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7.
《영원》은 외모만큼이나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자신만큼은 예외로 손쉽게 이 안으로 드나들 수 있게 설정했을 터.
아마 그 열쇠는 《영원》 마법일 것이다.
그녀가 《영원》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오리지널 마법에 있었다.
“…이렇게 했던가?”
이진한의 손 위로 마나가 요동쳤다.
적, 청, 녹, 황, 흑, 백.
이터널(Eternal)의 영원을 상징하는 색의 조합이었다. 각기 다른 빛깔을 띤 마나가 천천히 움직이며 형상을 이뤘고, 이내 하나로 합쳐지며 수십 개의 각을 지닌 다각형의 구조물을 이루었다.
“어, 어, 어!”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신기하단 듯 지켜보고 있을 때, 일레이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그거, 그거 분명히!”
“맞아.”
《영원》의 오리지널 마법 「삼라만상(森羅萬象)」, 그 골조의 기본이 되는 형태였다.
“잠깐 들어갔다 올게.”
-…알겠습니다. 부디 성공하시길.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하와와 역시 놀란 눈치였다. 《영원》의 계보를 이은 그녀였기에 이진한이 발한 마법의 정체를 더욱 잘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나중에 다 알려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꼭, 꼭 이에요.”
일레이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흥분과 열망에 휩싸여 있었다. 그 눈동자에 서린 광기를 본 이진한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난간에 발을 걸쳤다.
‘나름대로 이지적인가 싶더니,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마법사군.’
그는 망설임 없이 뛰어올라 결계의 위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방어 마법이 발동해 자신을 튕겨 보내면 어쩌나 싶었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그렇게 손안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술식을 유지한 채 결계에 닿자, 유의미한 변화가 눈앞에서 일어났다.
웅웅─.
결계는 마치 이진한을 주인이라 인식한 듯 자연스럽게 길을 텄다. 곧바로 그 위를 걸어가자니 거대했던 뿔의 파편이 그 위용을 여실 없이 드러냈다.
“…크기도 하네.”
이진한은 천천히 그 위를 매만졌다.
투박하고 거친 표면으로 딱딱함이 느껴졌다. 월드 공인 최강의 강도를 자랑하던 오리하르콘조차 흠집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니 아마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단단한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할 터.
게임일 적에는 그냥 눈으로 보이는 거대한 크기에 감탄이 나왔지만, 이 세상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뿔을 매만지니 그 내부에서 이질적인 힘이 느껴졌다.
“신력(神力)? 아니, 갓 파워라 불러야 하나.”
어느 쪽이든 촌스럽기 매한가지다. 자신은 작명에 센스가 없는바.
다른 동료들이 있었더라면 제법 그럴듯한 이름을 지었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흠.”
이진한은 뿔을 매만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대현자의 눈은 진작에 활성화한 채 그것을 관조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들어오는 정보들은 줴다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마나도 아니고, 신성력도 아니고, 내공도 아닌데.”
어떻게 써먹을 방도가 있기에 교단에서 탐내는 것일 터. 이진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주먹을 쥐었다.
“흡-!”
쩌엉!
가볍게 그 위를 후려치자 귀청을 찢을 듯한 광음이 울려 퍼진다. 공동안은 닫힌 공간이었기에 메아리가 커졌고, 저 위쪽의 난간에선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으음.”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흠집조차 나지 않은 뿔을 바라보았다. 고대 신과의 싸움 당시 녀석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줬던 것은 성검과 마검이었다. 그러니 뭔가 반응을 보려면 그 둘 중 하나가 있어야 할 터. 원래 지니고 있던 성검인 듀란달은 파괴되었지만, 때마침 새로 얻은 마검이 있었다.
“나와라.”
마검 그라나다(Granand).
매끄러운 흑색 검신의 자태가 그의 손 위에서 빛을 발한다.
이진한은 그것을 두 손으로 잡고는 방금과 같이 힘껏 휘둘렀다.
쉬아아악-!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짙은 마기가 질주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진 뒤에도 뿔은 여전히 멀쩡하게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도 틀렸나.”
성검이라면 무언가 달랐을까.
괜시리 부러진 듀란달이 아쉬워지는 이진한이었다.
“…응?”
그러던 차, 대현자의 눈이 이질적인 흐름을 탐지했다.
“뿔 안쪽에서 마기가….”
뿔 안쪽에서 짙은 마기가 새어 나와 그라나다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진한은 주춤하며 살짝 뒤로 물러났지만,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았기에 슬쩍 마검을 들어 올렸다.
슈우우욱─.
그라나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온 마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는 혹시나 몰라 상태창을 확인해보았으나, 어째서인지 그곳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윽?!”
그러다가 어느 시각을 기점으로 마검의 무게가 급격히 무직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한 손가락으로 들어도 충분했지만, 종래엔 두 손으로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져 마나까지 끌어올려서 겨우 균형을 잡았다.
“음.”
가늠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이 그라나다에 일렁거린다. 바포메트와 계약된 연결 쪽에서는 더없이 흡족한 감정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쉬아아아아아악-!
그저 가볍게 휘두른 것이었다. 하지만 마검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보이며 그 궤적을 따라 솟구친 마기의 잔흔은 마치 온 세상을 뒤덮을 듯 해일처럼 주위를 휩쓸었다.
“…오우.”
이진한은 헛바람을 내뱉으며 몸을 움찔했다.
황급히 거두어들여서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이 공동 자체가 무너져 내릴 뻔했다. 그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라나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마검의 소환을 해제하며 씩 웃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횡재인데.”
