫 놀라며 저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하나요?”
“이 정도 강자와 대련할 기회는 그리 흔한 게 아니야. 너도 봤잖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와와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미르엘은 내려놓았던 검을 들었다. 그러곤 서로를 바라보며 거리를 벌렸고, 이내 고요한 기세로 마주 섰다.
“마나는 사용하지 말고, 순수 검술로만. 알겠지?”
“예.”
-명심했습니다.
쉬아아악-!
둘은 동시에 누구랄 것 없이 땅을 박차며 서로에게 쇄도했다.
이진한이 잠시 팔짱을 끼며 그 광경을 바라보자, 일레이나가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아무리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힘들겠죠?”
“하와와는 이미 마스터 경지에 올랐다. 마법으로만 따지자면 너보다 두 계단은 더 윗줄이야.”
“…그런 것 치고는 잘 싸우고 있는데요?”
“그러네?”
그녀의 말대로 미르엘은 의아할 정도로 잘 싸우고 있었다. 하와와의 연격은 마치 폭풍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막아낼 수 있는 건 막아내고 피해낼 수 있는 건 피해내면서 아무런 상처 없이 대련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와와 쪽에서 봐주고 있는 건 맞지만…….”
미르엘의 성장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랐다. 두드릴수록 단단해진다는 것인가. 과연 오스칼 제국의 북방을 지키는 브레스트 가문의 핏줄다웠다.
하지만 서로 간의 격차는 절대적. 힘에서 밀리던 미르엘은 대검을 쥐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위력을 극대화에 위기를 벗어나려 했으나, 하와와가 그 간격에서 오는 틈을 놓칠 리가 만무했다.
캉-!
거친 마찰음과 함께 프로스트가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다.
미르엘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제 손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가르침에 감사를.”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인사를 끝으로 대련이 종료된다. 미르엘이 터덜터덜 돌아오자 수고했다고 해준 이진한은 이번엔 그 자신이 앞으로 나아갔다.
“몸은 좀 풀렸겠지?”
-예열은 충분합니다.
헤으응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고개를 미소를 지었다. 연무장 위에 선 이진한은 인벤토리에서 용아청성창을 꺼내려 했으나, 이내 손을 멈칫하고는 다른 검으로 노선을 바꿨다.
‘이참에 숙련도나 올려놓아야지.’
초월지경 중 가장 효율이 좋은 것이 바로 검사 클래스였다. 대마도사 가지곤 앞으로 닥쳐올 녀석들과 싸우는 데 한계가 있을 터니 하나라도 서둘러 달성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도 마나 없이 싸우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재미없지.”
이진한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선 지면으로 결계가 생겨났고, 내부와 밖의 공간과 단절되었다.
“어지간한 충격은 다 견딜 수 있을 거다. 빠져나가는 건 일레이나 쪽에서 잡아줄 거고.”
“맡겨주세요.”
그녀가 손을 흔들며 대답하자 헤으응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검을 쥐었다.
-그렇다면,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쉬아아악-!
매서운 질풍이 일어나며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지척에 이르렀다. 이전과 차원이 달라진 속도에 미르엘이었더라면 당황하며 물러났겠지만, 이번 상대는 그녀보다 약자가 아니었다.
“이 정도가 전력이라면 조금 실망스러운데.”
콱.
제 목을 노리고 휘둘러져 오는 검을 찍어 바닥에 누르며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제대로 덤벼보라. 그러한 태도에 헤으응의 얼굴에 진지한 기색이 깃들었다.
-만개하라.
파스스스─.
그녀의 눈동자로 투명한 빛이 깃들었을 때, 그 주위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뼈 시린 냉기가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역시, 너희들은.”
미르엘의 권능과 같이 빙결이라는 속성은 같았지만, 그 발현 구조에 있어서는 호수와 바다만큼이나 차이를 지녔다.
저저저적-!
땅을 딛고 선 발밑으로부터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진한은 가볍게 다리를 털어내는 것으로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헤으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그에게로 몸을 날렸다.
쿵!
검과 검이 부딪치자 얼음 결정이 흩날린다. 이제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지경에 도달했을 때, 이진한은 설렁설렁 쥐었던 검 자루를 다잡았다.
“제대로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랜드 소드마스터 초월 스킬
「백야극광(白夜極光)」
쉬아아아악-!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눈 부신 빛을 뿜어내며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진 그것은 이내 얼어붙은 얼음 결정을 모조리 깨뜨렸고, 남은 여파는 헤으응에게까지 도달했다.
-흡!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막아냈으나,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설마 자신의 능력이 이리 단숨에 파훼될 지는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방금, 방금 그 기술이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백야극광(白夜極光). 검호가 사용하던 기술이지. 아마 네가 다음 경지에 도달하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검호, 오스칼 제국의 검호입니까.
헤으응은 두 눈을 반짝였다. 같은 검을 쓰는 검사로서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듯했다. 이진한은 검에 붙은 서리를 털어버리곤 다시 그것을 들었을 찰나,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검호의 검도 있었지.’
정확히는 검성의 검술이었다. 제자인 검호는 제 스승의 검술을 건드렸고, 자신에 맞춰 독자적으로 개량했다. 그렇기에 북쪽 숲에 들어오기 전 여관에서 미르엘과 대련을 할 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났었다.
“…설마 검이 문젠가?”
검호의 검술을 읽어낸 대현자의 눈은 이상이 없다.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은 그 외의 요소에서 생겨난 문제점일 터.
“벌써 항복한 건 아니지?”
이진한은 인벤토리에서 신도(神刀) 무라마사(村正)를 꺼내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