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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72화 (72/210)

◈ 072.

“…왔네.”

A랭크 용병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전, 부서진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이진한은 천천히 일어나며 숲을 바라보았다.

“마녀요?”

“아니, 먼저 간만 보려나 봐.”

마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대신 얼어붙은 땅이 불쑥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그 위에 쌓인 눈과 얼음 결정이 형태를 구축하곤 이내 집채만 한 크기를 이루었다.

“골렘이다!”

“모두 전투 준비!”

느긋한 태도로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은 순식간에 전투태세로 뒤바뀌었다.

전위는 검을 넣고 메이스 같은 둔기나 적의 접근을 막는 창을 쥐었고, 레인저들은 쬐고 있던 화롯불에 화살촉을 가져가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마녀는 옛날부터 존재했기에 알려진 정보가 많다. 마녀 본인은 쓰러뜨리기 힘들었지만, 그 휘하의 군세는 용병들로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질서정연하네.”

뒤쪽에서 레인저들과 함께 불화살을 쏘아 보내던 이진한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느닷없는 기습이었으니 영락없이 허둥지둥 당하다가 A랭크 용병들이 나서야 겨우 수습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이 나서지 않았음에도 용병 측의 피해는 전무했다.

쿠우우웅.

얼음과 눈으로 만들어진 화이트 골렘.

일반 골렘보다 덩치가 크며, 단단했고, 막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적에게 접근하지 못한다면 그저 좋은 표적이 될 뿐.

용병들은 정석대로 골렘의 다리를 노렸고, 기동력을 잃고 쓰러진 녀석들에겐 전위가 달려가 둔기를 들고 마구잡이로 두들겼다.

“…….”

그렇게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릭스가 쥐고 있던 찻잔의 열기가 전부 식었을 때, 지상에 움직이고 있는 화이트 골렘은 없었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군.”

“화이트 골렘은 건질 게 없어서 아쉽단 말이야. 마수면 가죽이나 이빨이라도 챙기지.”

“차라리…….”

어렵지 않게 모든 골렘을 격파해낸 용병들이 시시덕거리며 그 잔해들을 걷어낸다. 하지만 그러던 가운데 기습적인 울음소리가 숲속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아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빼곡히 자리한 나무 사이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른다. 심상치 않은 진동이 바닥을 타고 흘렀고, 용병들은 재차 긴장한 표정으로 제 무기를 꼬나쥔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크어어어어-!

숲 끄트머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제와 같은 화이트 울프 무리. 거기에 더불어 화이트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상위 몬스터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전투 준비! 전위는 전선을 갖춘다!”

그 수가 무려 세 자릿수에 이른다. 용병의 인도에 따라 설화석을 캐내던 일꾼들까지 검을 쥐었고, 짐꾼들은 마차에서 꺼낸 방패를 전위의 용병들에게 전달했다.

쿵.

수십 개에 달하는 방패가 전열 앞에 박히며 전선을 그려낸다. 전위를 지키는 용병들이 창과 검을 든 채 앞을 막았고, 그 뒤로 마법사와 레인저를 비롯한 이들이 달려드는 마수들을 요격하기 시작했다.

콰앙-!

제일 먼저 얼어붙은 대지를 박차고 달려든 화이트 울프 무리가 방패 위로 닥쳐든다. 전위의 용병들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어깨에 힘을 받쳤고, 방패 너머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을 버텨내었다.

“화이트 울프는 넘어오는 것만 막아! 화력은 트롤이랑 오우거한테 집중한다!”

문제는 간간이 섞여 있던 트롤과 오우거였다.

숙련된 용병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찜쪄먹을 수 있는 괴물들. 북쪽 숲의 악명답게 흰 피부를 지닌 놈들은 본래보다 몇 배는 더 사나운 기세를 풍겼다.

파앗-!

용병들 사이로 무거운 긴장감이 내려앉은 가운데, 전위의 방패를 밟고 그 위로 뛰어오른 이들이 있었다.