단순히 마검 하나로 뽑아낸 마기가 이 정도이다. 뿔을 매개로 사용한다면 얼마나 막대한 힘을 끌어다가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사용할 수 있는 한정적이겠지만, 만약 이 힘을 다룰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어지럽네.”
마왕이 이 땅에 강림하는 개연성은 이것으로 충분히 갖춰졌다. 악신의 몸뚱이는 어지간한 고층 빌딩만 한 것이었으니 그 잔재도 많이 남아있을 터. 자칫 잘못하다간 72 마왕이 전부 넘어오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슈욱, 탁.
다시 난간 위로 복귀한 이진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라나다를 치켜세웠다.
“이걸 봐.”
-…쭉 보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교단이 이것을 탐내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하와와가 침중한 기색으로 마검 위에서 일렁거리는 마기를 어루만졌다.
악신의 뿔에서 나온 마기는 보통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농밀함을 지니고 있다. 미들턴에서 마주했던 마왕 마르바스의 것이 이러했을까, 그 강렬함은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라 할지라도 경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일단은 이쪽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남은 건 교단 놈들을 잡아다가 실토하게 만드는 것밖에 없겠군.”
-심상치 않아 보이는 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번 달에도 적잖은 피해를 보았지요.
“알고 있어. 전면에 나서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테니까 보조나 해줘.”
-…감사합니다.
이진한은 침중한 안색을 한 하와와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멀쩡해 보이나, 그 속은 피폐해진 상태.
동생들의 앞이라 내색하지 않는 것이지 실상은 아무리 만들어진 호문클루스라 할지라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리라.
‘최소 아이돈 급인 녀석이 오겠지.’
만일 자신이 조금만 늦게 이곳으로 왔다면 몸이 성치 않은 하와와로서는 이어진 적들의 침입을 격퇴해내지 못했을 터.
그렇다면 그들에게 닥쳐올 운명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볼 건 다 봤으니 돌아가자.”
이진한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지상으로 향했다.
***
《영원》의 저택에 온 지 하루가 지났다.
어차피 퀘스트까지 생긴 마당에 이진한은 푹 쉬기로 했고, 일행들 역시 생각날 때마다 온천에 몸을 담그며 휴식을 즐겼다.
남은 시간은 【362:27:31】. 며칠 정도는 허비해도 충분할 정도였고, 어차피 퀘스트까지 뜬 이상 교단 쪽의 공격은 시기의 문제였다.
“합! 합!”
점심을 먹은 이진한은 테라스 난간에 기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 숲의 풍경은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바. 그런 가운데 저택 앞 공터에서 거칠게 검을 휘두르며 수련하는 미르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흠.”
대검을 일반 롱소드로 바꾸고 나서부터는 확실히 움직임이 빨라졌다. 물론, 단순 파괴력만 따지자면 전자가 훨씬 낫겠지만, 그 이외의 요소에는 지금이 모두 압도적인 스테이터스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련이나 시켜줄까.”
툭.
찻잔을 내려놓은 이진한은 테라스에서 뛰어올라 수련 중인 미르엘의 앞으로 내려섰다.
“다 같이 있었구나.”
슬쩍 저택 쪽을 바라보니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가 널찍한 의자에 기대 누운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갑자기 이진한이 뛰어내렸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인 줄 알고 가슴 졸였잖아요.”
“깜짝 놀랐어요.”
“미르엘 수련이나 시켜주려고.”
그 말에 미르엘이 밝은 표정을 짓는다. 어느 정도 몸은 풀린 것인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것을 보고 씩 웃은 이진한은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쥐었다.
“일단 가볍게 붙어볼까.”
“좋아요.”
대답과 동시에 그녀는 빛살같이 땅을 박찼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매끄러운 몸놀림.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도 제법 날카로운 것으로, 동레벨 대에선 적수가 없을 듯 보였다.
쉬아악.
프로스트의 끝이 머리카락 끝을 닿을 듯 말 듯 스치지 못한다. 미르엘은 살짝 아쉬움을 삼키면서도 오히려 거리를 좁혔고,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저저저적-!
그와 동시에 대지가 얼어붙으며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솟구쳤다. 이진한은 제 발 앞까지 닥쳐온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이내 검으로 툭 베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프로스트를 다루는 건 제법 익숙해진 듯하네.”
“네. 이제 제 권능과 연계해서 사용하는 것도 얼추 손에 익었습니다. 실전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면, 제대로 해볼까.”
“좋습니, 다!”
미르엘의 기합을 시작으로 대련이 재개되었고, 그녀가 족히 다섯 번은 쓰러진 이후에서야 끝을 맞이했다.
“수고하셨어요. 미르엘 너도.”
엘레오노라가 차갑게 식힌 수건을 건네주었다. 이진한은 그것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일레이나가 준비해둔 음료를 들이켰다.
“그나저나 영웅들은 대단했네요. 고대에 있던 악신이라고만 들었지, 저렇게 커다란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 고개를 끝까지 들어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단 일곱 명으로 싸워 이겼던 거예요?”
“일곱?”
“네. 고대 영웅이라 명명된 이들은 일곱 명이잖아요. 아, 혹시 더 있었나요? 예전에 돌던 낭설이 있었는데. 잊힌 8번째 영웅이라는 있었다는.”
“아, 재밌는 소설이었죠. 저도 읽었어요.”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의 말에 이진한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일곱은 무슨. 족히 수천 명은 우르르 몰려가서 두들겨 팬 건데.”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숫자 앞에는 장사가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