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9.
검호(劍虎) 데미안.
명실상부 동대륙의 최강자인 검성 요하넬의 제자이자 제국에 내로라하는 검사로 이름을 알리는 청발청안의 남자는 강자와 겨루는 것만큼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땀을 흘리고, 근육이 경련하고, 목이 쉬고, 피가 튀기는. 그것만큼의 유열이 없었으며, 그것만큼의 유희가 없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보상과 조건을 내걸어 각지에 있는 재야의 고수들을 초청했고, 하루가 멀다고 대련을 이어갔다.
검술 실력이야 두말할 것이 없었다. 일찍이 그 재능을 알아본 검성이 검사로서의 모든 것을 가르쳤고, 그 나이가 서른이 지나기 전에 완성에 이르렀다.
어찌 보자면 제 스승인 검성보다 파격적인 성장세를 이루었으나, 검성에게는 자신과 같은 스승이 없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그렇게 데미안이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자신의 저택으로 초청한 강자와 맞붙어 일천 승을 달성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업적을 인정받아 검호(劍虎)라 불리게 되었다.
다만, 그는 재미없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검성의 제자, 검호, 그런 타이틀은 중요치 않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 끝없는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강자. 그러던 차에 드래곤 슬레이어의 이야기를 들었다.
드래곤은 자신의 스승인 검성 정도는 돼야 단신으로 사냥할 수 있다는 강력한 존재. 그런 것을 쓰러뜨렸다는 것은 그 장본인 역시 범상치 않은 실력자라는 것일 터.
그렇기에 굳이 나서도 되지 않을 일에 발을 내디뎠고, 직접 그를 두 눈으로 보고자 대륙 정 반대편에 있는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실력 좀 보자꾸나!”
데미안은 아이가 아끼는 사탕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듯한 표정으로 이진한의 지척으로 순식간에 닥쳐갔다.
제 머리카락의 색을 닮은 푸른 검신 위로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넘실거린다. 그 날카로운 기세에 이진한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내 주력은 마법이라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쾅-!
이진한은 검신을 손으로 바친 채 위에서부터 그어 내린 공격을 막아냈다.
단지 일격을 받아냈을 뿐인데 그 여파가 심상치 않다. 왼쪽 무릎은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고, 검을 쥔 양손은 덜덜 떨리며 힘의 격차를 버거워하고 있었다.
“엄살은 그만두어라. 페르포치아 왕국의 그 던전 내부에서 카라반이라 불리는 마인(魔人)과 싸웠다지. 그때의 네가 보인 힘은 겨우 이 정도를 애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맞댄 검 너머로 섬뜩한 빛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번뜩인다. 이진한은 힘에 겨워 일그러진 표정을 거두곤 이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눈썰미가 제법이네.”
그극─.
검신을 받친 손을 빼내며 검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사선을 따라 맞대고 있던 데미안의 검을 흘려보냈고, 그대로 몸을 팽이처럼 빙그르르 회전시킨 뒤 날카롭게 검 끝을 내질렀다.
캉-!
그야말로 물 흐르는 듯한 일 검이었다. 데미안은 예상한 듯 씩 웃으며 그것을 막아냈지만, 이진한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
데미안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살기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조력자인가. 주변에 숨어 있던 기색은 없었거늘. 생각은 짧고, 반응은 빨랐다.
팅-!
‘단검?’
데미안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방향으로 보아 땅에서부터 솟구친 것이었다. 그림자로 옮겼나? 마법은 제한되었을 텐데? 검 말고 다른 것도 옮길 수 있나?
단 하나의 변수에 오만가지 생각이 그 머리를 뒤덮었다. 이진한은 그 틈을 노린 듯 사각에서 닥쳐왔으나, 데미안은 피식 웃으며 검을 들었다.
“고작 그 정도로 당해주리라고…….”
말을 잇던 도중 그의 두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졌다.
자신에게 닥쳐오던 상대의 신형이 이내 검은 무언가로 허물어져 사라져버린 것. 그와 동시에 다시금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다잡았다.
“움직임이 조잡스럽군.”
쉬아아악─!
잡스러운 기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 데미안의 검이 반원을 그리고 등 뒤로까지 휘둘러졌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목이 가차 없이 베어 갈렸다. 동시에 그는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해서 기대했거늘, 마법을 봉인하면 고작 이 정도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을 사용하게 내버려둘…….
