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6.
“그, 그건 베르너 님께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이야기?”
“마르딘 영지에 도착하면 그 이후의 계획에 관해서였습니다. 그마저도 잠깐 이야기하다가 방을 나왔습니다!”
물론 마음 한편에 그런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복잡한 표정을 보니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방을 나섰다.
‘설마 그걸 보셨을 줄은.’
미르엘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달아오르는 열기를 가라앉혔다. 혹시 모르기에 제 주인이 잠자고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 왔거늘 그 짧은 사이에 일어났었다는 소리인가.
“…그러는 엘레오노라 님도 베르너 님이 영지를 떠나기 전날 밤에 찾아가시지 않았습니까. 밤 늦게까지 나오지 않은 걸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어….”
미르엘을 놀리다 기습적으로 허를 찔린 엘레오노라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 역시 그녀처럼 이야기하러 간 것에 불과했다. 물론 그럴 때를 대비해 옷차림을 신경 쓰긴 했지만,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별을 고하지 않았던가.
“…주인이나 수하나.”
일레이나가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자 둘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물밑으로 깊숙이 몸을 낮췄다.
사락.
그렇게 얼마간 그녀들끼리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을 찰나,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결계의 영역 안이라 그런지 밖과는 달리 바람도 없었기에 새하얀 솜뭉치들은 흩날리는 일 없이 천천히 그들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예쁘네요.”
엘레오노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온천에 몸을 맡긴 채 눈이 내리는 숲을 바라보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다른 둘 역시 마찬가지란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서, 당신이랑 미르엘은 어쩔 거예요?”
“뭐를요?”
“뭐긴, 제국에 관해서죠.”
당연한 걸 되묻는다는 듯한 일레이나의 표정에 미르엘과 엘레오노라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쩔 거냐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당장은 그렇죠.”
일레이나는 마법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온천 한쪽에 설치된 바에서 칵테일 한 잔을 만들어 자신의 앞까지 날아오게 했다.
짐짓 우아한 자태로 그것을 한 모금 마시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아직 어정쩡한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있던 둘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무슨 목적을 지니고 움직이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몇 가지는 확실해요.”
“몇 가지요?”
“이전부터 다른 영웅들의 유적지에 관심을 지닌 것을 보니 자신처럼 살아 있는 이들이 없을까 찾고 있는 것 같아요. 계승자라고 착각하고 있을 때는 무슨 순례이니 하는 걸로 짐작했지만, 검은 현자 본인이 그럴 이유는 하등 없죠.”
“…예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죠? 뭐,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이야기고.”
파아앗.
일레나가 손을 휘두르자 빛무리가 일렁이며 허공으로 대륙의 지도가 표시되었다.
“오스칼 제국에 있는 근원의 마탑이 시작점이었죠.”
마경 벨데르, 페르포치아 왕국의 영지 미들턴과 검은 현자의 유적지, 그리고 수도인 노르디움.
데메드리오 왕국의 도시인 핀달릴, 리베라 제국의 마르딘 영지, 그리고 지금 이곳 북쪽 숲까지.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왔던 상대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일레이나의 물음에 미르엘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나 마수, 그리고 악마는 관계되었다고 보기엔 어렵지만, 그 이외는 공통분모가 있군요.”
“그래요. 마왕을 섬기는 교단, 제국 암부, 그리고 그들과 손을 잡은 자들.”
“맞아요. 그렇다고 해도 다 같은 편이 아니겠죠.”
그들 역시 나름대로 파벌이 존재할 것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상대를 구렁텅이에 처박을 것이고, 그 뒤에서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자신들을 위협하는 공동의 적이 나타났다면?”
“…….”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시선이 저택으로 향했다.
고대 영웅, 《지혜》의 검은 현자.
그 정체를 아는 이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영원》의 계보를 잇는, 조금 특이한 이름을 가진 세 자매뿐이었다.
물론 세간에 알려진 베르너의 명성 역시 특별했다.
가장 먼저 SS랭크 용병,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었고 고대 악마인 바포메트를 쓰러뜨리면서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떨쳤다.
정보 길드인 아레나의 조사로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SS랭크 용병에 대해 세간의 주목도는 급격하게 치솟고 있다 하였다.
부유한 이들은 드래곤을 쓰러뜨리며 얻은 부산물의 매입을 원했고, 국가의 왕이나 유명 기사단 그리고 용병단은 그의 영입을 원했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수많은 목적을 지닌 채 베르너를 찾고 있는 상황. 혹시라도 위치가 발각이라도 된다면 골치 아플 것이 명백했다.
물론 전부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르딘 공작가는 어찌어찌 해결했어도 오스칼 제국 쪽과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래도 제국 암부를 뿌리 뽑은 것이 그나마 희소식이었지만, 자신들의 체면을 구긴 이상 이제 엘레오노라나 미르엘은 둘째치고 베르너에게 설욕하기 위해 공세를 퍼부을 것이 분명했다.
“검성의 제자인 검호까지 쓰러뜨렸죠,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나고 있는 모양이에요. 베르너 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당신은 괜찮나요?”
엘레오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레이나는 이터널 학파에서 《영원》의 연구에 가장 근접한 세기의 천재이지 않은가. 자신 앞에 깔린 길을 걷기만 해도 큰 명성과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수렁에 빠져들게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마법사는 욕심이 많은 종족이에요. 당신도 알죠?”
