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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74화 (74/210)

◈ 074.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시뻘건 불꽃이 용솟음치며 얼어붙은 동토 위를 휩쓸었다. 헤으응은 제 검을 부여잡고 달아오른 공기를 식히며 이 땅에 다시금 냉기를 부여했지만, 그것으로는 네일링의 화염을 막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마나가 쭉쭉 다는구나.’

「화염검(火炎劍) 네일링」

베오울프 신화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화염 속성이 붙게 된 것은 검 자체의 특이점보다 그 상대가 화룡(火龍)이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화염검으로서의 네일링은 검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성능은 아니었으나, 이런 빙결 스테이지 가운데서는 독톡한 위력을 보였다.

특히 검집에서 나온 순간부터 사용자의 마나가 다할 때까지 고온의 화염을 뿜어내는 것으로 상시 위력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크윽.

헤으응이 구슬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친다. 그러는 와중 그릭스 상단주를 비롯한 용병들은 이미 부상자를 수습해 도망친 이후였다.

끝에서 하우젠나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긴 했는데, 상반신의 뼈가 전부 박살 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다른 용병의 부축을 받아 도망치는 것이 끝이었다.

-언니!

언니의 위기를 두고 볼 수만은 없는지 작은 마녀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어왔다. 그와 동시에 무수한 얼음 기둥이 솟아오르며 빙결의 기사들이 몸을 날려왔지만, 네일링의 불꽃이 발한 열기를 넘지 못한 채 모두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동생 쪽의 이름은 ‘호에엥’. 600레벨이 조금 넘는 마도사로 일레이나와 비견될 법한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생각한 것보다 더 맥을 못 추네. 이 정도로는 그간 용병들을 막기는 좀 버거웠을 텐데.”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북쪽 숲과 마녀의 명성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녔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처럼 꺼지지 않는 불꽃을 대항 수단으로 삼아 공격해온 이들도 있을 터.

그때마다 지금처럼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이곳은 진즉 함락되고 남았으리라.

-…제길.

하지만 헤으응은 결국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한 채 결국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호에엥은 일레이나를 필두로 미르엘과 엘레오노라가 포위하고 있는 상황.

이진한은 네일링을 그녀의 목에 겨누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너와 이야기하는 것을 원한다, ‘헤으응’.”

“…….”

“…….”

“…….”

그와 동시에 세 명의 여인이 움찔하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고, 일레이나는 살짝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바라봐왔다.

“혹시 머리 다쳤어요?”

“…시끄러워.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이진한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일행에게 그 모습이 어떤 식으로 비춰질 지에 관해서였다.

설명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니, 그는 허공에 손을 휘젓고는 헤으응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내 이름을.

“동생은 호에엥이지.”

-……!

눈에 띌 정도로 동요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진한은 슬쩍 고개를 가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동료인 《영원》의 흔적을 찾아 이곳에 왔다. 너희는 마녀가 아니라 이곳을 지키는 가디언일 테지?”

그들이 선 땅은 결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대현자의 눈으로 헤으응과 호에엥을 분석했고, 이내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호문클루스인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육신은 연금술로 만들어진 살덩이를 뼈대에 입힌 것뿐으로,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

결정적으로 그녀들이 사용하는 빙결의 권능은 혈계전승으로 이어진 미르엘의 것보다 더 원초에 닿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빙결의 정령을 이 안에 집어넣었군.’

그 이유인즉 간단했다. 빙결 그 자체인 속성의 정령을 호문클루스에 집어넣어 움직이게 했으니 그렇지 않고서야 배기겠는가.

-…당신은.

“나는 《지혜》. 검은 현자다. 번잡스럽게 해서 미안한데, 숲속에 펼쳐진 결계 때문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의 몸으로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을 저보고 믿으라는 소리입니까.

“난들 알까. 눈 뜨니까 이 시대였는데. 그래서 그걸 조사하려고 이곳까지 온 거다.”

이진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헤으응은 머리가 복잡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봐왔다.

-잠시 동생과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허튼짓은 안 하겠지?”

-당신이 정말로 검은 현자시라면.

이진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으응이 호에엥을 향해 손짓한다.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 그리고 미르엘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 뒤를 따랐고, 이내 마녀 자매는 서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헤으응, 헤으응.”

“호에엥, 호에엥.”

“…….”

다만, 사뭇 기괴한 광경이었다.

발성 기관이 한 단어를 말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지 각자의 이름만 말하며 손과 팔을 파닥거린다. 이진한이 살짝 질린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 일레이나가 슬쩍 옆구리를 찔러왔다.

“그래서 저 헤으응이니 호에엥이니 그게 뭔데요?”

“저 둘의 이름이다. 언니 쪽이 헤으응, 동생 쪽이 호에엥이다.”

“…무슨 이름이 그래요?”

“난들 알겠냐. 《영원》이 직접 지은 건데.”

“제, 제 우상을 모욕하지 마세요! 당신이 현자의 계승자라 할지라도 용서치 않을 거예요!”

“용서 안 하면 어쩔 건데.”

이진한이 옅은 화염에 감싸인 네일링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불똥이 튀며 그녀의 옷가지를 향했으니. 그 모습을 본 일레이나는 기겁하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비겁하게 자꾸 힘으로 찍어누를래요!”

“아니꼬우면 나보다 강하던가.”

그렇게 둘이 투닥거리고 있을 찰나, 엘레오노라는 심각한 얼굴로 헤으응과 호에엥을 바라보았다.

