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60화 (60/210)

◈ 060.

이진한이 마차를 떠나간 뒤 일레이나는 침중해진 표정으로 엘레오노라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요?”

“…무얼 말이죠?”

“헤르멘이란 기사는 당신과 안면이 있는 사이에요. 이렇게 마중 나올 정도라면 공작의 심복이라는 거겠죠.”

그런데 오스칼 제국과 손을 잡고 배신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숙부께서 절 내치셨다는 건가요?”

“최악의 경우에는요.”

“…….”

엘레오노라는 두 손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외면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런 가운데 일레이나가 그것을 꼬집어 말하자 마치 기정사실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이후는.”

잠시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어딘가 낙관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외숙부마저 제 편이 아니라면 이제 기댈 곳은 없으니까요.”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 따위는 이미 메말라 버린 지 오래였으며, 도망쳐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삶이었다.

‘…불쌍한.’

일레이나는 어딘가 넋을 잃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동정을 품었다.

엘레오노라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것은 그 행동거지와 말투에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황실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이유만으로 역적으로 몰렸고, 자신을 지키던 수많은 이가 처형당했다.

그 장본인은 동대륙을 적으로 돌린 것과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었으니. 머나먼 길을 돌아 겨우 이곳까지 도달했는데 그 끄트머리마저 수렁이었다니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왜, 당신 편이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슬퍼하고, 또 자조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추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힘껏 발버둥치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임을 일레이나는 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잠시 내려놓았지만,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가 있다고요? 베르너 그 사람도 아까는 뚱한 반응을 보였지만, 당신이나 우리 일이면 발 벗고 나서주었잖아요? 그 정도면 기댈 곳으로 충분하다고 보는데.”

“…그런.”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든든한 버팀목이 있는데, 계속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 말에 미르엘은 조용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제 주인의 손을 잡았다.

엘레오노라는 살짝 붉어진 눈가를 훔치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간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이내 결연한 눈동자로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부탁드려요.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진작 그럴 것이지.”

선명해진 주홍빛 눈동자는 자신이 고향을 떠나던 그 날과 같이 반짝거리고 있어 제법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일단 저쪽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인데.”

일레이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사들은 베르너와 검호의 싸움을 의식한 듯 아직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둘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니.

“결계인가요.”

“관측을 방해하고, 마법을 억제하는 것 같은데.”

“…안티 매직 쉘. 벨데르에서 베르너님이 제게 알려주셨던 술식이랑 비슷해요.”

“그래도 그 사람이니까 뭐. 검호가 별거에요? 드래곤도 못 잡을 실력인데. 이번에도 씩 웃으면서 나오겠…….”

쿵─.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발끝을 타고 흐르며 느껴졌다.

지진과는 사뭇 다른, 명백히 인위적으로 일으킨 여파. 그 심상치 않은 전조에 마차 안에 있던 셋은 가라앉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뿔?”

데미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산양이나 염소의 것을 닮은 형태다. 기다랗게 삐져나와 굴곡진 그 모습은 왜인지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언제부터 그랬지?”

“바로 직전입니다. 검호께서 몸을 돌리시자마자 갑작스럽게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기사들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사람의 머리에서 갑자기 뿔이 솟아오르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흠.”

데미안은 카타나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왜인지 꺼림칙한 느낌이 가득하다. 스승인 검성은 살려서 데려오라 했지만, 자신의 본능은 지금이라도 저 목을 쳐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도사들에게 전해라. 결계를 유지한 채 이 자의 마력을 구속해버리라고.”

아까 한 대 얻어맞아 이상한 경각심이라도 생긴 것이리라. 데미안은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몸을 돌렸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몇 발자국 걸어갔을 찰나.

푸슉─.

등 뒤로 무언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 목, 그리고 바닥으로 정체 모를 것이 흩뿌려진다. 데미안이 손을 들어 제 목에 묻은 것을 닦아내니 새빨간 피가 묻어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곧, 등 뒤로 펼쳐진 풍경에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진한의 몸을 옭아매고 있던 두 기사의 목이 온데간데없이 뽑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사방에 흩뿌려진 피는 그 목에서 화산처럼 뿜어진 것이었다.

