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0.
“…….”
화이트 울프와의 전투 직후 각자 정비를 하고 있을 때 엘레오노라는 하우젠나임이 미르엘에게 집적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곧 그녀는 서늘한 안광을 내뿜으며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옆에 있던 일레이나가 쿡쿡 웃으며 그 팔을 붙잡았다.
“왜요.”
“조금만 더 지켜보죠. 궁금하지 않아요? 미르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건.”
생각해보니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미르엘은 이미 베르너 님에게 푹 빠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느끼하게 생긴 남자가 다가왔다고 해서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리라.
“이 파티에서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엘레오노라의 예상대로 미르엘은 단호히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예상했던 대답과는 다른 것인지 하우젠나임의 눈가가 꿈틀거린다. 곧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르엘을 향해 말했다.
“A랭크 용병인 내가 너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파티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없습니다.”
“아니, 너는 네 파티를 떠나야 한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균형을 유지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용병 생활이란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네게 쌓인 부담은 시간이 갈수록 가중될 것이고 그것은 곧 최악의 형태로 한계를 맞이하겠지.”
그 나름대로 섬뜩한 경고를 해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미르엘의 시선에선 모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애초에 이 배치는 그녀와 엘레오노라를 수련시키기 위해 이진한이 배치한 것 아닌가.
슬슬 진심으로 기분이 상해 두 눈을 날카롭게 뜰 찰나, 뒤쪽에 있던 이진한이 그들에게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내 일행이다. 함부로 인원을 빼가려 하다니 무례하군.”
“…끼어들지 말도록. 나와 엘의 일이니.”
“파티장이 파티원에게 집적거리는 놈을 보고 지나치라고?”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그리 말하자 하우젠나임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파티장으로서의 자격이 없지.”
“내 파티 내의 사정이다. 외부인이 뭐라 할 처지는 아닐 텐데.”
용병 간의 불문율을 언급하자, 하우젠나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진한을 바라봐왔다.
“너.”
심지어 은은하게 제 기세를 일으키며 이쪽을 압박해오기까지 했으니.
“내가 보고 있겠다. …엘, 너는 누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기한은 이 여정이 전부 끝나기 전까지다.”
하우젠나임은 제 할 말은 거기서 끝이라는 듯 망설임 없는 태도로 자리를 떠났다.
“뭐, 저런 무례하고 후안무치한 사람이 다 있어요.”
뒤쪽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엘레오노라가 화를 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일레이나가 쿡쿡 웃으며 말을 보태왔다.
“그래도 나름대로 분위기는 잡던데요. 「너. 내가 보고 있겠다.」 이제 보니 이성뿐만 아니라 동성에게도 인기 만점이시네요. 좋으시겠어요.”
“…쓸데없는 소릴.”
하우젠나임의 도발에도 흔들림 없던 이진한이 그녀의 말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단죄의 딱밤이라도 날리려고 한 것이었지만, 일레이나는 냉큼 엘레오노라의 뒤로 몸을 숨겼다.
“왜 갑자기 저런 소릴 하는지.”
정작 당사자인 미르엘은 성가시기만 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에 이진한은 팔짱을 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래 보여도 일단 제법 실력은 있어 보이니 안목도 꽤 좋겠지. 경지에 오른 사람이 보는 건 다 비슷비슷하거든. 냉정하게 평가해도 조금 전에 네가 보였던 움직임은 훌륭했으니까.”
“…훌륭했나요.”
미르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서린다. 칭찬받아 기쁜 것인지 찌푸렸던 눈매가 풀어지며 호선을 그렸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준비 서둘러주세요!”
상단 쪽에서 나온 관리인의 말에 용병들은 각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진한을 비롯한 그녀들 역시 정비를 끝마쳤고, 이내 다시 숲 안쪽을 향해 나아갔다.
화이트 울프에게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은 따로 챙기지 않았다. 그 이빨이며 가죽이며 제법 희소한 것들이라 값어치가 있었지만, 숲의 자원을 캐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에 그 자리에 놓고 가는 것을 택했다.
“후우.”
누군가 내뱉은 한숨이 새하얀 김이 되어 허공에서 바스라 졌다. 한참이나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울창한 삼림은 여전하다. 뽀득거리는 눈을 밟으며 기분을 내는 것도 잠시간이지 지금은 그것만큼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바로 앞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레인저가 희소식을 전해왔다.
원정대가 목적지의 바로 지척까지 다다랐다는 것. 다들 얼어붙은 다리를 열심히 채찍질했고, 얼마를 그렇게 나아가자 생뚱맞게 튀어나온 석산(石山)을 볼 수 있었다.
“오오, 이것이.”
추위를 참으며 웅크린 채 걸음을 옮기던 그릭스 상단주가 황홀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바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마녀를 비롯한 마수들의 습격을 경계하고, 상단의 일꾼들은 곡괭이와 삽자루를 꺼내 들고는 석산의 벽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툭.
나무에 기대 일꾼들이 채광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이진한은 발치까지 굴러온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무엇인가 싶어 그것을 살피자니, 옆에 있던 일레이나가 슬며시 그의 팔에 얼굴을 기대며 흥미를 드러내었다.
“설화석이네요? 그것도 마나가 제법 서려 있는.”
“파편 부스러기인데 하급 마나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강도도 제법 단단하고. 제련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활용 방법도 무궁무진할 것 같군.”
이진한은 적잖게 감탄을 흘렸다.
희귀 광물이나 자원의 경우엔 그 역시 제법 조예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질을 띠는 설화석은 처음 본 것이었기에 신기함이 더욱 컸다.
“마나석의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겠어. 이러니 이런 오지까지 와서 캐내려 하지.”
자신마저 혹할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어.”
