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8.
【195:05:25】
이진한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시야 한 편에 자리한 시간의 유예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8일이 조금 더 넘는 정도. 하루 이틀 정도를 그곳에서 보낸 뒤 다음 목적지로 떠나기에 충분했다.
「메인 퀘스트」 - 붉은 가넷의 수호자
대략 한 달간의 여정이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알차게도 보냈네.’
제국 암부, 드래곤, 리치킹, 마왕, 고대 마수, 고대 악마까지.
이제 엘레오노라의 신형을 마르딘 공작가로 양도하는 시점에서 튜토리얼이 끝났다는 말과 함께 로그아웃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헛된 희망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로그아웃 되었더라면 이미 더 일찍 하고도 남았을 터. 자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는 상태창의 비활성 항목은 이제까지 변함없이 칙칙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이진한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내부의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엘레오노라는 자신과 반대편의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았고, 미르엘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로 꼿꼿이 앉아 있다.
일레이나는 설득을 포기한 것인지 제 얼굴보다 커다란 책에 파묻혀 주변에 시선조차 보내지 않는 상태였다.
-…정말로 이렇게 끝낼 거예요?
이진한은 일레이나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과는 이제까지 여정을 함께하며 정이 든 상태. 하지만 그것과 이다음의 이야기는 별개의 것이었다.
‘차라리 여기서 헤어지는 게 그녀들에게 더 나은 선택지일 수도 있어.’
이곳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사선을 드나드는 위험을 겪었다. 앞으로의 여정에 그러한 일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바로 직전에 고룡을 쓰러뜨려 달라는 의뢰까지 들어오지 않았나.
만일 이 세계가 게임이었더라면 데리고 다닐 수 있는 데까지 달고 다니다가 고기 방패로라도 삼았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맞아.’
일레이나도 영지에 도착하는 즉시 맹약을 해제해 자유의 몸으로 풀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이미 다음으로 갈 목적지 또한 정해놓았다.
동대륙의 최북단. 사시사철 눈이 내린다고 알려진 「겨울이 끝나지 않은 숲」. 이사벨라가 넘겨준 고대 영웅들의 흔적에서 흥미로운 곳은 많았지만, 이곳만큼 그의 이목을 잡아끈 곳은 없었다.
특히 숲에 사는 검은 마녀라 불리는 존재는 그 이름부터 자신과 연관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이동한다면 충분히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터. 이미 그 이후의 계획은 지난밤에 얼추 세워놓았다.
“…바로 앞에 마르딘 공작가의 기사단입니다.”
그때, 마부석에 있던 헤르멘이 기다리고 있던 일행과 합류함을 알려왔다.
그 말에 엘레오노라는 시선을 돌렸고,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일레이나 역시 고개를 들었다.
미르엘만이 미동 없이 그저 두 눈만 천천히 떴을 따름이었다.
“…….”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대현자의 눈이 순식간에 허공을 뛰어넘어 저 앞을 향했고, 이내 마차를 기다리는 일백여 명의 기사단을 발견했다.
‘과연 공작 가문의 기사단. 한 명 한 명이 최소 익스퍼트 중하급이다.’
단장으로 보이는 이를 비롯해 소드 마스터도 무려 세 명이나 끼어 있다.
그런 이들을 출병시켰을 만큼 엘레오노라를 중요시한다는 것일 터. 곧 그 시선이 단장 바로 뒤쪽의 남자에게 향했을 찰나, 이진한은 두 눈을 감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레오노라. 제국에 있는 검사 중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미남이 있나?”
“푸른 머리카락의 미남이요? 그건…….”
갑작스러운 물음에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할 찰나, 그 옆에 있던 미르엘이 먼저 대답했다.
“검성(劍聖)의 제자인 검호(劍虎)가 그와 비슷한 외모를 지녔습니다. 혹시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옅은 흉터가 있습니까.”
“흉터, 있네.”
“…맞는 것 같습니다.”
장내는 순식간에 긴장으로 물들었다.
공작가에서 마중 나온 기사들 가운데 오스칼 제국의 검호라 불리는 이가 있다는 소리는 명백히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어떻게 하죠? 그 검호란 사람은 강하나요?”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입니다. 듣기로는 몇 년 전에 초월지경에 들어섰다고.”
“…….”
일레이나가 허둥지둥하는 사이, 창틀을 잡은 엘레오노라의 손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공작이 배신한 건가, 애초에 오스칼 제국 측의 농간이었나.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쉬이 생각할 상황은 아니었다.
“…충돌은 피할 수 없어. 어떤 식으로든 이 근처에 사람을 풀어뒀겠지.”
“그렇다면…….”
“정면으로 치고 나간다.”
일단 눈앞에 있는 녀석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마르딘 영지로 직접 찾아간다. 만일 공작 자체가 배신했더라면 그 영지 위로 진홍의 보옥 몇 방 정도 떨어뜨리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옛적에 이런 말이 있었지.”
이진한은 그 말과 동시에 전신에 마나를 가득 피워 올렸다. 인벤토리에서 스크롤을 잔뜩 꺼내 찢으며 마법을 준비했고, 이내 그 막대한 기운을 눈치챈 마부석에서 헛바람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진홍의 보옥」
하늘 위로 시뻘건 태양이 떠오른다. 헤르멘과 디골은 이미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는지 마차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진한은 개의치 않은 채 하늘로 들었던 손을 응집되어 있던 기사단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선빵 필승이라고!”
쿠우우웅─.
이제는 전매특허가 된 진홍의 보옥이 제 존재감을 흠뻑 발하며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보통의 마법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초고속 영창. 어지간해선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지상에 떨어진 태양에 짓눌린 희생양이 될 터.
