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3.
“우리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만.”
절로 몸이 떨려올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에 가르고일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작은 마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두 번은 없어.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동시에 사방으로 얼음 결정이 솟구친다. 화이트 골렘이 형성되었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대지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빙결로 된 갑주와 검을 지닌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였다.
“…이건.”
일레이나의 의심에 이진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이다. 얼음 형상에 정령을 넣었어. 이 정도면 꽤 고전하겠군.”
“A랭크 용병들도 힘들까요?”
“글쎄. 아까처럼 미적거린다면…….”
쉬아아악-!
이진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인 이가 있었다.
하우젠나임, 그가 땅을 박차며 마치 섬전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빙결의 기사들이 즉시 앞을 가로막으며 발걸음을 멈추려 했지만, 내질러진 창은 예외 없이 그것들의 머리와 몸을 부수며 산산조각이 났을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날 막겠다고?”
하우젠나임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을 때, 곰 인형을 안고 있던 작은 마녀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타다다닥-!
그와 동시에 빙결의 기사들이 일시에 공세로 돌아섰다. 다섯은 되는 이들이 하우젠나임의 발목을 붙잡았고, 용병 무리에게로 닥쳐가며 그 묵직한 일 검을 내질렀다.
“크억!”
용병들은 마수를 상대했을 때와 같이 전열을 구축했다. 전위가 방패를 든 채 거리를 벌리고 후위가 그를 지원하려 했지만, 이전과 사뭇 다른 충격에 다들 신음을 토해냈다.
“저, 전열을 유지해! 뚫리면 안 돼!”
지휘를 맡은 용병이 당황함에 고성을 질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무너진 전열의 틈으로 빙결의 기사들이 몸을 욱여넣었고, 이내 시뻘건 선혈이 쌓인 눈 위로 흩뿌려졌다.
“으악!”
“무, 물러나! 마수보다 강하다!”
“단장님!”
쿵.
그들의 절규에 작은 마녀를 견제하고 있던 가르고일이 땅을 박찼다. 제 몸만 한 대검이 거칠게 허공을 찢었고, 용병들을 도륙하던 빙결의 기사들에게 닥쳐갔다.
퍼억-!
얼음 결정으로 이루어진 그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뒤이어 사각을 노리고 온 공격을 검신으로 막아낸 가르고일은 다시 한번 세차게 대검을 휘둘러 남은 적들을 파괴했다.
‘이것도 골렘 계통인가?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에겐 별것 아닐 테지만, 용병 대다수는 막아내기도 버거울 것 같은데.’
빠르게 판단을 마친 그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흥에 취해 멋대로 날뛸 때가 아닌 듯하기에 다른 두 A랭크 용병들을 부르려 했지만, 그보다 한 발자국 먼저 하우젠나임이 행동을 개시했다.
파아아앗-!
눈부신 마나가 그 전신에 피어오른다. 이제까지 보였던 기세보다 한층 더 무거운 기운이 그의 창을 휘감기 시작했다.
“…실력을 숨겼다? 어째서?”
가르고일은 하우젠나임이 오로지 작은 마녀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애초에 그 목적은 이 원정이 아니라 마녀였나.’
쉬아아아악!
빙결의 기사 다섯의 몸통이 순식간에 반으로 쪼개진다. 하우젠나임은 다시 한번 힘껏 땅을 박찼고, 하늘 높이 뛰어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작은 마녀에게로 쇄도했다.
파아앗-!
물론 그녀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하얀 손이 허공에 들리자 대지로부터 얼음 기둥이 솟구친다. 그 날카로운 끝이 하우젠나임을 노렸지만, 그는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재주를 부리며 피해냈을 따름이었다.
타다다닥-!
오히려 기둥을 발판삼아 달려 나갔고, 이내 작은 마녀의 지척에 다다랐다.
쐐애애애액-!
창끝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날카롭게 내질러진다. 찰나 후 그것은 살을 찢고 근육을 부수며 그 안에 자리한 심장을 게걸스럽게 탐할 터.
턱.
하지만 그 끝에서 제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 채 멈춰서고 말았다.
“…잡아? 내 창을?”
하우젠나임의 두 눈이 커졌다.
작은 마녀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앞으로 그녀의 생김새를 빼다 박은, 아니 조금 더 성장한 듯한 묘령의 여성이 차가운 얼굴로 그의 창대를 잡고 있었다.
-이래서 어리석은 인간 놈들은.
“무슨…….”
저저저적!
창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하우젠나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놓았고, 땅을 박차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새로이 등장한 마녀는 순식간에 그 지척까지 따라붙으며 어느새 꺼내든 새하얀 검을 휘둘렀다.
쐐애애애액-!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을 베어 가른다. 보통의 것과 다른 점이라면 그것에 닿는 모든 것, 심지어 공기조차 얼어붙은 채 바스러졌다는 것이었다.
촤악-!
하우젠나임의 앞섬이 찢어진다. 갑옷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고, 스친 검 끝이 그 가슴에 기다란 상처를 그려내었다.
“…큭.”
뼈가 시릴 정도의 냉기가 몸 안을 급습하자 하우젠나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땅을 박차며 달아났다.
몇 달음에 같은 무리가 있는 곳에 도달한 듯싶었지만, 하늘 높이 뛰어오른 마녀가 하우젠나임의 창을 역수로 쥔 뒤 힘차게 쏘아 보냈다.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유성이 떨어진 듯 대지가 뒤집힌다. 휘말린 용병들은 운이 좋으면 즉사했고, 아니라면 사지가 갈려 나가 피를 흩뿌리며 얼어붙은 대지에 널브러졌다.
“…이런.”
가르고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쓸 틈도 없이 벌어진 참극.