굴러온 파편을 찾으러 온 것인지 일꾼 한 명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그 앞에 섰다. 이런 조그마한 부스러기 하나조차 놓칠 수 없다는 것일까. 자신이 쥐고 있는 설화석을 발견하곤 눈치를 봐오길래 이진한은 순순히 그것을 넘겨주었다.
“…….”
일꾼은 감사의 표시로 꾸벅 고개를 숙이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곡괭이를 들었다.
“일레이나. 여기까지 오는 위치 기억해?”
“기억이야 하죠. 그리 어려운 루트도 아니었으니까요. …설마?”
“이런 노다지를 놓고 갈 순 없지.”
이진한은 씩 웃으며 석산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니 산의 상당수가 설화석과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 챙길 생각은 없다. 최우선 목표는 마녀와 만나는 것. 그렇기에 고개를 돌려 숲 안쪽을 주시했으나, 그 너머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기만 했다.
“흠.”
더욱이 숲에 들어온 직후부터 환경 탓인지 아니면 은밀한 결계가 펼쳐져 있는 것인지 대현자의 눈, 그리고 색적 마법은 숲의 정보를 읽어오지 못했다.
그가 파악할 수 있던 것은 아주 짧은 반경 얼마 내의 움직임뿐. 이래서야 적의 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베르너 님.”
“응?”
저 앞쪽을 지키고 있던 미르엘이 어느새 그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돌아가서 대련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렵지 않지.”
원정대의 일정은 총 3일로 이루어져 있다.
당연히 이곳에서 밤을 새우는 것은 아니었다. 추위도 추위일뿐더러 해가 떨어진 이후 숲에서 나가지 않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하다는 격언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침에 출발해서 해 질 무렵 즈음에는 귀환하기로 계획이 짜여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그릭스 상단주는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마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정말로 다행이었지만, 생각보다 작업이 더딘 탓인지 작업량이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적어도 마차 두 대는 채울 수 있는 분량을 캐내리라 생각했건만, 한 대하고도 그 절반밖에 채우지 못했으니 속이 쓰렸다.
‘그래도 이걸로 빚의 절반은 갚겠어.’
설화석은 그 본연의 값어치보다 가공한 것이 수배는 더 비싸다. 우스갯소리로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몇 배는 더 값이 나갈 정도였다.
물론 가공한다면 부피가 3배나 줄어드는 것이 문제였지만, 가격 측면에서는 거의 5배에 달하는 이득이었기에 가공은 필수 불가결 적인 요소라 할 수 있었다.
‘남은 기한은 이틀. 내일 분으로 빚을 모조리 갚고, 3일 차이 분으로 새로운 사업을 일으킬 자본을 만든다.’
정말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설사 마녀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A랭크 용병들이 어떻게든 해줄 터.
“철수. 오늘은 이만 철수하겠다. 다들 짐을 챙겨라!”
그릭스의 외침에 첫 번째 원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이진한이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저버린 이후였다.
가볍게 저녁 식사를 마친 이후 그는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숙소 밖에 있는 공터로 나왔다.
“미르엘 파이팅!”
“그 남자 콧대 좀 눌러줘요!”
테라스 위에는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가 걸터앉아 곧 벌어질 대련을 흥미 깊은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진한은 그녀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어째 텐션이 높다고 생각했거늘, 둘의 손에 술잔이 쥐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척.
완전무장한 미르엘이 대검을 들며 그 앞에 섰다. 이진한은 그런 그녀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주위에 마법으로 결계를 쳤으니 밖에서는 이쪽의 소란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다. 그러니 마음껏 덤벼와 봐.”
“네.”
대답과 동시에 미르엘은 자리를 박찼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딛고 선 땅의 자갈들이 비산 했을 때, 이진한은 그녀의 신형이 바로 지척까지 이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쉬아아아악-!
상당히 저돌적인 동선과 더불어 거침없는 시원시원한 일격이었다.
더군다나 빙결의 권능으로 주변 기온이 급속도로 낮아지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인데 한기가 불어닥치니 절로 몸이 떨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강한 힘을 실은 공격일수록 크게 허점이 드러나는 법. 이진한은 몸의 방향을 트는 것으로 대검을 피해냈고, 손을 들어 가볍게 그녀의 가슴을 밀쳤다.
“한 번.”
제 공격이 헛되이 돌아갔음에도 미르엘은 멈추지 않았다. 뒤로 밀쳐져 균형을 일었으나, 곧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물 흐르듯 형세를 반전시켰다. 그것까지만 보자면 특별한 것은 없으나, 무게 중심이 극단적으로 앞을 향해 쏠려있다는 것에 이진한의 두 눈이 빛났다.
‘카라반과 싸웠을 때의 내가 썼던 수법인가.’
그 찰나에 용케 본 건지 제법 그럴듯한 형태로 흉내 낸다. 하지만 그건 신체 밸런스를 완벽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먹히는 수법. 아직 미숙한 미르엘의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왼쪽 옆구리, 어깨, 명치, 허벅지 등.
이진한은 허점이 드러난 부분을 모조리 손으로 밀치며 카운트를 셌다.
“일곱.”
단숨에 숫자가 늘어난다.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에도 미르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지금이라는 듯 제 권능을 맹렬히 피워 올리며 다시금 이쪽에 닥쳐왔다.
“흡!”
높이 들린 대검이 하늘에서부터 찍어 눌러왔다. 이른바 거합베기라는 녀석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두 손을 활짝 펼친 뒤 떨어져 내리는 대검의 양 옆면을 잡아냈다.
드드드드─.
대검은 그의 손에 잡힌 채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미르엘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용을 썼지만, 야속하게도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일 따름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진한의 입술이 달싹였다.
“여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