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7.
제국 암부 서열 1위 란돌프 에렉사스.
그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푹 파인 눈두덩이와 창백한 안색. 그리고 포마드로 깔끔히 넘긴 머리카락은 언제 보아도 구역질이 나오는 것이었다.
란돌프는 제국의 사냥개로 표적이 된 이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 집요한 남자였다.
엘레오노라 휘하에 있던 이들 중 칠할 가량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정도이니 란돌프를 향한 그녀의 분노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황녀, 오랜만입니다. 설마 이렇게 조우하게 될 줄은 나 역시 몰랐지만.”
란돌프가 히죽 웃으며 말해왔다. 엘레오노라는 그 시선에 흠칫하면서도 두 주먹을 꽉 쥔 채 마르딘 공작을 바라보았다.
“…외숙부.”
“뭐, 어쩔 수 없었다. 나나 너나 피차 기구한 운명인 것은 마찬가지일 테지. 원망이라면 얼마든지 하려무나.”
“어떻게, 어떻게 저에게.”
“이해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정세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구태여 불씨를 안고 있을 여유는 없었으니. 검호 건은 어떻게 무마했다만, 국내외로 여론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마르딘 공작은 이때까지 보였던 살가웠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저 성가시다는 얼굴로 엘레오노라를 바라보며 복잡하게 되었다는 듯 혀를 찼다.
“순순히 제국 내에서 잡혀주었으면 이리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었거늘.”
“그 건에 대해선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간악한 역도 무리가 황녀를 탈출시키는 대에 사력을 다했던지라.”
“약속은 지키시오. 내 많은 양보를 한 것이니.”
“염려가 있겠습니까. 리브레 부장을 제거해주신 덕분에 저도 암부를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으니 충분한 성의를 보여드려야지요.”
“흠.”
서로 사전에 오간 거래가 있던 듯 마르딘 공작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아직 얼어 있는 엘레오노라를 향해 말했다.
“원래는 더 빠르게 처리하려고 했다만, 드래곤 슬레이어 그놈의 전력이 예상외로 강하더구나. 마주한 마도사나 소드 마스터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감히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피했을 따름이다. 혹시 몰라 하루 더 기다리는 것으로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기까지 했지.”
“…이 더러운.”
“그리 상심하지 말도록 하여라. 네 기사는 한참 전에 먼저 강을 건넜을 터이니. 주인 된 도리로서 수하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는 법이겠지.”
“…무슨!”
엘레오노라는 두 눈이 크게 떴다.
깨닫고 보니 미르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자신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문 앞을 지키는 고지식한 성격의 기사가 사라졌다니?
쿵.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암부와 공작의 기사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에 마법사 역시 포진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놓칠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듯했다.
“…….”
엘레오노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술을 씹었다.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오는 이들은 한 명 한 명이 자신보다 강했다. 미르엘도 일레이나도 그리고 베르너도 없는 가운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끊임없이 생각해. 네가 할 수 있는 것과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그녀는 문득 만티코어가 있던 던전에서 베르너에게 받은 아티팩트가 생각났다. 지척에 이른 기사들이 자신에 몸에 닿기 전에 품 안으로 손을 넣었고, 그들보다 한 발자국 먼저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웅웅.
두꺼운 장막이 엘레오노라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기사들은 곧 검을 뽑아 그것을 향해 휘둘렀지만, 오러가 넘실거리는 검날조차 고작 생채기를 내는 것에 그칠 따름이었다.
파아앗!
돌연 그 주위로 시뻘건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것은 응접실 전부를 태워버릴 듯 세찬 기세로 솟구쳤지만, 이내 주위에 있던 마법사들에게 억제당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황녀. 폐하께서 몹시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순순히 따라가시지요.”
“…….”
란돌프의 이죽거림에도 엘레오노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선명한 의지가 담긴 주홍빛 눈을 날카롭게 치떴고, 제 주위를 둘러싼 이들을 살피며 빈틈을 찾아 헤맸다.
“…하하.”
란돌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말이 무시당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고고하던 황녀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희열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챙-!
그는 더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지 못한 채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줄기줄기 뿜어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쉬아아아악-!
기다란 궤적이 이어진다. 그것은 엘레오노라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베리어를 거칠게 베어 갈랐고, 란돌프는 그 틈새 사이로 제 손을 집어넣었다.
“…이 정도 참았으면 괜찮지 않습니까. 사실 폐하께선 당신이 죽든 살든 상관치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지요. 행복에 겨워 몇 번이고 기절하실 때까지 아껴드리도록 하지요.”
고귀한 오스칼 황실.
그 핏줄을 제 마음대로 다룬다면 얼마만큼의 유열을 느낄 수 있을까.
란돌프는 벌써부터 그 상상만으로도 머리에 피가 가득 쏠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소리 집어치워!”
엘레오노라는 진심으로 욕지거리를 토해내며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바닥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나 그의 목을 노렸지만, 리브레는 가볍게 손을 내민 것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뚝, 뚝-.
시뻘건 피가 삐죽 솟은 가시를 타고 흘러내린다.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아먹은 란돌프는 다시금 히죽 웃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 가학적인 취미는 없지만 말입니다.”
엘레오노라는 황급히 다른 마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란돌프는 더 이상의 반항을 용납지 않았다.
“그런 것을 원하신다면 해드려야지요.”
“…읏, 으윽”
그 억센 손아귀에 목을 잡혀 땅에서 두 발이 들렸다.
탁, 탁!
