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5.
“미르엘.”
“…베르너님?”
한창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던 미르엘은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몸은 괜찮아? 어제 보니 제법 다친 것 같던데.”
“저는 전부 회복했습니다. 그보다 베르너 님이 걱정입니다.”
검을 내린 미르엘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눈으로 전신을 훑었다. 다행히 공작이 부른 고위 사제가 힘을 쓴 것인지 겉으로 보기에는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없지?”
“다행입니다.”
이진한이 어깨를 돌리며 말하자, 미르엘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무엇을 떠올렸는지 살짝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엘레오노라님이 베르너 님을 찾아가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보지 못하셨습니까?”
“조금 전에 만나고 오던 참이야.”
“…그러면.”
미르엘은 머뭇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 주인이 무슨 제안을 했을 지는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진한이 자신들과 함께 해준다고 한다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 터.
하지만 이진한은 고개를 저었다.
“엘레오노라의 제안은 거절했다.”
“아…….”
짤막한 탄식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더 착잡해진 심경이었다. 자신이 그러할진대 엘레오노라는 어떤 마음일까.
“나도 할 일이 있거든. 아쉽게도 이곳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지.”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털고는 연무장 한쪽에 비치된 수련용 철검을 집어 들었다.
애초에 계속될 수 없는 인연이었다. 퀘스트라도 뜬다면 생각은 해보겠지만, 상태창은 잠잠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기엔 다녀가야 할 곳이 많았기에 안타깝게도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잠시.”
미르엘은 살짝 착잡해진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낙담한 제 주인을 위로하려는 것일 터. 이진한은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홀로 남은 연무장 위에서 자세를 취했다.
“후.”
머리가 복잡하기 그지없다. 내심 엘레오노라의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정에 휩쓸려 판단을 내리기에는 현실이 각박했다.
‘설사 마르딘 공작이 도와준다고 하여도 힘들 테지.’
엘레오노라의 평판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가 제국의 사람들을 회유해서 대항 세력을 조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제국을 부수는 데 도와달라거나, 황성 위로 초월 마법 하나 떨궈달라고 부탁해왔다면 고민했을 터다.
하지만 자신 역이 영원의 결정을 모아야 한다는 목표가 있는 가운데, 그녀의 부탁은 고려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숨을 토해낸 이진한은 잡념을 버린 채 검을 들었다.
연무장에 온 것은 미르엘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일전 검호와의 싸움에서 체득한 것을 풀어내기 위함이었다.
대현자의 눈은 단순히 상대의 정보나 마법만을 분석하지 않는다. 온갖 스킬, 장치, 현상들을 시야에 담고 그에 대한 온갖 해석을 내놓기에 감히 현자란 이름이 붙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했었나?”
검성류 오의 아라크네(Arachne)
제 주위의 권역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 하는 측정법. 검호의 모든 검결은 아라크네의 선을 따라 이어졌다. 즉, 이 구간만 파악할 수 있다면 겉으로나마 흉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카라반과의 싸움으로는 거의 미동도 없던 검사 클래스의 숙련도가 검호와의 싸움으로 대폭 올랐어.’
초월지경에 다다르기 위한 원류에는 검호 쪽이 더 수준이 높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아예 검호의 검술을 훔치기로 했다.
천천히, 그와 싸웠을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기운이 가득하다. 처음엔 익숙한 검술이 아니라 그런 듯했지만, 그는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검이 문제군.”
데미안의 사용했던 것은 보통의 것보다 더 길고 굴곡진 카타나. 이진한은 손에 쥔 수련용 검을 제자리에 돌려놓고는 인벤토리를 뒤졌다.
척.
새파란 날을 지닌 카타나가 그 손에 쥐어진다. 그토록 격렬한 싸움을 벌였건만, 신기하게도 카타나의 도신에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신도(神刀) 무라마사(村正)」────
남해도(南海島)의 이름 없는 명장이 만든 카타나로 휘어지거나 흠집이 남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종류: 카타나
등급: 신도(神刀)
내구력: -
특성: 자가치유, 불굴(不屈)
“무라마사라.”
일본에 유명한 도 이름이 아닌가.
데미안이 자신을 사무라이 일족이라 칭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아무래도 서대륙 남해 쪽엔 일본의 문화를 본 딴 나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묵직하네.”
이진한은 무라마사를 가볍게 휘둘렀다.
마나를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시퍼런 청광이 허공에 남으며 날카로움을 일으킨다. 신도(神刀)라는 이름답게 그 위세가 묵직한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등급으로 따지면 용아청성창이랑 비슷한 건가. 구하기 힘든 수준인데 잘 됐네.”
사실 공작에게 받은 보상보다도 이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와 같은 수준의 무기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수준이다. 용살검 같은 특성화 무기를 제외하고 용아청성창이나 듀란달 같은 무구는 그야말로 천만 단위가 넘는 금액이었으니.
이진한도 그것들을 구하느라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쉭, 쉬익.
무라마사로 데미안의 움직임을 따라 하자 제법 그럴듯한 태가 나왔다.
그렇다 한들 실전에서 사용할 정돈 아니지만, 이런 행동이 쌓이다가 우연찮은 계기와 맞닥뜨린다면 대마도사에 도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검사 클래스의 초월지경인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엘레오노라가 이곳에 당도한 이상 오스칼 제국도 이제 경거망동하지 못하겠지.’