“이런!”

주위에 있던 기사들 역시 곧바로 경계하는 태세를 보였다.

제각기 제국에서 이름을 알리는, 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들조차 어째서인지 겁에 질린 얼굴로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끼이익.

이진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분명 잘려 나갔을 터인 두 팔이 멀쩡히 자리하고 있다. 아니, 자라났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눈동자가 시커멓게 변하며 까만 눈물이 흘러나온다. 잠시 뒤 감았다 뜬 눈에는 샛노란 동공이 날카롭게 갈라져 있는 것을 모두가 볼 수 있었다.

“…….”

차갑게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이진한의 전신으로 짙은 마기가 서리며 일렁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내 선명한 살의를 내비쳤다.

“물러나!”

데미안이 카타나를 뽑아 들며 외쳤다.

하지만 그 노력이 부질없게도, 이진한의 몸에서 뿜어진 마기가 마치 칼날처럼 사방을 찢어발기며 폭풍처럼 제 몸을 부풀렸다.

“……!”

기사들은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했다.

그저 허망한 눈으로 자신에게 닥쳐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한 줌의 살덩이와 핏물이 되어 스러졌을 뿐이었다.

가가가각─!

데미안은 카타나를 세운 채로 그 여파를 막아냈다. 온몸이 들리며 뒤로 물러날 정도로 강렬한 기세였지만, 고작 이런 것에 굴한다면 검호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였을 터다.

“신성력 다음은 마기라니. 신성 왕국의 사제들이 들었으면 신성모독이라면서 경기를 일으킬 이야기군.”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켜 마기를 훑어낸 그는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날카로운 눈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뿔, 검게 물든 동공 가운에 마치 짐승의 것처럼 샛노란 눈동자가 기다랗게 찢어져 있다.

그 몸은 마기에 침식된 듯 창백하게 변했으며, 전신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농밀한 마기가 넘실거리며 폐부를 찌르는 살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데미안은 사그라들었던 흥이 다시금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마기에 휩쓸려 죽은 기사들은 이미 뒷전이 되어버린 지 오래. 약자 따위에게는 관심 없다. 그렇기에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눈앞에 자리한 ‘강자’와 마주했다.

철컥.

이진한의 몸에서 솟구친 마기가 그 손에 모여 곧게 뻗은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마검(魔劍) 그라나다(Granada)」

고대 악마인 바포메트를 상징하는 검으로, 계약자와의 연결을 알리는 증표였다.

물론 데미안으로서는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그저 마기를 줄기차게 뿜어내는 것으로 보아 마검의 종류인 것만 짐작했을 뿐.

“오너라. 드래곤을 쓰러뜨린 강자여.”

데미안은 다시금 발도술의 자세를 취하며 몸을 기울였다. 자신의 영역 안으로 그가 들어온다면, 단숨에 그 몸을 일도양단 내어줄 심산이었다.

그렇기에 전신의 감각을 모두 곤두세우며 일 점에 집중했고.

후욱.

“……!”

허무하리만큼 그 움직임을 놓쳐버렸다.

제 귓가에 닿는 숨결에 데미안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카타나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은 여느 때처럼 달리 그것을 뽑아 들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렸고, 땅에 딛고 선 두 다리는 너무나도 과한 힘이 들어가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

그의 귓가로 알 수 없는 언어가 휘몰아친다. 사람이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옹알이하는 것 같았고, 짐승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으며, 여자가 빠르게 속삭이는 것과도 같았다.

“…….”

데미안의 턱 끝으로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해 정신이 혼미해져 간다. 본래라면 호흡을 하지 않아도 한 시간은 거뜬히 물속에서 견딜 수 있는 몸이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붙어 있는 촌각을 견디기 힘들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데미안은 사력을 다해 가까스로 혀를 씹는 데 성공했다. 한계까지 예민해진 감각은 비릿한 피 맛을 놓치지 않았고, 희미해져 가던 그 정신을 각성시켰다.