대검을 쥔 그의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
-말했을 텐데.
마녀는 순식간에 그들을 뛰어넘어 용병들 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두 번은 없다고 말이야.
쉬아아아악-!
스페어 창을 꺼낸 하우젠나임이 그 뒤를 기습한다. 동시에 마녀의 앞까지 질주해온 가르고일이 그 몸을 반으로 베어 가를 듯 맹렬한 기세로 대검을 휘둘렀다.
-가소로운.
마녀는 짧은 실소와 함께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우젠나임의 창이 한 호흡 동안 열 번에 달하는 찌르기로 닥쳐온다. 등을 노리고 쇄도한 그 공격에 마녀는 살짝 몸을 비트는 것으로 창끝을 전부 피해버리곤 꽉 쥔 주먹으로 하우젠나임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퍼억-!
맨주먹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갑주가 순식간에 우그러졌고, 그는 이내 피를 토하며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후웅-!
그 뒤를 이어온 것이 가르고일의 대검이었다. 지척까지 이른 풍압에 새하얀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산발을 이루었지만, 마녀는 가볍게 검을 내민 것으로 대검이 떨어져 내리는 궤도를 흘려내었다. 그러곤 그 기세를 이용해 가볍게 몸을 돌리는 것으로 가르고일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컥!”
체급이 무색하게도 그는 맥없이 바닥을 굴렀지만, 그들이 시간을 벌어준 사이 마도사 질리카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내리쳐라-!”
마도사 클래스 상위 마법 「바하라의 뇌광(雷光)」
마녀의 속도를 의식한 마법의 선별이었다.
피할 여유도 없이 광음과 함께 떨어져 내린 시퍼런 뇌광이 그 위에 작렬한다. 하지만 마녀는 가볍게 검을 들어 올려 그것을 휘감더니 땅에 검을 박아 넣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그것을 흘려내었다.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팔이 살짝 그슬린 정도는 치명상이라 하기 힘든 것이었다.
-더 이상의 관용은 없다. 이 땅을 밟은 대가는 피로서 치를 것이니.
웅웅─.
마녀가 들어 올린 검으로 막대한 기운이 서린다. 동시에 그 주위에 있던 용병들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고, 더는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릭스 상단주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을 때.
“마녀라고 불러야 하나? 조금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즉시 길게 검을 휘둘러 제 뒤쪽에 있던 괴한을 베어냈지만, 이진한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피해내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인사가 격하네.”
툭, 휘릭.
목을 노리고 찔러진 검은 그 팔을 붙잡아 비트는 것으로 무산시키고, 반대쪽 어깨를 붙잡은 뒤 물 흐르듯 다리를 걸었다.
마치 달인이 상대를 제압하는 듯한 자연스러운 동작.
마녀는 세상의 위아래가 뒤집히는 순간에 이를 악물고는 재차 몸을 돌리며 그 회전을 상쇄했다.
그러곤 황급히 뒤로 물러나 땅에 손을 짚은 채로 거의 엎드린 자세로 경계를 표하며 이진한을 주시했다.
-네놈, 정체가 무엇이지?
마녀는 당혹스러웠다.
별 볼 일 없는 기운이라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인간이다. 하지만 바로 직전 공격해온 것으로 보아 예사롭지 않은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한바. 그렇기에 감각을 집중한 채 그를 바라보았지만, 어째서인지 뿌연 안개가 낀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말해줄게. 이 사람들 내보내고 나면.”
이진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죽은 이들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지만 팔다리가 날아간 이들은 여전히 차디찬 대지 위에서 제 상처를 부여잡은 채 얼어 죽어가고 있는 상황. 남에게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이들을 내버려 둘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다.
-뻔뻔하기 그지없군. 이쪽의 경고를 무시한 채 멋대로 쳐들어와서 숲을 훼손해놓고 살아나가길 바란다고?
하지만 마녀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두 눈에 서린 짙은 살기를 보아하니 처음 말한 대로 한 명도 살려둘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뭐, 그럴 거라곤 예상하긴 했는데.”
한숨을 내쉰 이진한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릭스 상단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단주.”
“…예, 옛!”
갑작스러운 부름에 그릭스 상단주가 경기를 일으키며 대답했다.
“설화석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네가 책임지고 이들을 수습해 밖으로 나가도록.”
“허, 허나…….”
순순히 보내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릭스 상단주는 마녀의 눈치를 보며 끝말을 삼켰지만, 이진한은 씩 웃으며 제 손목을 돌렸다.
“자기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쩔 건데.”
-…놈.
“삼십 초 준다. 그 안에 여길 빠져나가. 그 이후엔 나도 모른다.”
파앗-!
그 말과 동시에 이진한은 땅을 박차며 마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왔으니 퀘스트든 뭐든 뜨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인 것을 보니 아쉽게도 무언가를 충족하지 못한 듯싶었다.
‘그렇다면.’
어차피 목적은 숲에 사는 마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
마녀의 지척까지 이른 이진한은 코앞에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Lv.812 「헤으응」
‘헤으응이 뭐냐 헤으응이.’
처음에는 사실 반신반의 했었다.
《영원》의 계보를 이었다고 해서 그녀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저 미친 닉네임을 붙일 센스의 소유자는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어림없다!
보기만 해도 시릴 정도의 한기를 뿜어내는 검이 허공을 얼어붙게 하며 휘둘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진한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씩 웃으며 인벤토리로 손을 가져갔다.
“빙결엔 화염만 한 게 없지.”
「화염검(火炎劍) 네일링」
그 자루를 잡고 검집에서 뽑아 들자, 시뻘건 화마가 얼어붙은 동토를 태우며 몸집을 부풀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