퍽-!
별안간 그의 몸이 들썩이며 두 발이 살짝 허공으로 들렸다.
내장을 직격하는 강렬한 고통이었다. 그는 침이 섞인 피를 내뱉어내면서도 어느덧 제 지척에서 몸을 낮춘 채 주먹으로 옆구리를 가격한 베르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목을 벤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이전과 같이 땅으로 허물어져 형태조차 남지 않았다. 잡스러운 기교였지만, 그것에 당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 그렇다면 어째서 검이 아닌 주먹으로 제 몸을 때린 것인가.
‘더미에 검을 쥐여 준 건가. 본체 쪽은 은밀히 기습하기 위해 맨손으로 한 것이고.’
짧은 시간 그런 판단을 내린 데미안은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태세를 가다듬기 위해 거리를 벌리려 하는 것이었지만, 이진한은 한 번 문 목덜미를 놓아주는 일은 없었다.
쉬이익-!
새하얀 오러 블레이드가 기다란 궤적을 이으며 닥쳐왔다. 데미안은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문득 자신의 꼴이 우스워 물러나는 것을 멈추었다.
“검호라는 이름이 아깝군. 나도 아직 멀었구나.”
팍!
땅 위로 힘차게 발을 내디딘 그가 카타나를 검집에 넣었다.
“…….”
이진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을 검집에 넣다니. 제법 궁지로 몰았다고 할 수 있는 지금 자세를 바꿔 쥔 것은 페이즈가 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는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승기를 잡았을 때 몰아쳐야…….
서걱─.
서늘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몸을 내뺐다.
하지만 앞으로 달려가던 중이라 반응이 늦었고, 미처 벗어나지 못한 왼팔이 휘말리고 말았다.
툭.
마치 자로 재어 베어낸 듯 균일한 단면으로 잘린 팔이 날아가 바닥을 구른다. 상처로부터 피가 새어 나와 줄줄이 흘러내렸지만, 이진한은 그것을 돌볼 여유도 없이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파가각-!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 위로 깊은 자국이 파인다. 슬쩍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데미안은 제 자리에 서서 살짝 몸을 기울인 자세로 여전히 굳게 닫힌 검과 검집을 쥐고 있었다.
“카타나에 이어 발도술이라니.”
컨셉 한 번 빌어먹게도 확고하지 않은가.
“대단한 반사 신경이군. 목을 노렸건만, 달려오는 와중에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해내다니.”
“그쪽이야말로. 오장육부가 비틀리는 충격일 텐데 잘도 서 있네.”
이진한으로선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것으로 장기가 망가져 큰 내상을 입었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그랜드 소드마스터는 몸뚱어리가 쇠로 되어 있는지 잠깐 비틀거린 것을 끝으로 전부 회복한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번엔 더미가 아니라 진짜인가 보군. 참으로 다채롭기 그지없어. 이 검호의 눈조차 현혹할 정도라니.”
“칭찬도 해주다니. 더럽게 고맙네.”
이진한의 이죽거림에 데미안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진심일세. 나는 강자를 존경하고 좋아하지. 검호란 거창한 이름을 얻은 것도 천 명의 강자와 싸워 승리한 업적 덕분이니.”
“나랑도 제대로 싸우고 싶으면 마법의 제한을 풀어주던가.”
“음. 그건 안 될 소리군. 나는 공사를 철저하게 구분한다네. 혹시라도 자넬 놓치게 된다면 스승님께 면목이 없거든.”
“어처구니가 없군. 천 명이랑 싸웠다는 것도 어디 팔이나 다리 한 곳씩 묶어놓고 했나 보지?”
“…뭐, 그리 불평하는 것도 어쩔 수 없네만.”
데미안은 씩 웃으며 다시금 카타나를 쥐었다.
“이렇게 싸우는 것도 제법 재미가 있어서 말이야.”
슈와아악-!
질풍이었다. 데미안을 중심으로 뿜어진 무색이 칼날이 마치 질풍처럼 쇄도하며 사방을 갈가리 찢기 시작했다.
