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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66화 (66/210)

◈ 066.

이진한의 의심은 기우에 그쳤다.

그들이 영지에 머물 동안 마르딘 공작은 후한 대접을 해주었고, 또 엘레오노라의 부탁에 따라 그녀들이 오스칼 제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네 쪽은 어떤 것 같아?”

“마찬가지예요. 특별한 동향은 보이지 않고 있어요. 다만…….”

그와 같이 마르딘 공작의 배신을 의심하던 일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저택 밖을 가리켰다.

드래곤과 마법으로 싸워 승리하고, 그 검호마저 꺾었다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방문.

그것은 도시에 존재하는 뭇 많은 마법사의 심금을 울리기 부족함이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소문이 퍼져나감과 동시에 마르딘 영지에 자리하는 거의 모든 마법사가 몰려와 이진한과 만나기를 애원하고 있었다.

“어쩌실 거예요? 아까 슬쩍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저택 앞에서 밤이라도 샐 각오던데.”

“만나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더군다나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터니.”

마법사란 은원이 확실한 존재다. 적어도 이쪽에 잘 보이기 위해서 제법 값나가는 것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을 터.

이진한은 마법사들의 요청에 응해 가볍게 모의전을 한 번 해주는 것으로 수십만 골드 어치에 달하는 마나석과 아티팩트들을 손에 넣었다.

물론 결과는 모두 승리, 일대일로 하는 것으론 형평성이 맞지 않으니 마도사급 되는 수준 여럿을 상대로 싸워 압도적인 결과를 내었다.

‘끄나풀은 없어 보이는데.’

그러면서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수한 학구열을 위해 온 이들이 대부분일 테지만, 그 사이에 제국의 간자가 섞여 있을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런 불순한 의도를 지닌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둘째 날이 지났고, 그다음엔 영지에서 내로라하는 검사와 기사들이 뵙기를 청했다.

검호를 상대로 마법으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졌는지 전날보단 적지만 많은 인파가 방문을 청했다.

이진한은 마르딘 공작에게 부탁해 인원을 추렸고 최소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실력자들만 가려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과연 공작가의 영지인지 소드 마스터만 십수 명에 달했지만, 같은 마스터라 할지라도 급이 있는 법.

이진한은 자신에게 대련을 신청한 검사들을 전날의 모의전과 같이 탈탈 털어주었다.

‘이쪽도 그런 기색은 없고.’

검사 쪽도 자신을 떠보려는 기색은 없었다.

엘레오노라 쪽은 자신이 직접 묻기에 그러니 일레이나에게 부탁해 동향을 물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마르딘 공작은 말을 바꾸지 않았고, 엘레오노라의 지휘 아래 오스칼 제국의 세력원 중 인연이 있는 이들과 연락을 취해 물밑에서 소식을 전달하고 있는 듯했다.

“…….”

간혹 이진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미르엘은 제법 말을 걸어왔지만, 엘레오노라는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르딘 영지에 온 지 사흘 차의 밤이 되었다.

내일 아침이 되면 다음 목적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미리 일레이나에게 일정을 알려준 이진한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창문 너머에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즈넉한 여운이 주는 잔향을 즐기고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적막을 깬다. 이미 그녀의 방문을 느끼고 있던 이진한은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들어와.”

닫혀 있던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그 사이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온 엘레오노라는 멋쩍은 표정으로 물어왔다.

“…한 잔 어떠세요?”

와인과 잔 두 개가 그 손에 들려있다. 잠시간 그것을 바라본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걷었다.

“마침 목마른 차였다.”

“다행이네요.”

엘레오노라는 혹시라도 다른 이들이 눈치챌까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왔고 문을 닫은 뒤에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쪼르륵.

영롱한 붉은 빛을 품은 액체가 잔을 채웠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들어 내밀었고, 이진한은 침대에 앉은 채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자 향긋한 와인 내음이 방안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

막 씻고 나온 것인지 엘레오노라의 머릿결은 촉촉했다. 그녀는 잠시간 잔 안에서 출렁이는 와인의 표면을 바라보더니 곧 이진한에게로 고개를 돌려왔다.

“…내일 떠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

“옛 동료들을 찾아가시는 건가요?”

“그러한 목적도 있지만, 너도 알다시피 내겐 제약이 걸려 있다. 천여 년이란 세월이 주는 풍파를 감당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지.”

“그렇죠.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겨우 깨닫게 되더라고요. 어째서 베르너 님이 저를 거절하신 것인지.”

“글쎄.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라.”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거 저희한테는 이미 들켰거든요?”

엘레오노라는 침대 밑으로 두 발을 까닥거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다음으로 갈 곳은 정해두셨나요?”

“북쪽 숲.”

“북쪽 숲이라면…….”

“끝나지 않는 겨울이 계속되는 그곳이다. 《영원》의 계보를 잇는 마녀가 산다지? 아레나 길드에서 받은 정보에 그렇게 쓰여 있더군.”

“그렇군요. 지금으로선 가장 유력한 곳이니.”

“그렇지. 다른 곳은 애매하니까.”

잠시간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곧 엘레오노라는 손안에서 잔을 돌리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고, 창문을 열며 그곳에 몸을 기댔다.

“정말로 다사다난했던 여정이었어요. 지금껏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요.”