“…그렇죠.”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 영광스러운 자리죠. 아마 한 삼사 년만 더 구르면 서른 살 이전에 부탑주까지 오를 수 있을 테고 그 이후엔 마탑주의 자리까지 노려볼 만하겠죠.”
“그렇다면….”
일레이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그게 어때서요.”
“…예?”
고대 영웅이, 무려 천년도 더 이전에 신화 속 이야기를 써 내려갔던 존재가 나타났다. 마탑이고 자시고 그게 눈에 차겠나. 제국의 황실 마도사 자리를 준다고 해도 콧방귀를 끼며 꺼지라 할 터.
“사실 내가 줄을 서니, 라인을 타니 이런 말은 정말로 싫어했거든요?”
사람 사는 곳이 그렇듯 마탑 역시 권력 구도가 복잡했다. 출세를 원하는 이들은 굵직한 이름을 지닌 마도사의 뒤를 닦아주며 그 후계가 되길 자처했고, 그 대부분은 이용만 당하다 가치가 없어지면 버림당할 뿐이었다.
우습게도 그런 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갈 기회조차 없는 상황이었으니 마법사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오직 일레이나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믿었고,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전부 썩은 동아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별 볼 일 없는 이들 뒤에 가서 딸랑거리는 이들을 경멸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아주 굵디굵은 황금빛 동아줄이 나타났고,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줄 서는 행위를 싫어한 게 아니라, 썩은 동아줄을 잡는 것을 싫어한 거구나.’
그렇기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것을 단단히 붙들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이제 떠난다느니 어디에 남을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마요. 어차피 베르너 님과 쭉 다니다 보면 그들과 부딪치는 일은 필연적으로 보이니까.”
“…그런가요.”
“뭐, 나도 도와줄 테니까 너무 기죽지 말고.”
이터널의 애머시스트.
솔직히 그 이름보단 영웅 일레이나가 더 멋있었다.
***
즐거운 온천욕 뒤, 그들은 세 자매의 뒤를 따라 저택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으스스한 분위기네요.”
엘레오노라가 제 팔을 매만지며 살짝 몸을 떨었다.
벽에서 뿜어지는 연한 청색의 불빛은 어딘가의 던전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먼지 한 톨도 없었고, 숨쉬기에도 쾌적한 환경이었다.
“설마 북쪽 숲의 목적이 고대 신의 잔재를 봉인하기 위해서일 줄은…….”
일레이나는 이곳으로 오기 직전 이진한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고대 영웅에 관한 요소들은 학술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무게를 지녔다. 그중 당연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고대 영웅들로 이루어진 원장대가 쓰러뜨렸다던 고대 악신이었으니.
-그 주위에는 반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주인님께서 만드셨다고 하지요.
“음, 《영원》이 말이지.”
정말로 그녀가, 아니, 그녀를 비롯해 다른 유저가 전부 자신처럼 이 세계에 넘어온 것인가. 아직 확신을 내리지 못한 이진한은 모호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와.”
몇 층이나 이어지는 계단을 전부 내려간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길게 이어진 난간이었다. 이진한은 세 자매의 뒤를 이어 그것을 잡고 서자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절로 감탄을 내뱉었다.
그 밑으로 지하라고 생각되지 않는 규모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십 미터? 아니, 족히 이십 미터는 될 듯한 깊이에 그 가장자리로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강력한 결계가 펼쳐져 있다.
“저게 고대 악신의 뿔인가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크네요. 저게 뿔의 조각이라면 그 몸은 얼마나 큰 거죠?”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가 놀람을 토해내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결계의 중심에는 거대한 구조물이 둥둥 떠 있었다. 색은 칙칙한 갈색으로 끝이 뾰족한 것이 말 그대로 뿔의 조각인 듯싶었다.
대략 가늠하자면 바포메트가 있던 던전에서 싸웠던 만티코어 정도의 크기보다 살짝 큰 정도였다.
-어떠신가요?
“…맞네, 우리가 쓰러뜨린 거.”
하와와의 물음에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처럼 대륙 각지에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곳에서도 저희와 같이 지키고 있는 가디언들이 있겠지요.
“…여기 오면서 지나온 내 유적지에 고대 마수가 봉인되어 있던데 그것도 비슷한 거였나?”
-고대 마수라면?
“베히모스. 오스칼 황궁 지하도 밑에 봉인해둔 놈이 어째서 유적지에 있나 싶었는데.”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요. 허면 그곳에서 아무것도 느끼시지 못하셨습니까?
“차원 단층이 분리된 공간이 있긴 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그곳에 봉인된 것을 누가 가져갔겠지.”
-교단의 소행이 유력하군요.
이진한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시신 따위를 훔쳐 뭘 하겠나 싶었지만, 막상 그것을 눈앞에 두자 미증유의 기운이 느껴졌다.
“조금 더 가까이서 살피고 싶은데, 힘들까?”
-보안 마법은 모두 해제해놓았어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주인님께서 펼치신 결계는 저로서도 영역 외인 부분이기 때문에.
“흠.”
이진한은 대현자의 눈을 활성화한 채 결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찌나 복잡하던지 안구가 메말라질 때까지 바라보아도 파악하는 것은…….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때까지는 결계를 지키기만 하면 될 일이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곳에 뭔가 적혀있을지 모르니까요.
“…….”
-…현자님?
하와와는 조심스레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결계에 두 눈을 고정하고 있던 이진한을 불렀다.
“…아니, 괜찮아.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네.”
-그만두시는 겁니까?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대충 알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