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62화 (62/210)

◈ 062.

“이것 참. 할 말 없게 만드는군.”

데미안은 옆구리를 의식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한 방을 먹지 않았는가.

“허나, 다신 내게 닿지 못할 것이다.”

그가 카타나를 수납하고는 다시금 발도(發刀)의 자세를 취하자 이진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전에 보았던 그랜드 소드마스터 초월 스킬인 「백야극광(白夜極光)」의 기수식. 데미안이 그의 수법을 눈치챘듯 이진한 역시 상대의 스킬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가설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놈. 초월지경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스킬 중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첫 번째 스킬인 백야극광에 집착하는 것을 보니 아직 그것 하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듯했다.

원래라면 이진한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어야 했다. 대마도사에 오르면 모든 초월 마법의 사용이 해금되지만, 마법의 성공은 별개의 문제. 하지만 그는 이미 모든 클래스의 정점을 찍어본 남자였다.

파스스─!

데미안의 전신으로 엄청난 기백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이 있으면 들어와 보라는 듯한 그 태도에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허공에 마법진이 발현된다. 그것까진 예상한 범주 안인 듯 그저 날카롭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하지만 이진한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블링크].”

그랜드 소드마스터가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는 영역 안으로 들어갈 이유가 무엇인가. 데미안은 그의 호전적인 성격상 싸움을 걸어오리라 예상했지만, 이진한은 그 심리를 의도한 것이었다.

쉬익.

블링크 마법으로 인해 그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바뀐다. 무너져 가는 대지 위에서 광활한 창공으로. 그에게 거리를 준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

데미안 역시 허를 찔렸단 표정으로 황급히 땅을 박찼다. 질풍처럼 질주하며 하늘 위로 솟아올랐지만, 이진한은 기껏 잡은 기회를 살리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가 아니었다.

“만운천뢰.”

용아청성창 고유 스킬 만운천뢰(萬雲天雷).

이때를 위해 아끼고 있던 만운천뢰를 전력으로 펼쳤다. 그러자 마른하늘 위로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내 시퍼런 뇌광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크윽!”

이진한을 향해 치솟던 그의 신형이 달려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가떨어졌다.

그 찰나에 카타나를 휘둘러 번개를 땅 밑으로 훑어버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일순간에 휘몰아친 막강한 화력에 몸이 약간 경직된 것인지 곧바로 움직임에 나서지 못했다.

툭.

용아청성창을 놓은 손안으로 그 머리에 시커먼 결정이 박힌 스태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경에서 쓰러뜨린 벨라시온의 드래곤 하트로 만든 최상위 등급의 스태프로, 초월지경에 오른 자신의 마법조차 그 효율을 3할이나 늘려주는 미친 듯한 성능을 지닌 괴물이었다.

“[초월마법]”

나지막하게 읊조린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데미안은 두 눈을 부릅뜨며 검을 치켜세웠다.

그 상황에서도 날카롭게 기세를 가다듬는 것을 보니 감탄이 나왔지만, 세상에는 벨 수 있는 마법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마도사 초월 마법 멸염지옥(滅炎地獄)

대지 위로 겁화(劫火)가 치솟아 오른다. 일렁이는 시뻘건 불꽃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데미안은 즉시 땅을 박차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촤라락.

“…사슬?”

주박의 사슬. 보랏빛을 띤 그것이 발목과 다리를 단단히 옭아맸다.

데미안은 그 즉시 카타나를 휘둘러 사슬을 끊어냈으나, 뒤이어 휘몰아치는 불꽃의 세례가 닥쳐왔다.

“흡-!”

피하는 것은 늦었다. 찰나에 그런 판단을 내린 그는 전신에 오러를 두르며 저항력을 높였다. 흔히 말하는 호신강기의 수법.

하지만 초월 마법은 단순한 호신강기로는 막아내기 벅찬 것이었다.

파스스─.

옷자락이나 머리카락 어디 할 것 없이 그 끝에서부터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데미안은 급한 대로 거칠게 카타나를 휘둘러 불꽃을 베어냈지만, 멸염지옥의 겁화는 쉬이 꺼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조금의 손해를 감수한다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진한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우웅.

벨라시온의 결정이 시커먼 빛을 발한다. 그와 동시에 이진한의 주위로 수십, 수백 개의 탄환이 떠올랐고 그 끝을 날카롭게 벼리기 시작했다.