그녀가 마르딘 공작의 비호 아래 들어선 이상 황녀 추격건은 제국과 제국 양측 사이의 일이 되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함부로 암부를 보내지도, 검호 같은 강자를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손에 검호라는 막강한 카드가 패배해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쪽도 나름대로 타격이 있으리라.
[검성(劍聖)이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는 시퍼런 검광 사이로 상태창 끝자락에 자리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검성이라.”
검호의 스승이자 제국 최강의 검사.
자신의 제자를 쓰러뜨려서 그런 것인지 이쪽의 존재를 인식한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 한들 당장 닥쳐오지는 않을 터.
하지만 주시하고 있단 복선이 깔렸으니 그에 대해 대비는 해놓아야 했다.
척.
카타나를 휘두르는 것을 멈춘 이진한은 천천히 그것을 수납했다.
적들에겐 자신의 주력이 마법인 것은 알려져 있다.
대규모 전투나 난전이라면 충분한 효과를 보겠지만, 저번과 같이 안티 매직 쉘 같은 충분한 억제제가 준비되어 있다면 곤욕을 치룰 터.
거기에 검호 같은 어중간한 상대가 아니라 검성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실력자가 나선다면 이번엔 정말로 처참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머리 아프네.”
미래에 대한 대비는 많이 해도 모자란 것이지만, 생각이 많아지니 오히려 두통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어찌 되었든 엘레오노라가 마르딘 영지에 온 이상 오스칼 제국으로서는 무언가 움직임을 취하기에 부담스러우리라.
검호의 출진도 공식적인 일이 아니었으니 자신에게 복수한다고 달려들 가능성도 작을 터. 설사 그런다고 하면 이번에야말로 깡그리 몰살시켜주면 그만이었다.
“왜 머리가 아파요? 아직 덜 나았어요?”
“…깜짝이야.”
느닷없이 연무장 입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진한은 살짝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일레이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봐왔다.
“제 기척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면 아직 심각한 거 아니에요?”
“잠깐 다른 생각 중이었어. 그나저나 마탑이랑 연락은 잘 됐어?”
“네. 했어요. 비공식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쪽의 일을 공로로 인정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마르딘 공작이 직접 학파에 감사를 전해 그런 것 같아요.”
“그래? 잘됐네. 그러면…….”
이진한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무언가 뚝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와 일레이나 사이로 뭉툭한 파장이 번졌고,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 뭐죠?”
“약속대로 맹약은 여기서 끝이다. 이만 떠나도 좋아.”
이진한은 살짝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별은 단호해야 하는 법.
앞으로 자신이 지나갈 여정은 아마 이전보다 더 혹독할 터.
그런 곳에까지 그녀들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
다만, 일레이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러곤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와 이진한의 멱살을 잡고 그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떠나라는, 건가요?”
“…뭐, 왜 그래? 애초에 그런 계약이었잖아!”
“그래요, 처음엔 그랬죠. 저는 어리석은 황녀나 우둔한 기사하고는 달라요. 나름대로 주제 파악도 잘하고 분위기도 잘 읽어요. 그러니.”
일레이나는 이진한의 얼굴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이전보단 나아졌지만, 아직 그림자가 드리운 눈가 안으로 서늘한 안광을 내뿜는 보랏빛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단숨에 빼앗아 버렸다.
“당신이 왜 엘레오노라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다음엔 저까지 떠나보내려는지도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거든요?”
일레이나는 확신했다.
베르너는 검은 현자의 계승자로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보편적으로 자신 정도의 마도사면 굉장히 든든한 전력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내칠 정도이니 필시 범상치 않은 시련을 동반한 것이리라.
툭.
멱살을 잡은 손을 놓은 일레이나는 천천히 몸에 마나를 둘렀다.
마도사 급이 발하는 파장이라면 예민한 이들이 눈치챌 법만도 하지만, 어째서인지 주위는 이때까지와 마찬가지로 고요하기만 했다.
즉, 소드 마스터에 도달한 강자들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수준급에 달한 마나의 컨트롤이라는 이야기.
“어때요? 저는 당신 뒤에서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그러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미들턴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괄목할 만한 성장세이지 않은가.
“누누이 말했지만, 이터널의 애머시스트라는 이름은 거저먹은 게 아니니까요.”
“그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으니까 믿어드려야지.”
“그래요. 그러니까 기운 좀 차려요. 검호도 쓰러뜨리고 여기까지 잘 도착했는데 계속 꿍해 있는 것 같아서 좀 그랬어요.”
“내가?”
“네. 아까 여기로 오면서 엘레오노라랑 미르엘을 만났거든요. 그쪽은 아에 죽을상이더라고요. 그래도 그렇게 냉정히 거절할 지는 몰랐던 것 같아요.”
“원래 이런 일은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하니까.”
“…정말로 이렇게 끝낼 생각인가요?”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엘레오노라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제일 먼저 하나의 대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르딘 공작이 정말로 그녀의 편인지부터 알아야겠지.”
“…그를 의심하고 계시는가요.”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이제껏 보인 태도에선 허점을 찾을 수 없었어요. 만약 암부와 손을 잡은 상태였더라면 그대로 저희를 인계받는 것이 더 편했을 텐데.”
“뭐, 아직은 의심 단계니까.”
저택을 바라보는 이진한의 두 눈이 가늘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