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4.
“베르너님!”
미르엘은 환한 얼굴로 외쳤다.
정말로 시기적절한 등장이 아닌가. 하지만 그 낯선 모습에 이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베르너님이 아니야.’
강대한 기세를 풍기는 것은 맞지만, 그 의복 위에 새겨진 문양은 조금 다른 것을 의미했다.
“…마르딘 공작가?”
미르엘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알아본 엘레오노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찰나,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괴한들이 암부의 기사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네놈들! 어째서!”
상반신이 함몰되어 바닥에 처박힌 리브레는 비참한 모습으로 절규를 토해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무성한 초목 사이로 거인(巨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익숙한 얼굴에 엘레오노라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외숙부님!”
“쌓인 이야기는 이들을 정리한 다음에 하자꾸나.”
마르딘 공작은 짐짓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고개를 돌리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리브레를 향했다.
“감히.”
“공작, 어찌…….”
쉬이이익─!
리베라 제국의 선봉을 지키는 기둥 중 하나인 마르딘 공작가. 그곳의 늙은 사자는 한창 때의 것과 비교해 전혀 꿇리지 않는 패기로 제 검을 휘둘렀다.
리브레는 일그러진 얼굴로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덧없이 베인 그 목은 비릿한 선혈을 흩뿌리며 바닥을 굴렀다.
“처리 완료했습니다.”
공작가의 기사가 암부 전원을 제거했다 알려온 것이 바로 그 직후였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마르딘 공작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우두커니 서 있던 제 손녀에게로 다가갔다.
“정말 미안하구나. 제국 정세가 어지러워 조용히 데려오고 싶었지만, 설마 헤르멘이 저들과 손을 잡고 너를 팔아넘기려 할 줄은.”
“…정말인가요.”
엘레오노라로서는 쉬이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주춤하며 그의 접근을 허락지 않자, 마르딘 공작은 검을 수납하며 두 손을 들었다.
“원한다면 맹세라도 하마. 네게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구나.”
마르단은 정말로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기에 엘레오노라가 제 일행을 돌아보자 일레이나와 미르엘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암부라는 위험은 지나갔다. 아직 공작을 믿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최소 셋. 나머지 이들도 암부의 기사들 따위는 상대되지 않는 강자야.’
일레이나는 냉정히 피아 전력 차이를 분석했다. 괜히 이곳에서 잡음이 일어날 바엔 베르너의 복귀를 기다리며 순순히 따르는 것이 좋을 터.
“마르딘이오. 듣기로는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고. 그런 분께서 손녀를 지켜주셔서 고맙소.”
마르딘 공작은 일레이나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제국 마탑의 소속인 유망한 마도사라 할지라도 그 위치는 천지 차이.
하지만 손녀를 구해준 은인이기에 예의를 표한 것이었다.
보통이라면 황송하단 태도로 마주 예의를 표하겠지만, 아쉽게도 일레이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계약이었으니까 별일 아니에요. 그나저나 저는 무섭군요. 공작께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오시지 않을까.”
“마르딘 가문의 명예를 걸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우선은 장소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소.”
“…베르너 님, 베르너 님이 검호와 싸우고 있으셔요.”
“베르너라면 예의 그 드래곤 슬레이언가. 그나저나 검호라니…….”
엘레오노라의 말에 마르딘 공작은 얼굴을 구겼다. 설마 그 정도의 존재가 나설 줄은 몰랐다는 태도였다.
그들은 서둘러 숲을 빠져나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앞에 닥친 위험을 넘겼다는 것에 다들 한시름 놓았을 때.
쉬이이이익─ 쿵!
하늘에서부터 시퍼런 카타나 한 자루가 뚝 떨어져 내리며 그들 앞에 박혀 들었다.
어찌나 강한 기세였는지 그것을 중심으로 작은 크레이터가 생겨났고, 자잘한 균열이 퍼지며 심상치 않은 여파를 뿜어냈다.
“…이건.”
미르엘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푸른 카타나는 검호를 상징하는 무기.
뇌리를 엄습하는 그 불안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을 찰나, 카타나가 박혀 든 앞으로 한 인영이 지상에 내려섰다.
“미안, 조금 늦었지.”
잘려나간 왼팔, 짓뭉개진 한쪽 눈.
온몸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자상이 가득했고, 상처가 없는 곳을 찾아보기 더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는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몸을 짓누를 정도로 막대한 것이었으니.
엘레오노라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땅을 박찼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 품에 안겨들었고, 이내 엉엉 울며 고개를 파묻었다.
***
[「메인 퀘스트」 ─ ∑불은 가넷의 수호자 달성]
[「서브 퀘스트」 ─ ∑호랑이 사냥꾼 달성]
[악마화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바포메트와의 연결이 강화되었습니다.]
[시간의 유예를 획득하셨습니다.]
...[검성(劍聖)이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마르딘 공작 가문의 저택.
배정받은 널찍한 방 안에서 편히 쉬고 있던 이진한은 가득 쌓인 수십 개의 메시지를 살폈다.
검호와의 싸움을 끝낸 하루 뒤의 날이었다.
이진한은 검호를 쓰러뜨린 뒤 곧바로 엘레오노라 일행을 뒤쫓아갔다.