“쏟아져라.”

원래였더라면 스치는 것조차 불가해 견제 용도로 쏘아 보냈을 정도의 공격.

하지만 불꽃에 좀먹어가는 지금은 치명적일 정도의 폭격이었다.

쿠구구구궁-!

자욱한 먼지가 일어나고, 지상을 뒤덮은 겁화는 그것마저도 이내 불살랐다.

“질기네.”

대현자의 눈이 그 가운데 비틀거리면서도 아직 서 있는 한 인영을 포착해냈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이죽거리며 다시금 스태프를 기울였다. 무자비하다 할 수 있는 공격의 연속. 하지만 더 이상의 방심은 없었다.

‘강한 건 맞지만, 애초부터 마법을 봉인 당하지 않았더라면 더 빨리 결판났겠지.’

검호 데미안은 분명 인간 수준에선 손에 꼽힐 정도의 강함을 지닌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마도사에 이른 초월지경을 비롯해 온갖 클래스를 마스터한 자신에게 닿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고작 이 정도에 질 거라면 벨라시온한테 잡아먹혔겠지.”

이진한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섰다.

천천히 스태프를 휘두르자 멸염지옥의 불꽃이 사그라들었고, 황폐해진 그 가운데 데미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꼴이 말이 아닌데?”

데미안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형형했던 푸른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다. 얼굴은 눈과 함께 반이 녹아 일그러졌고, 한쪽 귀는 떨어졌는지 흔적도 없다. 검을 든 오른팔은 비교적 멀쩡했지만, 왼팔은 어깨째로 증발했고, 두 다리는 살갗이 다 일어나 피를 뚝뚝 흘리며 핏줄과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

데미안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동정심은 일지 않았다. 서로의 목숨을 노린, 죽고 죽이는 싸움이지 않았는가. 실제로 이쪽 역시 죽을 뻔했으니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하나 남은 눈동자에 짙은 살기가 서린다. 그는 눌어붙은 입술을 간신히 열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몰릴 줄은 몰랐지만.”

카타나의 끝은 여전히 날카롭기 그지없다. 겁화에 달궈져서 그런 것인지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자루를 잡은 손에 진물이 뚝뚝 흘러내렸지만, 그것을 놓지 않는 의지는 데미안의 집념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기에 그는 잘 움직이지도 않을 터인 안면의 근육을 움직여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즐겁구나.”

“미친놈.”

이진한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강자와의 싸움을 즐기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월드에 제 인생을 갈아 넣어가며 시간을 투자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저 지경이 되어서까지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제법 존경할 법한 모습이었다.

“뭐, 그리 놀리지 말게. 잘 해봐야 겨우 한 번 휘두를 힘 정도만 남아있을 뿐이니.”

툭.

카타나의 끝이 힘없이 땅에 닿았다.

싸움이 일어난 직후에 처음 있는 일. 천천히 그의 상태를 가늠하던 이진한은 데미안이 정말로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하지.’

상처 입은 맹수 운운이 아니라, 저만한 강자가 모든 것을 끌어모아 생의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것이다. 그 간절함의 간극은 이쪽과 차원이 다를 터.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보게. 어디로 귀결될지는 미완(未完)이나, 이전처럼 쉬이 피할 수는 없을 테니.”

“…….”

그 말과 동시에 이진한의 얼굴이 움찔했다.

이미 자신은 그 간격 안에 들어와 있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는 날에 그 일격이 턱밑까지 닥쳐올 터. 조금 더 효율적으로 싸우고자 했다면 애초에 지상으로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잔여 마기 ─「♠」─ ●○○○○〕

악마화는 단 한 번의 격돌로 깨어져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그 대치 상황 가운데 또 다른 스킬을 발동시켰다.

광전사 클래스 스킬 「광폭화(狂暴化)」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며 혈류의 속도를 끌어올린다.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막대한 힘에 이진한의 머리는 터질 듯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후욱─.

피부 위를 스쳐 지나가던 공기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변을 장악한 그의 사고 능력이 극한으로 치달은 것이었다.

던전에서 카라반과 싸울 당시에도 겪었던 현상. 그렇기에 이진한은 당황하는 일 없이 두 눈을 오롯이 떴다.