“버러지 따위.”

“전위 잘 지키도록. 오우거는 우리가 맡겠다.”

A랭크 용병인 하우젠나임과 가르고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가볍게 눈짓한 후 두 마리의 오우거를 향해 각각 몸을 날리며 쇄도했다.

둘은 모습이 극명하게 다른 것처럼 전투 방식도 달랐다.

하우젠나임이 내리꽂히는 오우거의 몽둥이를 피해내곤 그 하단부에 미끄러지듯 들어가 다리의 힘줄을 잘랐을 때, 가르고일은 제 대검을 들어 오우거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아내었다.

“흡!”

힘찬 기합성과 함께 그 머리 위로 시퍼런 힘줄이 솟아오른다. 한 치의 밀림 없는 경합이 이루어졌을 때, 새하얀 눈발이 휘날리고 있던 하늘 위로 시뻘건 화마의 해일이 그 주변을 휩쓸었다.

“무식하게 돌진하기는.”

뒤늦게 그들을 뒤따라온 마도사 질리카가 질렸다는 눈으로 허공에 떠오른 채 불꽃을 다룬다. 그러자 일순간에 마수들이 타들어 가며 메케한 냄새를 풍겼다.

“흠, 제법이네요. 물론, 저보다 못하지만.”

스태프의 끝으로 바닥을 찍은 일레이나가 콧방귀를 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묘한 대항 의식을 느낀 듯 그 시선은 질리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압!”

“엘레오노라님! 제 뒤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도 전선에서 열심히 활약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마법사인 엘레오노라의 활약이 두드러진 듯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쉬아아악-!

빙결의 권능을 머금은 프로스트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얼어붙은 참격이 피륙을 베어냈고, 흩뿌려진 피를 순식간에 얼려버리며 마수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주우욱.

미끄러지듯 앞으로 질주한 미르엘은 곧바로 전위 용병의 옆에서 짓쳐 들며 그 팔을 물고 늘어진 화이트 울프의 목을 베어냈고, 그 기세를 이용해 방패 사이로 손을 뻗은 트롤의 손가락을 잘라내었다.

“확실히 좋아졌네.”

“그러게요. 검술 쪽은 잘 모르겠는데, 어제보다 펄펄 날아다니는 게 느껴져요.”

“가장 좋은 건 마나와 체력의 소모가 줄어들었다는 거야. 아무래도 대검의 힘을 극대화하려면 그 흐름을 유지하는데 적지 않은 기력이 소모되니까.”

애초에 전투 센스도 좋고 반사 신경도 훌륭하다. 지닌 재능이 빛을 발하고 있으니 꾸준히 수련만 한다면 앞으로 몇 년 안에 마스터에 도달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진한은 그렇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반년 안에는 마스터를 찍어줘야지.’

함께 다니며 이런 자잘한 몬스터에게 얻을 수 있는 경험치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에게 몰아주면 이처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일레이나는…….

“왜요.”

“됐다. 숲 쪽 감시나 잘해.”

“나한테만 차가워.”

일레이나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면 갈수록 하는 행실이 나이에 맞지 않는 것 같아도 즉시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인재였다.

특히 다른 둘과 달리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는 이름과 악마 관련 지식은 이진한 역시 몇 번 도움을 받았을 정도가 아닌가.

‘나중에 스태프나 강화해줘야겠네.’

전장은 어느덧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던 화이트 울프는 결국 전위를 뚫어내지 못한 채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 트롤 역시 익스퍼트 급 강자들이 난도질해놓았고, 남은 것은 제일 마지막에 나타난 트윈 헤드 오우거였다.

“흡!”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다리뼈를 대검으로 받아낸 가르고일의 몸이 출렁거린다.

트윈 헤드 오우거는 곧바로 반대 손을 뻗어 그의 몸을 움켜쥐려 했지만, 등 뒤에 숨어 있던 하우젠나임이 재빨리 앞으로 쇄도해 녀석의 허점을 찔렀다.

