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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71화 (71/210)

◈ 071.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배를 얻어맞은 미르엘의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녀는 신음을 토해내면서도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충격이 큰 것인지 엎드려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 검의 이름이 아우스펜서라고 했지. 빙결의 결정이라 불리는 던그래스프 원석으로 제련한 것이라고.”

이진한이 빼앗은 대검을 손안에서 돌리며 묻자 미르엘은 주저앉은 상태에서 힘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검 자체는 훌륭해. 솜씨 좋은 장인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이야. 문제라면…….”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미르엘은 입술을 씹었다.

“…역시 저와 맞지 않는 겁니까.”

“그래.”

단호한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오히려 이진한 쪽에서 의문이 들었다. 그 문제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굳이 대검을 쥔 이유가 무엇일까. 제국 기사단 정도 되는 곳에 있었으니 주위에서도 자신처럼 충고해준 이가 있을 텐데.

그럼에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아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툭.

테라스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엘레오노라가 미르엘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그 몸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그러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진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검은 브레스트 가문의 상징이거든요. 미르엘은 북부의 척박한 국경을 지키는 제 가문에 대한 존경을 담아 대검을 쥔 거예요.”

“가문에 대한 존경이라.”

흔히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충분히 존중해줄 법한 사상이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

피가 튀기는 전장에서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는가.

기본적으로 대검을 휘두르려면 막대한 힘과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튼튼한 육체를 요구했다.

추가로 대검에 휩쓸리지 않는 균형 감각과 자신의 틈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센스까지 필요했으니.

미르엘의 균형 감각과 센스는 매우 훌륭하다. 조금 전의 대련에서 느꼈듯 자신의 빈틈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힘과 육체의 부족함은 마나로 채우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굳이? 라는 것이 이진한의 생각이었다.

일검에 담긴 위력이 크니 자신보다 약한 이와 싸울 때는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거나, 다수라면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좀 달라졌다.

차라리 보통의 장검을 들고 힘과 육체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마나를 다른 곳에 활용한다면 이전보다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 터였다.

더욱이 기사는 높은 유지력으로 버티며 치고빠지는 식의 히트앤런을 이용한 장기전에 적합한 클래스.

미르엘이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엘레오노라를 지키고 싶다고 했지.”

“예.”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힘들다.”

검과 더불어 싸우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짧은 시간 안에 힘이 다해 홀로 지쳐 쓰러질 뿐이다. 그 말에 미르엘은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마음이 꺾였는지 빛이 바랜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꾸, 겠습니다. 검을.”

강요가 아닌 선택지를 주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살짝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헛기침하며 인벤토리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면 일단 이걸 써보자. 아우스펜서처럼 빙결 속성이 붙은 거라 미르엘 너랑 잘 어울릴 것 같네.”

새하얀 검신을 지닌 한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하게 풍기는 냉기와 더불어 그 자태에서 뿜어지는 우아한 분위기는 아우스펜서를 압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뭐, 뭔가요. 그 엄청 좋아 보이는 검은?”

풀 죽어있던 미르엘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이미 아우스펜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뜬 채 새하얀 검을 바라보았고, 이진한은 갑작스럽게 뒤바뀐 그녀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넘겨주었다.

“내가 옛날에 사용했던 검이다. 이름은 프로스트(Frost). 검 자체에 고유 스킬도 붙어 있어.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와아…….”

검은 현자가 사용했던 검. 미르엘은 그 말에 매료되어 조심스럽게 프로스트를 받아들었다.

일반 롱소드보단 조금 얇고 세검보단 두꺼운 검신.

고급스러운 푸른색으로 치장된 가드와 폼멜 그립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여기 검집. 손상 회복 마법이 걸려 있어서 날이 무뎌진 정도는 검집에 얼마간 넣어두면 고쳐질 거야.”

“…거기에 마법검이라니.”

“정확히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검집이지만.”

완전히 기운 차린 미르엘의 모습에 이진한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건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러울 테니.”

“아, 부탁드려요.”

그가 아우스펜서를 인벤토리에 넣었을 찰나.

“…크흠.”

테라스에 있던 일레이나가 언제 내려왔는지 바로 옆에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슬쩍 눈빛을 보내오는 것이 마치 자신은 뭐가 없냐는 듯한 표정이지 않은가.

이진한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저번에 스태프 사줬잖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도 덧붙여야지.”

따악.

과욕은 꿀밤으로 응징했다.

일레이나가 제 이마를 감싸 쥔 채 주저앉았을 때, 그는 고개를 돌려 엘레오노라를 바라보았다.

“엘레오노라,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 마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니까 이참에 보충해두고 싶은데.”

“아니요, 저는 충분한 것 같아요.”

엘레오노라는 일레이나의 모습을 보곤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제 허벅지 옆에 달린 완드를 가리켰다.

“이것도 있고 저번에 주신 그 배리어를 만들어내는 팔찌도 잘 작동해요. 여기서 더 무언가 있어봤자 잘 다루지도 못할 것 같거든요.”

“그래. 나중에 시간이 나면 더 좋은 거 만들어줄게.”