슈아악!

카타나가 검집에서 뽑혀 나온다. 그 속도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지만, 날카로움은 많이 무뎌진 상태였다.

“…헉, 헉.”

꼴사납기 없는 발도술이었다.

검호란 이름을 달고 이토록 추태를 보인 적이 있을까. 데미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공격을 피해 훌쩍 물러난 상대를 바라보았다.

「…….」

이진한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냐고 비웃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카타나를 쥔 손에 시퍼런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어떻게 내 정신을 현혹했는지 모르겠지만.”

데미안은 잡념을 모두 버렸다.

오직 상대를 베겠다는 의지만을 날카롭게 벼려냈고, 그 끝을 이진한에게로 향했다.

강자와의 싸움을 즐기기 위해 스스로 제한을 두었던 힘이 해방되며 그 구석구석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그 선명한 의지에 반응한 것인지 이진한은 두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툭.

땅을 박차는 가벼운 한 걸음. 그 신형이 연기가 바람에 쓸려가는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지만, 데미안은 더 이상 그런 수작에 현혹되지 않았다.

쿵─!

위에서 내리 찍히는 일 검. 이제는 구도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형국이었다. 데미안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그것을 막아냈지만, 짓누르는 막대한 힘에 두 눈을 크게 뜨며 이를 악물었다.

‘이 무슨 강대한 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력을 드러낸 지금에서도 조금만 방심한다면 훅 넘어가 버릴 정도의 막중한 무게가 카타나 위로부터 눌러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으아아아아아!”

데미안은 괴성을 지르며 카타나를 앞으로 내질렀다. 그 기세가 사뭇 강력했던 것인지 이진한은 살짝 주춤거렸고, 데미안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캉-!

카타나가 마검을 거칠게 튕겨낸다. 마검은 힘없이 뒤로 밀려났지만, 카타나는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 궤도를 바꾸어 이진한의 목을 노렸다.

자신이었더라도 피하지 못하리라.

데미안으로서도 그렇게 생각하며 이 일격으로 끝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진한은 너무나도 손쉽게 몸을 뒤로 눕혔고, 이내 땅을 박차며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궁지에 몰려 자충수를 두는구나.”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하늘 위라면 용을 써도 이것을 피해내지 못할 터.

파아앗-!

카타나 위로 눈부신 백광(白光)이 서린다. 데미안은 발도의 자세를 취하며 이진한을 향해 그것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랜드 소드마스터 초월 스킬

「백야극광(白夜極光)」

누군가 그 광경을 보았더라면, 세상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을 것이다.

검이 휘두른 궤적을 따라 공간 자체가 찢겨 나갔고, 눈부신 빛이 그 공백을 채우며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쉬아아아악─!

그 경계선에 걸친 이진한은 허공을 체류하는 상태에서 마검을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공격이다! 피하거나 흘려낼 수도 없지! 자, 이젠 어떡할 테냐!”

데미안은 조금 전 움츠러들었던 자신을 부정하고자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빛무리가 서린 궤적이 이진한에게 닿았고.

퍼석-.

그는 검은 그림자로 흩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어.”

데미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대지를 훑었다.

그러자 한시 방향으로 이진한의 신형이 사뿐한 모습으로 내려앉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같잖은 술수를.”

빠득, 그의 이가 갈렸다. 도대체 몇 번이나 자신을 농락해야 성에 찬 것일까. 하지만 그 분노도 이내 당혹으로 물들었으니.

파아앗-!

백야극광은 하늘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목표를 잃은 그것은 주위를 뒤덮고 있던 결계와 부닥쳤고, 이내 맹렬하게 폭발하며 그 골조 자체를 뒤흔들어 버렸다.

파각.

아무리 마도사들의 결계가 단단하다고 할지라도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스킬을 막아내는 것은 어불성설. 유리가 깨어지듯 금이 간 그것들은 이내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천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처음부터 이것을 노린 것인가.

이진한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