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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63화 (63/210)

◈ 063.

저저적─.

무성한 초목 사이로 허공이 얼어붙으며 시간의 흐름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로 짓쳐들어오던 제국의 기사 몇이 빙결의 여파에 휘말렸고, 누구랄 것 없이 모두 팔다리 한 군데씩이 쪼개지며 바닥을 굴렀다.

“엘레오노라님!”

미르엘은 제 대검을 거칠게 휘두르며 뒤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뇌전의 줄기가 휘몰아치며 허점이 드러난 기사들을 쓸어버렸다.

매캐한 탄내가 자욱해진 가운데 미르엘은 다시 땅을 박차며 숲을 달려 나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가 그녀를 맞이했고, 마찬가지로 숲의 안쪽을 향해 뛰어갔다.

“…윽.”

다만, 일레이나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진한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마차를 버리고 도주하는 선택을 내렸다. 가까이 있던 숲을 지형지물로 삼아 함정을 설치했고, 쫓아온 적들을 맞이했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상대의 추격이 예상외로 거셌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아슬아슬하게 덜미를 잡힐 뻔한 적이 수차례. 그때마다 일레이나의 기지로 격퇴했으나, 바로 직전 제국 측 마도사 두 명과 접전을 벌인 직후 그녀는 번아웃 직전에 다다랐다.

‘제기랄, 비겁한 새끼들. 명색이 마도사면서 두 명이 동시에 닥쳐오다니.

마도사끼리의 싸움은 일반 마법사와 달리 화려한 마법이 나부끼는 난타전이 아니었다.

그저 고속 영창과 복잡한 연산으로 이루어진 현상 개변의 주도권 싸움일 뿐.

서로 권역 내에 마나를 조작해 그 흐름을 빼앗아 오는 것이 승기의 조건이었다.

일레이나는 비슷한 실력 대의 마도사와 승부를 본다면 절대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터널의 애머시스트라는 이름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동급의 마도사 두 명을 상대로는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벅찬 감이 있었다.

“…일레이나,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멈추지 말고 뛰어요.”

엘레오노라의 걱정에 일레이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계속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다행인 점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중상을 입은 마도사들 역시 후퇴했다는 점.

현재 꼬리를 물고 추격해오는 이들은 전부 제국 암부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이대론 얼마 가지 못해서 따라잡혀.‘

엘레오노라는 이를 악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미르엘은 아직 건재한 듯싶었으나, 상대의 전력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상 한 번이라도 발목을 붙잡히게 된다면 곤욕을 면치 못할 터.

일레이나는 명백히 한계에 다다랐고, 자신 역시 이때까지의 싸움으로 반절에 가까운 마나가 소모되었다.

결국엔 시간 싸움이었다.

“저쪽에서 느껴지던 파동이 잠잠해졌어요. 조금만 버티면 베르너님이 오실 거예요.”

엘레오노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다.

쉴 새 없이 지축을 울리던 충격이 잦아들고 귀청을 찢었던 폭음이 가라앉았다. 저쪽의 싸움이 어떤 식으로든 결착이 났다는 것일 터.

엘레오노라는 결코 이진한이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하죠. 사실 그 사람이 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힘들어요.”

일레이나는 파리한 안색임에도 씩 웃으며 그리 자부했다. 하지만 저 앞에 느껴지는 기척에 얼마 나아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멈춰 세워지고 말았다.

“…치밀하게도 준비했네.”

그녀가 이죽거리자 빼곡이 자리한 초목 사이에서부터 암부의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한 명 한 명이 모두 익스퍼트 중상급의 실력자로 최소 미르엘과 같거나 더 강한 이들이었다.

척.

후미에서 일행을 보호하던 미르엘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앞을 나섰다. 그러곤 대검을 움켜잡으며 전위를 지켰고,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보였다.

“끈질긴 놈들.”

그녀는 이를 갈며 짙은 후드를 뒤집어쓴 암부의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찰거머리같이 그지없는 존재들이었다. 마경을 건너 대륙을 넘어왔으니 포기할 법도 하건만, 끝끝내 여기까지 쫓아오는 꼴이라니.

그때, 한 남자가 로브를 벗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주위에 있는 이들과 확연히 다른 기세는 분명 완성에 이른 소드 마스터의 것.