뼈가 부러질 것만 같은 그 고통 속에서도 엘레오노라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힘껏 란돌프의 가슴과 그 몸을 찼고, 두 손으로는 제 목을 조른 손아귀를 잡아당겼다.
“더, 더, 더, 반항해…….”
그 모습을 보며 황홀해하던 표정을 지으며 말하던 란돌프의 목소리는, 돌연 허공에서 들린 쇳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촤르륵-!
보랏빛 사슬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솟구치며 누구 예외랄 것 없이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팔과 다리를 모조리 속박했다.
란돌프는 명색이 소드 마스터에 오른 실력자.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엘레오노라의 목을 붙잡은 손을 놓으며 즉시 뒤로 물러났다.
“…이 개새끼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장내의 시선이 창가로 모였다.
막, 창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온 남자가 있었다. 복장은 밖을 지키는 사병의 것을 하고 있었지만,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마르딘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진한은 투구의 바이저(visor)를 들어 올리며 서늘한 안광을 내뿜었다.
파각.
그와 동시에 주박의 사슬에 속박되어 있던 기사들이 그 연결을 끊어내고 뒤로 물러났다.
“…언제 이곳에 돌아온 것이지? 정보 길드에 말에 따르면 분명 그 너머로 움직였다 들었거늘.”
마르딘 공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을 진행하는 데에 차질이 없도록 정보 길드에 비싼 돈을 주면서까지 그의 뒤를 쫓게 했다. 아무리 드래곤 슬레이어라 할지라도 전문가들의 추격은 쉬이 눈치채지 못했을 터.
하지만 버젓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존재에 심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젠 변명도 안 하겠다?”
“…대화로 풀어갈 용의가 있는가.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오해는 무슨.”
절그럭.
병사의 갑옷을 집어 던진 이진한이 용아청성창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눈치를 보고 있던 란돌프를 비롯한 제국 암부의 조직원과 공작의 기사들이 일시에 몸을 날려 그를 덮쳤다.
“어설퍼.”
용아청성창의 고유 스킬인 만운천뢰가 휘몰아쳤다. 소드 익스퍼트, 마스터 구분할 것 없이 모두 그것에 휩쓸려 나가떨어졌고, 이진한은 가볍게 땅을 박차며 그사이를 휩쓸었다.
쉬아아악-!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었을지라도 그 일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누구는 팔이, 누구는 다리가, 누구는 가슴이 쩍 갈라져 피를 흩뿌렸고, 응접실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
마르딘 공작의 눈가로 경련이 일어났다.
몇 번이고 조심해서 세운 계획이건만, 설마 끝에 와서 틀어진다니. 하지만 그 본인 역시 소드 마스터였다. 장내에 있는 이들과 합세해 공격한다면 아무리 드래곤 슬레이어라 할지라도…….
“…어.”
마법사 중 누군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 그 한 명이 아니었다. 장내에 있는 이들 모두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기운에 움직임을 멈추며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구우우우웅,
시뻘건 태양이 저택의 위로 떠 올라 있었다.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그 기운에 마법사들은 다리가 풀렸는지 주저앉았고, 더러는 오줌까지 지린 이가 있을 정도였다.
툭.
이윽고 마르딘 공작의 목으로 용아청성창의 날을 가져간 이진한은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쩐지 처음부터 관상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
“…이제 어찌할 텐가.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조리 몰살이라도 시킬 생각인가.”
마르딘 공작은 체념 어린 태도로 물었다.
피아 전력 차이는 절대적이다. 조금 전까진 그래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그 힘을 눈앞에 두니 전의가 싹 사라졌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이진한은 슬쩍 뒤쪽에 있던 엘레오노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뒤처리가 너무 성가시잖아.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제국의 공작가와 척지는 건 부담스럽고.”
“음.”
침중해 있던 마르딘 공작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이곳으로 닥쳐오며 베어낸 것은 모두 암부의 조직원들이었다. 자신의 수하 역시 그것에 휘말린 이가 있었으나, 암부에 비해선 경미한 부상이라 할 수 있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알아들었네.”
“그러면 일단…….”
둘의 대화가 그렇게 흘러갔을 찰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던 란돌프였다.
마르딘 공작이 그에게 굴복한다면 엘레오노라를 노리고서 이곳에 온 자신들은 실이 끊긴 인형의 신세가 되었다.
‘…죽는다.’
기껏 간계를 부려 경쟁자를 제거하고 제국 암부를 장악했다. 그런 가운데 황녀조차 데려오지 못하고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보다 우스운 일이 있겠는가.
결단은 빨랐고, 땅을 박차고 쇄도하는 그의 움직임은 더 빨랐다.
목표는 응접실 가운데에 있는 엘레오노라.
그녀를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인질로 삼아 목숨을 부지할 생각이었다.
─파각.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그 직후 란돌프는 제 시야가 짙은 어둠으로 잠겨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커헉!”
정신을 차리니 제 머리가 땅에 박힌 것을 깨달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입안에서 부러진 이빨과 찢긴 살점과 함께 거친 호흡이 토해져 나왔다.
“검호라고 했었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친다. 란돌프는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움직여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쉽지만, 그런 찌끄래기로는 간이 기별도 가지 않았다. 적어도 검성 그 본인은 데려왔어야지.”
“데, 데발…….”
이진한은 용아청성창을 들었다.
란돌프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목숨을 구걸하는 말을 해왔지만, 그는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발 죽여달라고? 뭐, 그러지. 고문을 즐길 정도로 고약한 취미는 없으니.”
창날은 단호하게 그 목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