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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68화 (68/210)

◈ 068.

툭.

이진한이 맥없이 쓰러진 란돌프의 시신에서 창을 거둘 찰나, 엘레오노라가 울먹이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베르너 님, 미르엘, 미르엘이…….”

“미르엘이라면 걱정하지 마. 일레이나가 갔으니까.”

“…그런가요, 일레이나가.”

그 말에 엘레오노라는 무너지듯 쓰러져 내리며 안심을 토해냈다. 이진한은 그런 그녀의 신형을 안아 들면서도, 고개를 들어 마르딘 공작을 바라보았다.

“…맹세하겠네. 그녀에 관한 일은 손을 떼겠다고.”

[맹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딘 공작으로서는 그저 입으로 내뱉은 것이겠지만, 그는 이미 란돌프를 쓰러뜨림과 동시에 맹약의 마법을 발동했다.

“맹약은 성립했다. 그것을 어기거나 맹약 자체에 손을 데려고 할 시엔 심장이 옥죄어오는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종래엔 아마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터져버리겠지.”

대마도사의 보장이었다.

마르딘 공작은 입술을 씹으며 무어라 말하려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며 제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진한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은 채 엘레오노라를 품에 안고서 다시 한번 더 마르딘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 잊지 말도록. 내가 지금 이곳을 끝내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뒷감당이 귀찮기 때문이라는 걸.”

“…알겠네.”

“두 번 다시 서로 보지 말자고.”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양옆에 선 기사와 마법사들이 경외와 공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엘레오노라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 앞으로 나아갔고, 저택을 빠져나갔을 때가 되어서야 다른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미르엘!”

“엘레오노라 님.”

미르엘과 일레이나는 상처투성이였다. 부둥켜안은 둘을 바라보던 이진한은 일레이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맡기라고 했으면서 조금 힘들었나 보네.”

“무식한 놈들이 있어서 그랬어요. 목숨 상관하지 않고 몸을 던져오더군요.”

“말했잖아. 제정신인 놈들이 아니라고.”

이진한은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초월 마법 진홍의 보옥.

협박용으로 띄워놓은 것이지 정말로 이곳 자체를 폭격할 생각은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마르딘 공작을 죽임으로써 리베라 제국과 척지는 것은 그에게도 부담스러운 일. 그렇지 않아도 동대륙의 패자인 오스칼 제국과 완전히 어그러진 상태에서 그들과도 마찰이 생긴다면 이 땅에 발을 디딜 곳이 없어지지 않는가.

“그래도 경고는 확실하게 해놓는 게 좋겠지.”

콰아아앙-!

진홍의 보옥은 캔슬했지만, 용아청성창의 이빨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에서부터 시퍼런 낙뢰가 매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렸고, 그것은 이내 저택 앞의 정원을 파헤치며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이러면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겠네요.”

“그렇지?”

일레이나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아직 부둥켜안고 있던 둘에게 말했다.

“그래서. 떠날 거예요, 말 거예요. 설마 아직까지 뭐 황녀의 책임감 운운하면서 남아있을 생각 없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엘레오노라가 새빨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거리자 일레이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답답한 건 질색이거든요. 이 지경까지 와서 그러면 머리채 잡고 끌고 가려 했어요.”

“…머리채 잡히긴 싫으니까 두 발로 갈게요.”

“엘레오노라 님.”

미르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미르엘, 당신은 어떻게 할래요.”

“저 말입니까?”

“책임을 버리고 책무를 회피한 이상 저는 이제 스스로 황녀라 칭할 자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당신의 역할은 황녀인 엘레오노라 폰 오스칼을 호위하는 것이지 엘레오노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말에 일레이나가 얼굴을 구겼다.

그냥 따라와달라고 하면 될 것을 저리 번잡하게 구나. 그렇기에 다시 한 마디 쏘아붙이려 할 때, 이진한이 팔을 뻗어 그 입을 막았다.

“…왜요.”

“내버려 둬.”

“저런 답답한 모습을 보고도요? 그냥 따라와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둘도 나름대로 각오가 필요한 거야. 이젠 진짜로 자신이 지녔던 모든 것을 버리는 거니까.”

언젠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가리라.

가슴속에 한 줄기 희망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었지만, 그 동아줄이 되어줄 터였던 마르딘 공작마저 배신한 지금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심정이리라.

“…고작 그런 이름 따위에 얽매였다면 애초에 엘레오노라 님을 따라오지 않았을 겁니다.”

“미르엘…….”

하지만 이진한의 출현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미르엘은 변함없는 충정을 보여주었고, 엘레오노라는 그 모습에 감동해 다시금 두 눈을 글썽거렸다.

“자, 해결됐죠? 얼른 가요. 뒤통수가 따가우니까.”

일레이나는 그런 둘 사이로 난입해 어깨를 밀었다. 그 말대로 공작의 저택은 오밤중에 일어난 소란을 정리하기 위해서인지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아무리 맹약을 맺었다지만 적을 뒤에 두고 여유를 부리는 것은 찝찝하기 그지없는 일. 곧 그들은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했고 이번에야말로 그 안에 발을 내디뎠다.

***

【377:19:52】

혹시 모르는 마음에 마르딘 공작의 동태를 살피는 일에 30시간이 넘는 유예가 소모되었다. 뭉텅이로 깎여 나간 시간이 아까웠지만,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구한 대가라면 제법 싸게 먹힌 듯했다.

“…….”

이진한은 대현자의 눈으로 방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엘레오노라, 미르엘, 일레이나. 그 셋은 사이좋게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짧은 해우이니 다 같이 잠을 자야 한다나 뭐라나.