미르엘은 긴장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진한에게 받은 무장을 착용하고 있더라도 상대의 일 검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의 격차였다.

“뭐, 그리 딱딱하게 굴지 말게나 브레스트 경.”

“…레브리 부장.”

옅은 녹색이 감도는 잿빛 머리카락에 굵직한 외모, 그리고 한쪽 눈에 자리한 의안.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미르엘은 금세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불굴(不屈)의 레브리.

암부의 이인자이자 굴지의 실력자인 그가 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군. 무능한 황녀를 호위해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온갖 우연과 행운이 겹쳤다고 해도 정말로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

적막한 숲 가운데로 메마른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미르엘은 그 가운데 뒤쪽에 있던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를 향해 눈짓했다. 어차피 버티면 이득을 보는 것은 자신들이었다. 그렇기에 상대의 행동에 응해 대화를 시도했다.

“당신도 질기기 짝이 없군. 여기까지 왔으면 보내줄 만도 한데.”

“그럴 수야 있겠는가. 죽어간 수하가 수백이 넘거늘.”

“수하가 아니라 망령이겠지. 인간도 되지 못한 버러지뿐이었으니.”

“그들을 어찌 말하는 건 브레스트 경 자네 마음이네만.”

리브레는 씩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자네 가문은 챙겨야 하지 않겠나.”

“…….”

미르엘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가 속한 브레스트 가문은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유서 깊은 백작의 계보를 이었다. 그런 가운데 황녀의 역모와 관련이 되어 출렁거렸고, 적지 않은 여파를 맞았다.

듣기로는 처형된 이도 수두룩하다고 했으니 마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재상께서는 자네의 의기와 능력을 높이 사셨네. 역도로 몰린 황녀를 끝까지 지킨 충정은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 될만한 것이지. 그것이야말로 그분께서 원하는 것이기도 하고.”

“…언제부터 암부가 재상의 개가 되었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리브레는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재상이 아니라 악마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수 있네. 힘과 권력, 그것을 쫓는 것이 사람의 본질이니.”

“그래서 마족과 결탁한 재상과 손을 잡았나.”

“말하지 않았는가. 악마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수 있다고. 마족이라고 못 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더욱이 그들은 훌륭한 지성을 지녔고, 충분히 합리적인 존재들이네. 우리의 노력에 호응해 합당한 대가를 약속했지. 그들보다 실리적인 존재가 있을까.”

“미친 새끼.”

“오스칼 제국은 한층 더 강성해질 것이네. 물론, 일부의 희생을 필요로 하겠지만.”

리브레의 마지막 말에 엘레오노라의 눈이 잘게 떨렸다.

일부의 희생이라는 것은 오스칼 황실의 핏줄을 말하는 것일 터.

황실의 피는 예로부터 신성시 여겨지는 것으로, 무언가의 촉매로는 최상급의 값어치를 지녔다.

실제로 미르엘의 뒤에 서 있던 엘레오노라를 바라보는 리브레의 두 눈이 짙은 탐욕에 서려 있었다.

“미르엘 브레스트경. 이쪽에 오너라. 재상께서 널 원하신다. 그리한다면 모든 죄를 사하고, 브레스트 가문에 끝없이 찬란한 영광을 선사하신다고 약속하셨지. 언제까지 그 차갑고 척박한 북방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닥-쳐!”

쿵.

미르엘이 빙결의 권능을 발하자 땅 밑에서부터 얼음 가시가 솟아오른다. 하지만 리브레는 가볍게 발을 툭 차는 것으로 그것을 파괴하곤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빙결의 기사라 불리건만, 그 성정은 불꽃같군.”

“북방을 지키는 건 브레스트 가문의 자긍심이다. 그리고 나는 엘레오노라님의 기사가 되며 가문과 연을 끊었어. 네 말에 현혹될 이유는 없다.”

“아쉽군. 브레스트 백작은 네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다. 재상의 마음을 돌릴 유일한 구명줄이니. 하지만 네 마음이 그리도 강경하니 안타깝게 됐어. 모두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질 터니.”

“…….”

미르엘은 핏발선 눈으로 대검을 움켜쥐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제 의지를 다지며 그저 그 앞을 지킬 뿐이었다.