하지만 상대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타다다닥-!
말 위를 박차고 뛰어오른 검호(劍虎)는 그대로 질풍처럼 대지를 가로질렀다. 이윽고 지상과 태양이 수평으로 걸치는 지점에 도달해 검을 뽑아 들었으니.
파아앗-!
바로 그 앞에 시뻘건 불꽃이 일렁거리는 태양에 있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뒤덮는 눈부신 섬광이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그랜드 소드마스터 초월 스킬
「백야극광(白夜極光)」
너무나도 선명할 정도로 그 존재감을 알리는 초월 스킬에 이진한은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진짜 초월지경이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으레 그렇듯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의 실력은 부풀려지기 마련. 검호라 불리는 사내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지만, 같은 초월급 스킬로 진홍의 보옥을 베어 가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여지는 없는 듯했다.
끼이익.
이진한은 마차의 문을 열고 천천히 밖으로 내려섰다.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평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호와 공작가의 기사단이 보였다.
“너희는 일단 이곳에 있어. 여차할 땐 어디로든지 도망가고.”
엘레오노라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찰나, 일레이나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원거리에서라도 지원할 테니까.”
“그건 좀 든든하네.”
씩 웃어 보인 이진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공작가 기사들은 인상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그 제일 앞에 우뚝 선 검호는 살짝 기괴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무라이?”
옷은 일본풍인 유카타고, 들고 있는 검은 쭉 뻗은 끝이 살짝 휜 것이 카타나의 형태를 하고 있다. 거기에 나막신을 신고 있는 것까지 완벽하게 판에 박힌 사무라이의 모습이었다.
“호오, 그 이름을 아는가. 우리 일족에게만 내려오는 전승이거늘.”
검호는 인상 그대로 호쾌한 성격인 듯했다.
카타나를 제 어깨에 걸친 채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시원시원하게 말해왔다.
“원래는 이런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으나, 다 자네 말 때문에 비롯된 일이니 원망하지 말게나.”
“…그게 무슨 소리지?”
“벨데르에서 말하지 않았나. 자신을 잡고 싶다면 검성이라도 불러오라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승님께서 제법 재미있어하셔서 말이야. 황녀를 데려오는 김에 자네를 제압해 자신의 앞까지 끌고 오라 하셨네.”
“하하.”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냈다.
분명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과의 싸움 이전, 도시를 돌아다니던 중 자신의 뒤를 쫓던 제국 암부의 조직원을 죽이고 그 시신을 태우던 중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것 하나 때문에 이런 거물이 나서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너희는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반기지 않았느냐? 대뜸 이렇게 배신하다니.”
이진한은 검호 뒤에 서 있던 헤르멘과 디골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헤르멘은 어깨를 으쓱이며 전과 달리 가볍기 짝이 없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반갑긴 반가웠지. 수백만 골드짜리 몸인데.”
“공작이 그리하라고 명령했나.”
이진한은 손가락의 관절을 꺾으며 말했다.
여차하면 그 영지 위로 초월 마법 몇 방 떨궈주리라 생각하면서.
“하하하, 공작께선 아가씨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제국 측의 시선이 있어 대놓고 움직이진 못하지만, 내가 네 일행을 안전히 데려오리라 믿고 계시지. 실상은 이미 오스칼 제국에 먹힌 상태지만.”
“…….”
이진한은 시선을 돌려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것은 즉, 원래 오기로 했던 마르딘 공작가 인원은 전부 살해당하고 오스칼 제국 측 병력으로 채워졌다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나는 이 지긋지긋한 영지에 처박혀 기사로 생을 마감할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 기회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아닌가?”
이진한은 전신 가득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저딴 외모가 신실해 보인다며 믿었던 자신이 멍청했다. 가증스럽게 지껄이는 모습을 보니 사지를 갈가리 찢어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키잉─!
이진한이 마법을 발동하려던 찰나, 허공으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의 흐름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낀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자 검호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어이쿠, 이런. 우리가 자네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가.”
“…안티 매직 쉘.”
일정 구역에서 마법의 사용을 제한하는 결계.
마경의 도시 벨데르에서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과 싸웠을 때 그녀의 폴리모프를 풀기 위해 그 자신이 사용했던 마법이었다.
“자네는 대단한 마도사라지. 그렇기에 이쪽도 본격적으로 한번 준비해봤다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마도사를 다수 끌고 왔으니 지금부터 마법을 사용하기는 힘들 걸세.”
탁.
검호의 몸이 기울어진다. 몸의 중심점이 앞으로 옮겨가며 싸움을 준비하는 자세. 이진한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으나, 그 반응에 살짝 늦고 말았다.
서걱─.
허공을 베어 가르는 날카로운 일격에 머리카락 끝자락이 잘려 나가 나풀거렸다. 미처 완벽히 피해내지 못한 것인지 이마가 살짝 찢어져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
훌쩍 뒤로 물러난 이진한은 침중해진 낯빛으로 제 상처를 살폈다.
‘이 녀석은 진짜다.’
카라반과 같은 쭉정이와는 다른 진짜 검사.
마법이 봉인된 상황 가운데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순식간에 급소를 당할 것이 분명했다.
“듣기로는 검도 좀 쓴다던데.”
“……!”
어느덧 지척까지 이른 검호가 히죽 웃으며 놀리듯 말한다. 이번에는 전처럼 순순히 당해주지 않겠다는 것인지 이진한 역시 검을 뽑아 들었으나, 검호는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말하며 카타나를 그어 내렸다.
“마법 수준 정도만 따라갔으면 좋겠군. 너무 약하면 재미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