정말로 고생했다.

우연찮은 일로 황실을 뒤덮은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일상이 모조리 뒤틀리고 말았다.

황녀라는 이름으로 누리던 모든 것을 잃고 외딴 섬 가운데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겨우 도망친 끝에 근원의 마탑으로 나아갔고 이진한을 만난 것으로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제 인생에 베르너 님 같은 사람은 없었어요.”

엘레오노라는 몸을 돌려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잔을 매만지는 손가락은 서툴기 그지없다. 얼굴은 그 마음을 대변하듯 짙은 홍조가 서려 있었고, 두 눈동자에는 아직 씻어내지 못한 미련이 잔뜩 떨어져 내렸다.

“…뭐, 영영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 간간이 연락도 주고받을 수 있을 테고, 텔레포트 게이트도 있으니까 여유가 생긴다면 이곳에 돌아올 수도 있겠지.”

“…그렇겠죠.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인심 썼다. 애프터서비스로 곤란한 일 한두 개 정도는 싸게 해주마.”

그 말에 엘레오노라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

이진한은 잠시 고민했다.

며칠간 마르딘 공작을 살펴본 관계로 배신할 것 같은 전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조심하라고 조언이라도 남겨두어야 하나 했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닌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제가 위험해지면 언제든 도와주러 오실 거죠?”

“긴급 출장은 추가 금액이 붙는다.”

이진한이 내뱉은 우스갯소리에 엘레오노라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름다운 이별과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방안은 곧 청아한 울림으로 뒤덮였다.

***

【407:32:24】

다음 날 아침.

이진한은 시간의 유예를 흘깃 바라보곤 씩 웃었다.

검호를 쓰러뜨린 것과 더불어 제일 처음 받은 메인 퀘스트인 붉은 가넷의 수호자를 완수한 것으로 지금껏 가졌던 시간의 유예 중 제일 긴 시간을 손에 넣었다. 물론 그마저도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때처럼 시간에 쫓겨 움직일 일은 거의 없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조심히 가세요. 간간이 편지 보내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그쪽도 하는 일이 잘 되길 바랄게요. 이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도움이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그 정도 인연은 있었으니까.”

텔레포트 게이트 앞에서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 옆에 선 미르엘 역시 합세에 이것저것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서로 함께 한 여정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 밀도만은 어느 여행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적당히 긴 해후를 끝낸 뒤, 이진한은 손수 자신들을 배웅하러 온 마르딘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염려 말게.”

이쪽은 긴 인사가 필요 없었다.

그렇기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릴 찰나, 미르엘이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베르너 님, 이것을.”

“수실인가. 잘 쓸게.”

검 손잡이 위에 매다는 장식이었다. 미르엘의 머리카락 색과 닮은 백금색으로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마음이 잘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그러면.”

이제는 정말로 떠나야 할 때였다.

이진한은 자신을 기다리던 일레이나와 함께 텔레포트 게이트에 올랐고, 이내 눈 부신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

엘레오노라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가버렸다. 텔레포트 게이트의 텅 빈 내부가 드러났을 때, 그녀는 가슴 한구석에 마치 구멍이 뻥 뚫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엘레오노라 님.”

옆에 있던 미르엘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러왔다. 공작을 필두로 한 배웅을 나와 있던 이들은 이미 몸을 돌려 떠나간 뒤였다. 아마 일행과 헤어지는 그녀들을 배려해준 것이리라.

“그래요, 정신 차려야죠.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짝.

가볍게 제 뺨을 두들긴 엘레오노라는 힘차게 몸을 돌렸다.

그 말대로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먼저 제국의 칼날을 피해 살아남은 잔존 세력에게 아직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고 마르딘 영지로 집결하라 연락을 보내야 했다.

동시에 요 며칠간 수립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때가 왔다.

제국 황실에 마족이 얽혀 있다면 신성 왕국과의 연계는 필수.

이미 그들과 연락할 수 있는 창구를 알아봐 두었으니 이쪽의 정보를 넘겨 시선을 끌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끝내야 겨우 시작점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앞길에는 가시밭 밖에 펼쳐져 있지 않았으니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여정일 따름이었다.

“…후우.”

이진한과 일레이나가 떠난 하루 뒤의 저녁.

엘레오노라는 수 없이 많이 쌓인 서류를 뒤로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어떻게든 진행되었다.

‘베르너 님과 일레이나는 외숙부가 배신자면 어쩌나 의심하는 눈치였지.’

그녀 역시 생각해본 사안이었다.

외숙부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기사들부터 그러했으니 그냥 넘어가는 것이 멍청한 것일 터.

그렇기에 도움을 구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보았지만, 외숙부가 배신했다는 정황은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신성 왕국에 직접 서신을 보내 도와준 부분에서 엘레오노라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마족과 결탁한 이들과 손을 잡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

똑똑.

-엘레오노라 님. 가주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알겠어요. 바로 갈 테니 전해주세요.”

시종의 부름에 엘레오노라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시각에 부른 것을 보니 신성 왕국 측에서 연락이 온 듯싶었다. 그렇기에 곧장 응접실로 나아갔고, 이내 그곳에 자리한 두 인영을 볼 수 있었다.

“…….”

그와 동시에 엘레오노라의 몸이 덜컥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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