그들 사이로 사뭇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끙끙거리며 이마를 부여잡고 있던 일레이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편애 금지! 저한테도 애정을 담아서 그렇게 말해줘요!”

“…한 발로는 부족했나 보네.”

이진한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움찔하며 엘레오노라의 뒤로 숨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이 어린 시선이라는 걸 모르시나요?”

“그 나이 먹고 스스로 아이라 칭하기에는 좀 부끄럽지 않아?”

“…….”

일레이나는 이진한을 제외하곤 이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실제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살짝 깬다는 표정으로 바라봐오자 살짝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으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참, 숲 쪽은 어쩔 거예요? 내일도 나타나지 않으면 허탕 치는 꼴이 되는데.”

“말 바꾸기는.”

이진한이 슬쩍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는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피했다.

“참, 용병들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번 달에 숲으로 들어간 용병들이 패퇴하면서도 마녀에게 작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고 하더군요. 소문에 불과하지만, 그들 사이에선 꽤 신빙성 있는 주장으로 치는 듯합니다. 실제로 그 뒤에 몇 번이나 다른 파티가 숲을 드나들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니.”

미르엘이 깜빡했다는 듯 프로스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치료 때문에 은거하고 있는 건가.”

“이쪽 상단의 일정이 끝나면 또 다른 퀘스트를 구해볼까요? 살펴보니 상시 인원 모집을 하는 곳은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 일단은 그런 방향으로 해보자.”

엘레오노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진한은 저 너머의 북쪽 숲이 자리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기다려볼 생각이다. 가능한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싶으니 최대한 얌전히 접촉할 생각이었지만, 이대로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숲을 뒤흔들어서라도 불러낸다.’

초월 마법 한 발 정도 떨구면 충분하지 않을까.

***

“흐흐.”

그릭스 상단의 주인인 그릭스 제니엄의 표정은 전날 아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하루 동안 캐낸 설화석만 하여도 그간 쌓인 빚과 이 원정을 위한 용병들의 몸값을 전부 충당하고도 아주 조금이 남을 정도이지 않은가.

고작 하루로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오늘 원정으로 다시 휘청거리는 사업을 일으킬 기반을 만들어야 했다.

‘내일도 나온다면 떼부자가 될 것 같은데 그놈의 불문율이 뭔지, 쯧.’

그릭스 상단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레인저들을 바라보았다. 북쪽 숲에 들어오려면 노스 벨헤드렘의 토박이인 그들의 안내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틀이 한계라 했다. 처음엔 제 몸값을 올리려는 수작이라 생각하고 돈을 더 내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값을 크게 불러도 사흘 이상부터는 의뢰를 받아들이는 이가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마녀는 나오지 않는 건가.”

“마수의 기척도 없군요. 어제처럼 습격이라도 해온다면 덜 심심할 텐데.”

그릭스는 고개를 들어 제 앞을 바라보았다.

상단의 일꾼들이 설화석을 캐내고 있을 때, 그는 세 명의 A랭크 용병과 함께 느긋이 다과회를 즐기고 있었다.

벌판은 함박눈이 내리는 차디찬 날씨였으나, 그들이 자리한 곳은 아티팩트의 힘으로 봄과 같이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이대로 원정이 끝난다면 돈만 축내는 꼴이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스스로 제 몸의 값어치를 깎을 생각이에요? 우리는 억제제라고요.”

대검의 전사 가르고일이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자, 그 옆에 있던 마도사 질리카가 눈을 흘기며 질책했다.

“하하, 돈만 축내는 꼴이라니요. 질리카 마도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세 분은 마녀를 위한 억제제이시니까요.”

그릭스 상단주는 넉살 좋게 웃음을 흘리며 차를 마셨다. 실상은 돈이 아까워서 위액이 역류할 정도였지만, 그들 앞에서 티를 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일은 하지 않는가.”

그 가운데로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하우젠나임이 입을 열었다. 창을 가슴에 품고 있는 그는 살짝 짜증이 난다는 시선으로 나무가 무성한 숲 안쪽을 바라보았다.

“저야 그러고 싶지만, 불문율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레인저들도 사흘 이상 의뢰를 맡지 않겠다고 전부 거절했으니 말이죠.”

“…겁쟁이 놈들.”

그릭스의 말에 하우젠나임은 경멸스럽다는 얼굴로 어두커니 쉬고 있는 레인저들을 바라보았다. 불문율이니 징크스니 하는 것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런 불확실한 것을 믿고 의존하니 평생 발전이 없는 것일 터.

“마녀라. 듣기로는 저번 원정대의 A랭크 들이 적잖은 상처를 입혔다는데 그래서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놈들 말을 믿어요?”

가르고일의 말에 질리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보낸다. 그러자 가르고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쪽에 지인이 있는데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애초에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세 명의 A랭크 용병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 무슨 일입니까!”

여유로운 모습으로 차를 마시고 있던 그릭스 상단주는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잔을 엎지르고 말았지만, 제 앞섬이 적거나 말거나 사뭇 심각해진 그들의 표정에 놀람을 토해냈다.

“…마녀다.”

하우젠나임은 그 말을 툭 내뱉고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제 창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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