“큰일 났어요. 저 외모에 그런 이름이 붙으니까 왠지 좀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귀엽게, 느껴진단 말입니까.”

“헤으응, 호에엥. 발음이 귀엽지 않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 베르너 님이 했을 땐 살짝 깼는데, 평상시 모습이랑은 갭 차이가 생겨서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 모습에 미르엘은 중증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잠시간 기다리자, 마녀 자매는 이야기를 끝냈는지 머뭇거리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저는 호에엥이라 해요. 저희랑 이야기하고 싶으시다 고요.

“그래. 나는 《영원》의 흔적을 쫓아 이곳까지 왔다. 숲 안쪽에 그녀가 남긴 것이 있나?”

-네. 일단 들어가셔서 이야기하시죠. 다른 분들은…….

“내 일행이다. 딱히 문제는 없겠지?”

-…괜찮겠죠.

이진한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믿어주는 감이 없잖아 있다. 자신이 검은 현자를 사칭하는 것이라면 이들은 틀림없이 큰 곤욕을 치를 터인데.

마녀 자매의 안내를 받은 그들은 곧 숲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느 선을 지나자 허공이 일렁거리기 시작했고, 흩날리던 눈발이 그치며 화창한 날씨가 반겨주었다.

“…이건.”

“최상위 공간 마법이다. 꼭 《영원》이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대마도사가 만든 작품인 건 확실하군.”

“와아….”

“같은 숲인데도 이토록 다를 수 있군요.”

일레이나는 경악을, 엘레오노라는 감탄을, 미르엘은 흥미를 보였다.

결계는 숲 안쪽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어지간한 마법은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할뿐더러, 무작정 그 안으로 몸을 날리면 굴절된 공간의 틈으로 이어져 접힌 쪽의 출구인 반대편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보였다.

‘돈 좀 쓰겠지만,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굳이?’

만약 《영원》이 이곳을 구축했다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혹은 그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니 제 거처를 휘황찬란하게 꾸민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숲 가운데 난 길을 걸어가자니 그 중심에서 커다란 저택이 나타났다.

숲의 경관을 헤치지 않는 하얀 색으로, 주변에는 뜨끈한 열기를 내뿜는 온천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와. 노천 온천이 있는 저택은 처음 봐요.”

“북쪽 숲이 화산 지대였던가요? 잘하면 들어가게 될 수도 있겠네요.”

“…이런 게 피부에 그렇게 좋다던데.”

여성 진은 벌써 들뜬 듯 높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마녀 자매의 뒤를 따라가던 이진한은 저택 안쪽에서 느끼는 기시감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이건?’

그렇게 저택 앞으로 당도했을 때.

파아아앗-!

눈 부신 빛의 사슬이 그들 주위로 솟구쳤다.

제일 먼저 미르엘이 검을 뽑아 휘두르며 그것을 쳐내려 했지만, 사슬은 뿌연 막으로 변해 그 셋을 감싸는 결계가 되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이진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헤으응과 호에엥은 그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당신의 말엔 검증이 필요해요.

-그걸 순순히 믿을 정도로 우리는 바보가 아니거든요!

“검증?”

너희가 그것을 할 수 있겠느냐.

이진한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리자, 저택의 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는 경거망동하지 말아주세요.

Lv.1037 「하와와」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의 존재에 이진한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한 명 더 있었나. 어쩐지 이 둘로는 애매하다 싶었어.”

저 밖에선 그 둘만으로 자신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해 이 안까지 끌어들인 건가.

바닥과 하늘에 뭉쳐 있는 마나의 양은 초월 마법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한 규모다. 만일 이쪽이 정말로 검은 현자가 아니라면 순식간에 공격을 퍼부으려 하는 것일 터.

-언니.

-감응으로 상황은 이미 파악했어요. 그대는 스스로 자신을 《지혜》의 검은 현자라 하셨죠. 그건 우리에게 있어서 크나큰 사안입니다. 증명할 방도가 있나요?

“…거, 검은 현자? 계승자가 아니라 그 본인이라고요?”

결계 안에 붙잡힌 일레이나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이쪽을 바라봐오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문득 그녀는 자신을 검은 현자의 계승자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와 했던 거랑은 이야기가 다르잖……!”

“나중에 충분히 설명해줄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하고 있어.”

“…알았어요.”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이 파악된 듯 일레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에게 설마 알고 있었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그녀들은 땀을 삐질 거리며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증명은 어떻게 하면 되지?”

-무엇이든. 저와 제 동생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충분합니다.

“애매하네. 만약에 납득하지 못한다면?”

하와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마력을 더욱 강하게 내뿜었다.

그러자 골조만 잡혀 있던 초월 마법들이 구체적인 형태를 이루며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기 시작했다.

“…성격 한번 고약하네.”

누가 만든 피조물 아니랄까 봐 그 지랄 같은 성격까지 구현해놓았다. 이진한은 잠시 인벤토리를 뒤지다가 그 끄트머리에 있던 무언가에 시선이 닿았다.

“뭐, 이거만 한 게 없겠지.”

딱.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곧 기하학적인 문양이 사방을 뒤덮기 시작하며 시커먼 깃털이 흩날린다. 직후 그 가운데 오스칼 제국을 뜻하는 문양과 초승달이 새겨지며 유려한 필체로 쓰인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검은 현자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며.』

이걸 보고도 납득하지 못하면, 그때는 어쩔 수 없다.

하와와가 발동 중인 초월 마법보다 더 위쪽에서 준비하고 있는 자신의 초월 마법으로 이곳을 쓸어버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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