안티 매직 쉘을 유지하고 있던 마도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신이라면 엘레오노라를 비롯한 자신의 일행을 인질 삼아 제 목숨을 구걸했을 터.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마르딘 공작이 직접 나와 제국 암부의 무리를 처단한 직후였다.
그 뒤로는 엘레오노라를 지켜준 대가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물론 아직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귀족이라는 이름의 인종들은 한 입으로 두말, 세말은 기본으로 하는 족속.
그들과 함께 일을 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호구 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제법 납득이 갈 만한 개연성이었다.
아레나에서 들었던 대로 리베라 제국의 내부는 권력 다툼으로 어수선했고, 그 때문에 공작은 제 수하를 보내 조용히 엘레오노라를 데려오려고 한 것일 터.
믿었던 수하가 배신한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잘 끝났으니 되지 않았나 싶었다.
“…베르너 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문이 빼꼼 열리며 엘레오노라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진한은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사한 빛을 품은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티 한 점 없는 새하얀 피부는 어째서 그녀가 붉은 가넷이라 불리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응. 손실된 육체도 다 붙었고, 상처도 전부 회복했어.”
이진한은 잘려 나갔던 왼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공작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덕분에 교단의 고위 사제에게 치료를 받아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검호와의 싸움에서 받은 내상은 아직 남아있지만, 적어도 겉은 말끔해졌다.
“다행이네요. 팔 한쪽이 없어진 채로 나타났을 때는 얼마가 걱정했다고요.”
“나도 설마 엉엉 울면서 달려들 줄은 몰랐어.”
이진한이 씩 웃으며 말하자 엘레오노라는 놀리지 말라며 입술을 삐쭉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그 위에 놓여 있던 이진한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베르너 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렇지. 내 덕분이지.”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 역시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제일 처음 받은 메인 퀘스트인 붉은 가넷의 수호자를 달성했고, 검호와 싸우면서 생겨난 서브 퀘스트인 호랑이 사냥꾼의 퀘스트도 덩달아 충족했다.
【472:47:32】
시간의 유예는 단숨에 300시간이 추가되어 며칠간 먹고 놀아도 넉넉해질 만큼 여유로워졌다.
더욱이 엘레오노라는 퀘스트 초반에 했던 것이 허언이 아니었던 듯 공작에게 부탁해 후한 보상을 받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건 받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엘레오노라는 제 손목에 찬 에루스탄의 팔찌를 매만지며 물었다.
“용무는 끝났으니 괜찮아.”
이진한은 이미 그 안에 있던 영원의 결정만 추출해서 흡수했다. 팔찌 자체는 그녀에게 있어 귀중한 것으로 보였으니 아이돈이 지니고 있던 스태프 때처럼 깨부수는 일은 지양했을 따름이었다.
“…….”
엘레오노라는 여러 감정이 얼룩지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이곳에 남을 생각이에요.”
“그런가.”
“깊이 고민했어요. 분명 쉽지 않겠죠. 제국은 아직 강성하고 대부분은 그 수뇌가 마족과 결탁한 지 몰라요. 아마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행보는 과감해지겠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나서겠다?”
“…그런 대의가 아니에요. 그저 저 같은 희생자가 나오는 걸 막고 싶어요.”
엘레오노라는 서글픈 미소로 답했다.
그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던가.
자신이 오스칼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고 이곳에 남는 것은 모두 그들을 기리기 위한 일이었다.
“외숙부께서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나서지 못하시겠지만, 이곳에서 천천히 기반을 다잡고 세력을 키우면서 준비할 생각이에요.”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이진한은 단호히 그녀의 말을 잘랐다.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무언가 바뀌는 것은 없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살짝 떨려왔다.
“…전승에 따르면 고대 영웅은 제국과 인연이 깊었어요. 국란이 일어날 때마다 나서며 도움을 주셨다고 했죠. 저는 조건 없는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 위기는 지났고, 이제부터는 제대로 시작해보려고요. 그러니…….”
흐트러지던 호흡을 가다듬은 엘레오노라는 선명한 의지가 깃든 눈으로 그를 바라봐왔다.
“저를 도와주세요.”
“대가는?”
곧바로 되돌아온 대답에 그녀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적어도 바로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엘레오노라는 천천히 준비해온 말을 내뱉었다.
“제 전부를 드릴게요. 엘레오노라 폰 오스칼의 이름, 그리고 제 존재 전부를.”
실상 고백에 가까운 말이었다. 실제로 무릎 위에 움켜쥔 그녀의 두 주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두 귓불은 제 머리카락의 색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니.
“…….”
서로 간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예상치 못한 말에 이진한은 살짝 놀란 듯한 눈치였으나,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오노라.”
“…네.”
“나는 맺은 계약은 어기지 않아. 수틀리면 도망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정말로 그런 적은 없었지.”
“네, 잘 알고 있어요. 뒤에서 지켜보았으니까요.”
“대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보상으로 요구한다. 지금 네 목표는 제국의 수복이지.”
목표와 대가의 저울추가 정말로 균등한가?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에 엘레오노라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말은 번드르르하게 했지만, 실상은 이때까지의 정과 인연에 기댄 부탁이었다.
그래도 내심 바라던 부분이 이었다. 베르너라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시선은 더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의뢰는 거절이다.”
이불을 걷어내며 침대에서 일어난 이진한은 한 번 어깨를 돌리고는 방을 나섰다.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레오노라의 몸은 어떤 미동조차 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