일레이나가 장난스럽게 이 사이에 껴서 같이 자고 싶냐고 물어보기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가 썩 나가라는 매몰찬 말만 되돌려 받아 아쉬울 따름이었다.

“경치 하나는 끝내주네.”

이진한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마르딘 영지까지는 화창한 봄 날씨 가운데였지만, 이곳은 어째서인지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거센 눈발을 흩뿌렸다.

서대륙 최북단에 자리한 도시 노스 벨헤드렘.

위치상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도시 국가로, 그 바로 너머에 존재하는 ‘통칭’ 북쪽 숲에 영향을 받아 사시사철 끝나지 않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마르딘 영지 다음으로 이곳을 목적지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북쪽 숲에 산다는 마녀 때문이었다.

“《영원》의 계보를 이었다지. 그 깐깐한 성격은 닮지 않았으면 하는데.”

《영원》의 대마도사.

자신과 같이 공략대의 한 명으로 마법사 랭킹 최상위권에 달리는 랭커였다.

닉네임은 ‘스치면 주님 곁으로’였나.

마법사 클래스 최상위권답게 마법을 완성하는 영창 속도도 빨랐지만, 대단했던 것은 화력에 대한 괴랄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듣기로는 재벌 3세라는 말이 있었다. 값비싼 고성능 장비를 떡칠해 같은 랭커 보다 최소 3할은 더 강한 스펙을 뽐내며 상대를 힘으로 찍어 누르는 스타일이었다.

오프 모임에서 간간이 만났는데 연예인 못지않은 외모임에도 틱틱거리는 성격이라 사람들이 쉬이 다가가지 못했다.

술은 또 어찌나 잘 먹던지 대작을 시작하면 얼마 뒤엔 자신 빼고는 전부 나가떨어질 정도.

주사가 질질 짜는 거라서 조금 성가셨던 경우가 많았다.

‘그립네. 잘살고 있으려나.’

2부 업데이트 이후 레이드 약속에 지각한 것도 바로 전날 그녀와 술을 마시다 늦잠 잔 것이었다.

틱틱거리는 겉모습과 달리 속은 따뜻한 녀석이었는데,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자신이 돌연 소식이 끊기면 무슨 생각이 들까.

조금 미안해진 이진한은 뺨을 긁으며 아레나 길드에서 준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그쪽에는 톡톡히 도움을 받네. 드래곤 레이드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는걸.”

북쪽 숲에 《영원》의 계보를 잇는 마녀가 살고 있다는 것과 더불어 마르딘 공작의 이상한 동태를 알려준 것도 그들이었다.

공작도 설마 자신이 의뢰한 길드가 이미 이쪽과 손잡은 곳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터.

암부의 행적까진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늦지 않고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빼내 올 수 있었다.

“그러면 안쪽으로 어떻게 들어가느냐인데.”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새하얗게 뒤덮은 숲을 바라보았다.

북쪽 숲에는 온갖 희귀한 광물과 자원이 매장되어 있었다. 귀족과 상인들은 그것을 캐내길 원하지만, 예로부터 숲의 주인으로 인정받아온 마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곧잘 마찰이 일어나는 듯싶었다.

《영원》의 계보를 잇는 만큼 그 실력은 대마도사에 근접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니, 어쩌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초월지경에 들어서 있을 터.

몇 년을 살아왔는지 모를 존재였기에 이진한으로서도 충분한 대비가 필요했다.

“…뭐해요?”

잠깐 상념에 잠겨 있을 찰나, 방문이 빼꼼 열리며 일레이나가 머리를 내밀어왔다. 이진한이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들어 올리자 그녀는 아, 하는 표정을 지었고 잠시 사라지더니 이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두 잔을 손에 든 채로 방안에 들어왔다.

“잠은 주무신 거 맞죠?”

“일찍 일어난 거야.”

전날 마르딘 공작가에서 제법 날뛰었지만,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다. 조용히 서류를 살피고 있던 것도 당장 급한 건 없으니 그녀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었다.

“아침 아직 안 드셨죠?”

“고마워.”

그녀가 타온 커피를 받아들며 이진한은 고개를 까딱였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그 따뜻함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 일레이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

“하암.”

그녀는 작게 하품을 하며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잠옷 차림인지라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이진한이 시선을 보내자, 일레이나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 어딜 보시는 거예요.”

“…예전이랑은 사뭇 다른 반응이네.”

페르포치아 왕국의 수도에서 단둘이 있을 때 얼굴을 붉히며 빽빽 소리 지르던 모습과는 달라진 능글맞은 태도에 이진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여러모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으니까요.”

“심경의 변화?”

“그런 게 있어요. 자세히 알려고 하진 마요.”

일레이나는 어젯밤 자신들의 방에서 이진한을 쫓아냈을 때처럼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숲 쪽은 어떻게 하실 건지 정하셨나요? 어제 슬쩍 둘러보니까 시끌시끌하던데.”

“그렇지 않아도 그걸 이용해보려고.”

숲의 규모가 워낙 컸기에 단순히 숲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마녀를 찾기 어려웠다. 무슨 연유인지 대현자의 눈과 색적 마법도 잘 통하지 않았으니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하리라.

“마음 같아선 확 불 질러 버리고 튀어나오라 말하고 싶은데…….”

“그러면 본전도 찾지 못하겠죠.”

“그렇지.”

숲의 마녀에게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니 가급 적이면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가는 것이 좋을 터. 물론 여차할 땐…….

‘숲이고 나발이고 다 뒤집어 버린 다음에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꺼내와야지.’

《영원》의 계보를 잇고 있다면 같은 영웅인 《지혜》의 검은 현자에게도 한참이나 후손뻘이 아닌가.

상하관계의 엄격성은 그 몸에 직접 새겨주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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