대현자의 눈이 360도, 사각 없이 모든 상황을 살피기 시작한다. 눈앞에 있는 데미안의 존재를 제외하곤 위험 요소는 없다. 그러니 망설임 없이 변수를 제외한 채 그에게로 의식을 집중했다.

그그그극─.

카타나가 닿고 있던 지면을 헤치며 위로 솟구친다. 극한에 다다른 영역에서 저리 움직일 정도라면, 가히 섬전과 같은 속도일 터.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왼손엔 벨라시온의 드래곤 하트로 만든 스태프, 오른손엔 마검 그라나다가 쥐여 있다. 상대는 그것이 마지막 일격이라 했지만, 정말로 마지막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당장의 순간뿐만 아니라 그다음에 이어질 상황까지 머릿속에 넣어 놓아야 했다.

‘그렇다면.’

차분히 시퀀스가 정립된다. 첫 일격, 첫 일격만 막아내면 물 흐르듯 승부를 점할 수 있다. 마검 그라나다를 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어느덧 가슴까지 올라온 카타나의 끝을 향해 휘둘렀다.

쉬아아악─!

마검과 카타나가 닿는다. 끝을 암시하는 서로의 기세는 박빙. 그렇다면 승기를 가르는 것은 의지의 차이였다.

이진한은 그 위로 악마화의 잔여 마기를 모조리 때려 박았다. 어떻게든 초격을 막아내고 마법으로 후속타를 가할 작정이었다.

콰각-!

하지만 검 위에서 느껴지는 압박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무거움이다. 정말로 뒤를 버리고 이번 일격에 모든 것을 담은 것인지 전신의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이런 미친!’

내디딘 왼쪽 무릎이 버티는 것조차 실패한 채 바닥에 닿는다. 겁화로 황폐해져 있던 땅은 그들을 중심으로 무너져 내려 커다란 균열이 생겨날 정도였지만, 찍어누르는 카타나에는 한 점의 미동조차 없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버거워하면 섭섭하니 말이네.”

검성류 오의 귀살(鬼殺)

끼이이이이이익.

검과 검이 긁혀나가며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이한 신음을 토해냈다. 이진한이 왼손에 쥐고 있던 스태프를 버리고 그라나다의 자루를 잡은 것은 본능적인 움직임. 그리고 찰나의 판단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쉬이이이익!

세찬 강풍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커다랗게 뜨인 대현자의 눈조차 그 검결을 온전히 담지 못했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그보다 한 차원 위의 경지. 초월지경에 이르러 신기(神技)에 달한 검이 만들어낸 여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툭.

정신을 차렸을 땐 데미안의 신형이 어깨를 스치며 바닥에 쓰러진 뒤였다.

그는 숨이 다한 듯 바닥에 엎어져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카타나는 빛을 잃은 채 칙칙한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지만, 이진한은 전신을 옭아매고 있는 긴장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후우.”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등줄기가 축축해졌을 때가 돼서야 겨우 데미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그것을 지팡이 삼아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러자 뒤늦은 여파가 그의 몸을 덮쳤다.

픽.

이마가 터져 핏줄기가 흘러내렸고, 뒤늦게 검을 쥐었던 왼팔은 속절없이 떨어져 나가 바닥을 굴렀다.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무리하게 검결을 쫓다가 무리가 온 것일 터.

“…빌어먹을 괴물이구먼.”

이진한은 질린 얼굴로 쓰러져 미동조차 하지 않은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딱 한 치, 정말로 한 치 차이였다.

악마화가 조금 더 일찍 풀렸거나, 스태프를 버리고 검을 쥐는 판단이 늦었더라면 그의 검은 자신의 뇌리를 파고들었을 터.

[악마화가 해제됩니다.]

시야 한쪽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이진한은 지친 몸을 일으켰다. 마검을 뽑아 데미안의 심장에 찔러 넣어 확인 사살까지 마친 그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승리했지만, 패배했구나.”

존경스러울 정도로 강했다.

그 끝에선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한 차원 위의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살려두었으면 필시 골치 아플 적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검호를 죽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잔챙이 뿐일 터. 그렇게 제 자리에 서서 잠시간 호흡을 가다듬던 이진한의 고개가 돌연 휙 하고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