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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75화 (75/210)

◈ 075.

-확인했습니다. 검은 현자께 경의를.

하와와는 짐짓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 옆으로 쪼르르 달려간 헤으응과 호에엥 역시 같은 모습을 했고, 빛의 결계와 그들 머리 위에 떠 있던 마법의 발동이 캔슬되었다.

이진한은 하와와의 시선이 슬쩍 하늘 위를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름대로 은밀하게 술식을 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실력이 뛰어난 것인지 이쪽의 준비를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마찬가지로 마법을 캔슬하자, 하와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안을 가리켰다.

-안으로 드시지요.

“사양할 것 없지.”

일행에게 눈짓하자 그녀들은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마녀들의 뒤를 따랐다.

“…와.”

저택의 내부는 고급스럽기 짝이 없었다.

벽면과 바닥은 광택이 흐르는 대리석에 난간 같은 구조물은 전부 에메랄드와 루비 같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 더불어 곳곳에 자리한 장식들은 황녀였던 엘레오노라가 보아도 진귀한 것들로 보였다.

-《영원》의 대마도사께서 실제로 거주하셨던 저택입니다. 그분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이때까지 유지된 것이지요.

“천년이나?”

-예, 그렇습니다.

이진한은 앞서 걸어가는 하와와를 바라보았다.

세 자매는 전부 같은 모습이었지만, 느껴지는 언행은 각각 개성이 뚜렷이 느껴질 정도로 달랐다.

-저희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일행분들은 어쩌시겠습니까.

“잠깐 쉬고 있을래? 아, 정원 쪽에 노천 온천이 있던데 사용할 수 있나?”

-문제는 없습니다. 호에엥, 그쪽의 준비를.

-네!

막내인 호에엥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면 먼저 나가 있을게요.”

“천천히 이야기하고 오십시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별말 없이 호에엥을 따라 나갔다. 일레이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잠시간 멈칫거렸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 마도사에요.”

“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이쪽의 정리가 끝나면 설명해줄게.”

그 집요한 시선에 이진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이나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 앞서 나간 일행의 뒤를 따랐다.

-일행분들과 사이가 좋으시군요.

“보통이지. …그런데 그쪽은 계속 서 있을 건가?”

응접실에 자리한 이진한은 시선을 돌려 하와와의 뒤쪽에서 마치 보디가드처럼 기립해 있는 헤으응을 바라보았다.

-이게 제 역할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뭐 그러면.”

크게 뜬 눈으로 뚫어지라 이쪽을 바라보는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진한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하와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요?

“너는 언제부터 존재했지? 《영원》을 직접 본 적이 있나?”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는 데 있어 분기점이 되는 질문이었다. 만일 이쪽 세상으로 넘어온 것이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면 적어도 든든한 아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처럼 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눈을 떴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더 이전에 깨어났거나, 아니면 아직도 어딘가에 잠들어 있거나.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 한 명 한 명이 자신 못지않은 강자들이다. 모종의 이유로 힘을 잃거나 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

하와와는 두 눈을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이내 입술을 우물거리며 살짝 가라앉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저도 비슷한 걸 여쭈어보려고 했었어요.

“비슷한 거?”

-네. 주인님의 거취에 대한 것을 말이죠.

“…그 말은.”

-현자님도 눈치채셨다시피 저희는 호문클루스입니다. 쉽게 말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불균형한 생명체이죠.

그녀는 차를 마시더니 투명한 눈으로 조금 줄어든 그 표면을 내려다보았다.

-저희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대에서 대를 이으며 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죽으면 헤으응이, 그다음은 호에엥이. 이 숲을 둘러싼 결계가 무너지지 않으면 아마 영겁의 세월을…….

말하는 도중 하와와는 기침을 뱉어냈다.

처음엔 단순히 사레가 들린 듯했지만, 틀어막은 손에서부터 비치는 핏줄기에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언니!

-…고마워요, 헤으응.

하와와는 제 동생이 건네준 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추태를 보였네요. 죄송합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나.”

-당장, 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저 저번에 있었던 싸움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어서요.

“대마도사에게 싸움을 걸어온 이들이 있나.”

용병들과 함께 있을 때 얼핏 이야기를 들었다. 이 상단 이전에 온 원정대가 마녀에게 적잖은 상처를 입혔다고.

-설화석을 목적으로 숲에 발을 내디디는 이들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저희 쪽에서도 먼저 건드리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교단 쪽이 문제죠.

교단.

신성 교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터다. 그들은 고대 영웅을 신의 대행자라며 치켜세우는 집단. 《영원》의 계보를 이었다고 알려진 이곳을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계의 왕 중 하나인 아스모데우스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뒤쪽에 있던 헤으응이 말을 보충해왔다.

“그놈의 교단 놈들이 문제네.”

이진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아는 듯한 그의 모습에 하와와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다른 곳에서도 그들과 조우하셨나요.

“미들턴이란 도시에 있을 때는 마르바스 교단이 수십만 마리의 몬스터를 움직여 그곳을 침공했다. 끝에선 일부지만 마왕까지 나와서 고생 좀 했지.”

-…마왕.

그 불길한 울림에 헤으응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면 이곳은 어째서 교단 놈들이 눈독을 들이는 거지? 너희는 무엇을 지키고 있기에.”

단순히 《영원》의 흔적이 있다고 해서 교단 놈들이 쳐들어오진 않았을 것이다. 마왕에게 맹목적인 놈들이긴 해도 앞뒤의 개연성은 있을 터인 문제. 그러니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북쪽 숲엔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주인님께서 그때의 원정 이후 세계 각지에 이곳처럼 여러 봉인을 만들어 놓았다고 쓰여 있었지요.

“고대 신의 잔재?”