이진한은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쫓아오는 바람보단 빠를 수 없는 노릇. 검을 앞으로 세우며 팔라딘 클래스의 스킬인 대천사의 가호를 온몸에 둘렀다.
“가호? 아니, 신성력인가? 어찌 이 선명한……!”
새로운 능력의 발현에 오히려 신이 난 것은 데미안이었다. 그는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발도술의 자세를 풀고는 직접 땅을 박차며 이진한에게로 쇄도했다.
음속을 뛰어넘는 질주. 대천사의 가호로 이루어진 날개 안 속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이진한은 하나 남은 오른팔로 검을 움켜쥐었다.
‘생각해라,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마법이라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봉인 당했지만, 아직 그에게 허락된 클래스는 수도 없이 많았다.
이전과 같이 마스터 어쌔신 클래스를? 아니면 광전사 스킬인 광폭화를 킨 다음 사생결단을? 그것도 아니라면…….
머릿속이 복잡했다. 눈앞의 검호뿐만 아니라 이쪽에서 일어난 싸움을 틈타 슬슬 마차에 접근하고 있는 제국의 기사들 역시 신경 쓰였다.
“한눈을 팔 여유가 있는가?”
어느덧 코앞까지 이른 데미안이 히죽 웃으며 카타나를 그어 내렸다. 그러자 대천사의 가호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 한다. 마치 빛무리가 흩날리는 듯한 광경이었지만, 둘의 시선은 서로의 눈을 향해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진한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주력인 마법을 봉인당 한 이상 당장 이 녀석을 막을 방도를 자력으로 갈구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은 채 땅에 두 발을 딛으며 검을 휘둘렀다. 잘려 나간 왼팔에서 흩날리는 핏방울이 점점 더 격해졌지만, 혀를 깨물어가며 저항했고 물러나지 않았다.
“제법 애를 쓴다만.”
데미안은 이진한의 끝을 보았다.
결국 여기까지였다. 제법 흥미가 동했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드래곤 슬레이어란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보긴 힘들었다.
여기서 더 추해진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처음으로 전력을 다했다. 시퍼런 섬광과 함께 상대의 검을 일도양단했고, 그다음엔 제 로브 안에서 새로운 검을 꺼내 들려는 오른팔을 날려버렸다.
끝으로 검을 세워 그 가슴을 찔러 갔으니.
푹─.
살갗을 찢고 뼈를 부순 검 끝이 땅을 파고든다. 바닥에 널브러진 이진한의 몸 위에서 데미안은 씩 웃었다.
“뭐, 짧지만 제법 재미있는 싸움이었다. 나머지는 제국으로 돌아가서 듣는 것으로 하지. 검성께서도 너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계신다.”
“…….”
이진한은 가쁜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입안에 고인 피가래를 뱉어냈고, 신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그래, 쉽게 가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지.’
마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며 최악의 가정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정하긴 했다.
만일 지금의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강자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도망칠 경우엔 일행을 전부 버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 버릴 것이었으면 동행하지도 않았으니 논외.
그렇다면 이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떻게든 사력을 다해 싸워?
아니, 애초에 방향을 잘못 잡았다.
초월지경이라 할지라도 자신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자만했다. 최선책은 정면으로 맞붙는 것을 최대한 피하며 어떻게든 마법의 제한을 풀 궁리를 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토록 맥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터.
인정하자.
더는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갈 방도가 없다.
“…그러니까, 한번 잘 막아봐. 나도 처음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거든.”
이진한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실실 웃자, 데미안은 혀를 한 번 차고는 카타나를 거둔 채 몸을 돌렸다.
“쯧, 정신이 나갔는가. 이 자를 구속하고 황녀의 신병 확보를 서두르도록. 마차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아직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는 마도사가 함께 있으니 주의를 기울이고.”
이 정도면 멀리 타국의 땅을 밟은 값은 충분히 받았다. 그렇기에 발걸음을 옮기려 할 찰나.
“…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짤막한 목소리에 그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기묘한 기시감이 등골을 훑고 지나간다. 아까 베르너가 자신의 옆구리를 가격했을 때와 같은 감각. 그렇기에 데미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뿔?”
기사들이 양옆으로 붙들고 서 있던 이진한의 이마 위. 직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한 쌍의 뿔이 갑작스레 불쑥 솟아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