퍽-!

창끝이 번쩍이자 눈알 두 개 중 하나가 가차 없이 터져 나간다. 트윈 헤드 오우거가 광란에 빠져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에 하우젠나임은 가까스로 창을 끌어당겨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손 많이 간다니까.”

질리카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몸을 받아낸다. 그러자 하우젠나임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제 의복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눈 한쪽을 파괴했으니 시야가 제한될 것이다. 난 그쪽으로 파고들지.”

“정면은 맡기도록.”

“챙기기 귀찮으니까 얻어맞지 마요.”

만난 지 이틀째 된 이들이었지만, 세 명은 마치 옛날부터 파티를 꾸린 듯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이윽고 트윈 헤드 오우거의 머리가 모두 뭉개졌을 때, 녀석은 커다란 소음을 내며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무리 트윈 헤드 오우거라 할지라도 A랭크 여러분 앞에서는 순식간이지요!”

손에 땀을 쥔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릭스 상단주가 소리를 지르자 다른 용병들 역시 환호를 지르며 승리의 여운을 만끽했다.

“몸값은 해야죠.”

“크기에 비해 별것 아니더군.”

“손맛은 제법이었다. 대검을 누르는 힘은 제법 묵직했어.”

싸움 가운데 죽거나 다친 이들이 있었지만, 용병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전장을 정리하며 수확물을 확인하는 데 바빴다.

“저깟 것 한 마리 잡는 데 저리 고생이라니.”

이진한은 발끝에 채인 화이트 울프의 사체를 툭툭 차며 어깨가 하늘 끝까지 올라간 A랭크 용병들을 한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너그럽게 봐줘요. 어디 드래곤 슬레이어도 아니고 단숨에 목을 쳐내는 건 힘드니까.”

“마스터 둘에 마도사면 열 합 내로 죽여야지. 이러면서 내게 미르엘을 운운하다니 옹이눈에도 정도가 있는 거지.”

자신의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무슨 미르엘을 성장시키겠다는 것인가. 이진한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꼈다.

파직.

그때, 숲 안쪽의 하늘이 일렁거렸다.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당연히 이진한이었다. 그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자니, 뒤이어 그 현상을 파악한 일레이나가 조심스럽게 소매를 잡아 왔다.

“저거, 저거 느껴져요?”

“어, 마녀란 놈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 같은데.”

“…좀,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용병 무리도 그 이질감을 느낀 이가 있는지 웅성거림이 일었다. 제일 먼저 마도사 질리카가 고개를 번쩍 들자, 다른 이들 역시 숲을 향해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쉬아아아악-!

숲의 안개가 갈라진다. 그 안으로 보이는 풍경에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가 펼쳐져 있었나. 어쩐지 내 눈으로도 안쪽이 안 보이더라.”

대현자의 눈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라면 상당한 수준의 마도사가 펼친 것일 터. 까닥하면 그 마녀라는 존재는 자신과 같은 초월지경에 이른 존재일 수도 있었다.

저벅.

활짝 열린 결계 가운데로 누군가 발을 내디딘 소리가 들려온다. 좌중 사이로 긴장감이 내려앉았을 때, 그들은 곧 모습을 드러낸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꼬마? 마녀가 꼬마라고?”

“외형에 속지 마요. 마도를 걷는 자가 경지에 이르면 육신의 형태를 바꾸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가르고일의 의문에 질리카가 날카롭게 일갈했다.

실제로 얼어붙은 동토 위에 선 것은 5, 6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아이였다. 머리카락, 눈썹, 피부, 입고 있는 원피스까지 모두 새하얗기 그지없다. 그 가운데 뜨인 한 쌍의 눈동자만이 사파이어 같은 푸른 빛을 뿜으며 그들을 좌시할 뿐이었다.

바닐라 색 곰 인형을 품에 안고 있던 아이는 한 점의 감정조차 깃들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지. 다음은 용서치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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