예상치 못한 요소에 이진한이 두 눈을 크게 떴을 찰나, 그의 시야 한쪽으로 상태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 ∑얼어붙은 숲

◈ 봉인된 고대 신의 잔재를 노리는 아가레스 교단의 음모를 저지하시오.

보상: ‘99시간의 유예’, ‘???’.

기다렸던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남은 시간의 유예는 【377:19:52】. 북쪽 숲에 들어오기 위해 소모한 시간과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하면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보상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의 눈은 그 옆에 있는 물음표로 향했다.

‘잘하면 그녀가 쓰는 무기 같은 걸 얻을 수 있겠는데.’

보상이 무엇인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비싸고 좋은 아이템만 수집하는 그녀의 특성상 제법 괜찮은 것들이 보상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교단에서 고대 신의 잔재를 노리는 이유가 무엇이지?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냥 크고 투박하기만 한 덩어리일 뿐이었는데.”

-숲이 봉인하고 있는 것은 신의 뿔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핵은 막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지요. 제 예상이지만, 아마 지상계에 마왕을 강림시키려는 재료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왕 강림이라.”

제법 그럴듯한 개연성을 지닌 이야기였다.

미들턴에서 만났던 마왕, 마르바스는 이때껏 그가 만났던 그 누구보다 절대적인 기세를 풍겼다.

그런 존재가 마계에서 지상계로 현현하려면 고대 신 정도 되는 이의 파편 정도가 필요로 한 것이 맞겠지.

“일단 그 잔재라는 것부터 좀 볼까. 아, 《영원》이 남긴 ‘기록’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했지. 겸사겸사 그것도 한 번 확인해보았으면 하는데.”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드립니다.

고대 신의 잔재와 《영원》의 기록.

아무래도 북쪽 숲으로 온 것은 정답인 듯싶었다.

***

이진한이 마녀들과 응접실에서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이, 일레이나를 비롯한 세 여인은 호에엥의 인도를 따라 노천 온천에 입성했다.

탁 트인 북쪽 숲의 모습을 배경으로 새하얀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온천의 풍경은 그녀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탁 트인 공간에서 맨살을 보이는 것은 살짝 꺼려졌기에 큰 수건을 몸에 두르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딛자, 살짝 뜨거운 정도의 온도가 피부를 감싸 안았다.

“…몸이 녹는 것 같아요.”

“저도 이런 종류의 온천은 처음입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머지않아 온천에 감화된 듯 상기된 표정으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일레이나만이 그 구석에서 뚱한 표정으로 그런 둘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일레이나?”

엘레오노라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살짝 머쓱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됐어요. 맨날 나만 따돌리지.”

“따돌리려던 게 아니에요. 그저…….”

베르너 님이 말씀하시지 않기에 자신들 역시 침묵하고 있었다. 엘레오노라는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그것 역시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이라는 것을 깨닫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어떻게 그리되었네요. 정말 죄송해요.”

“엘레오노라님 말씀대로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정황상의 흐름이라는 것이라…….”

미르엘 역시 멋쩍은 미소로 미안함을 전했다.

잠시간 얼굴 아래 절반을 물속에 담근 채 거품을 뿜어내던 일레이나는 이내 고개를 삐죽 내밀고는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겠죠. 다 그 사람 잘못이지.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고 당당히 말해오던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겠어요.”

“하하하…….”

“사람이 어떻게 천년이 넘게 살아 있는 거죠? 그 사람 사실 드래곤 아니에요?”

“드래곤, 은 아니실 거예요. 굳이 동족의 목을 벨 이유는 없으실 테니.”

“…그렇긴 하네요. 그러면 처음부터 이야기 좀 해줘요.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만났는지.”

일레이나의 말에 엘레오노라는 어디까지 전부 말해야 하는지 잠시 말을 골랐다. 하지만 여기서 또 망설였다간 그녀를 두 번 속이는 것이 됐기에 그냥 솔직히 전부 말하기로 했다.

“근원의 탑에서 만난 건 맞아요. 단지 저희를 구해주러 온 게 아니라, 그곳에서 깨어나신 거예요.”

천여 년 동안 열리지 않았던 관.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암부의 습격 가운데 그 뚜껑이 열렸고, 고대의 현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서사시의 도입부를 듣는 것 같네.”

“그렇죠?”

일레이나는 젖은 머리를 한데 모아 묶으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일지라도 천여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을까. 그 본인이 세운 마탑조차 유지보수를 위해 황가가 관리해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가 그 봉인을 유지하는 데 개입하고 있었을 수도…?’

그녀가 문득 떠오른 가설에 의식이 닿았을 찰나, 엘레오노라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제 옆에 있던 미르엘을 향해 물었다.

“참, 미르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무엇입니까?”

“…그, 순전히 제 개인적인 흥미로 인한 질문인데.”

“말씀하십시오.”

말하기를 머뭇거리는 제 주인의 태도에 미르엘은 의문을 표했다. 그렇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자, 엘레오노라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베르너 님이랑 잤어요?”

“…무, 무무무무무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모함에 미르엘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항변했다.

그것은 자신이 세운 가설에 몰두하고 있던 일레이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올 정도로 격렬한 반응.

그녀는 곧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의혹이 점칠 된 시선으로 미르엘을 바라보았다.

“어머, 혼자 얌전한 척은 다 해놓고 뒤에서 몰래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일레이나까지 왜 그럽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

“…하지만, 미들턴에서 둘의 분위기가 묘했잖아. 꼭 첫날밤을 보낸 후의 연인처럼 어색한 분위기였는데.”

“과연, 북부의 출신 다운 과감한 행동력이에요. 브레스트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게 확실하군요.”

엘레오노라에 더불어 일레이나까지 합세해 놀리기 시작하자 새하얬던 미르엘의 피부가 홍시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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