리브레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실소를 흘리곤 그 뒤에 있던 일레이나를 향해 말했다.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 하셨나. 과연 그 명성대로 대단한 실력이오. 제국의 마도사 두 명을 패퇴시키다니.”

“마도사라고 할지라도 급이 있어요. 그런 쭉정이들이랑 비교하다니, 그만한 실례가 없군요.”

일레이나는 제 피폐를 감추며 우아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는 저 소드 마스터가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이쪽의 건재함을 보일 때였다.

“이거, 제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같은 제국으로서 그래도 존중해주려 했건만.”

“존중이라,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그쪽 나라에선 목에 칼을 들이미는 것을 존중이라고 하나보죠?”

말로는 그녀를 이길 수 없다 판단한 것인지 리브레는 고개를 돌려 마지막 남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황녀, 언제까지 주위의 희생만을 강요할 생각입니까. 자신을 섬기던 이들을 모조리 사지로 몰아넣고 마지막 남은 기사를 앞세운 것도 모자라 외부인까지 끌어들인다? 이터널 학파의 천재 마도사가 죽는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말은 똑바로 해야죠, 리브레 부장. 우리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는 것은 당신들이에요.”

엘레오노라의 당찬 태도에 리브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그 예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구하러 오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

그녀가 무언의 긍정을 뜻하는 시선을 보내자 리브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라는 분이 이렇게 판단력이 흐려졌을 줄이야. 황실을 섬기는 입장에선 한숨만 나오는 일이군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땅을 짓이긴 그는 헛웃음을 토해냈다.

“상대는 그 검호(劍虎)입니다. 대륙의 내로라하는 강자 100명을 무패로 꺾은 괴물. 드래곤을 쓰러뜨린 것은 분명 칭송할 만한 업적이지만, 검호가 과연 그보다 못하겠습니까. 더욱이 제국의 마도사들이 그 주위에 마법을 봉하는 결계를 쳤으니 목이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겠지요.”

“…그렇다 할지라도.”

엘레오노라는 상대의 말에 현혹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한 믿음을 드러냈고, 리브레는 그것이 드래곤 슬레이어의 시체를 보기 전까지는 깨어지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것임을 알아보았다.

“뭐, 아쉽게 되었습니다. 가능한 성히 붙잡고 싶었거늘.”

그가 눈짓하자 암부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꼬리를 추격해왔던 떨거지들과는 다르게 전부 제대로 된 실력자들이었으니. 그마저도 리브레가 나설 수 있게 힘을 빼는 용도로 사용되는 소모품이었을 따름이었다.

쉬이익-!

짙은 그림자가 거목 사이로 교차하며 들이닥친다. 미르엘은 근원의 마탑에서의 실수를 범하지 않고자 힘을 최대한 온존한 채 싸움에 임했으나, 아쉽게도 그녀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을 따름이었다.

서걱.

순식간에 옆구리를 베이고 어깨를 찔렸다.

브레스트 혈계가 지닌 빙결의 권능으로 숲을 얼어붙게 하며 상대의 접근을 막았지만, 찰나의 시간만 벌 수 있을 뿐 한계는 명확했다.

“…미르엘.”

그녀가 헐떡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엘레오노라가 울먹이는 얼굴로 치료를 시도했다.

하지만 패퇴했던 마도사가 다시 나타난 것인지 허공에 기습적인 마법 공격을 시도해왔다.

“어딜!”

일레이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찰나 제법 힘을 회복한 그녀가 손을 뻗어 마법의 현상 개변을 막아냈지만, 틈을 포착한 리브레가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쉬아아아악-!

농밀한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을 베어 갈랐다.

일레이나는 이미 그 기습을 예견하고 자신의 앞에 두터운 베리어를 쳤으나, 그것만으로는 소드 마스터의 공격을 막기 어려울 따름이었다.

찌이익-!

베리어가 종잇장처럼 찢어진다. 순식간에 지척에 이른 리브레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일레이나게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그것은 제 목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쉬이이익-!

하늘에서부터 무언가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이내 리브레의 몸을 꿰뚫으며 바닥에 박혀들었으니.

“…컥!”

시뻘건 선혈이 사방에 비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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