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7.
아레나와 이사벨라는 곧 심각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만, 무언가의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인지 입만 벙긋거릴 뿐 그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림없지.’
대현자의 눈이 그것을 분석하고, 침묵을 상쇄한다. 그러자 속닥거리던 둘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사벨라, 어쩌지? 일억 골드는 때려죽여도 무린데.”
“…값을 올릴 거는 예상했지만, 일억 골드는 너무 많아요. 지금 오천 골드도 무리해서 준비한 건데.”
“괜히 솔직하게 말했나 봐. 네가 그랬잖아, 내 겉모습은 그래도 이러니까 동정론으로 가자고.”
“설마 드래고니프인 것까지 이야기할 줄은 몰랐죠. 처음에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원래 신파극엔 가족이 최고잖아. 그나저나 어쩌지.”
“당장 일억 골드는 불가능한 게 현실이에요. 오천만 골드를 만드는 데에도 얼마나 걸렸는지 아시잖아요.”
“그, 그럼 차용증을 써줄까?”
“아무리 아레나라 해도 몇천만 골드는…….”
쳇바퀴를 도는 대화 양상에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굳이 돈으로만 준비할 필요는 없다. 그에 상응하는 값어치를 지닌 것이라면 고려해보도록 하지.”
“……!”
그와 동시에 둘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격하게 놀란 듯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을 향했다.
“…어떻게, 유물 급의 아티팩트인데.”
“마법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다더니 사실이었군요.”
이사벨라는 옅은 한숨과 함께 아티팩트를 해제했다.
“…….”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는 주도권이 이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비교적 평온한 표정이다. 다만, 아레나와 이사벨라는 속이 타는 것인지 몇 번이고 입을 우물거렸다.
“…그럼 당신의 말을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 건가요?”
“그건.”
침묵 끝에 나온 말은 터무니없는 억측이었지만, 이진한은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럴듯한 생각들에 말을 멈췄다.
‘정보 길드가 내 휘하로 들어오면?’
어떤 일이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보다. 그곳에서부터 우위를 갖는다면 앞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터.
“순순히 그럴 마음은 있고?”
“글쎄요. 여하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죠.”
이진한의 물음에 이사벨라는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더 모호한 말을 내뱉는다. 자신의 말로 그의 흥미가 동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보인 여유였다.
옆에 있던 아레나는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그 둘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볼 뿐이었다.
“조건을 맞춰준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보지.”
“성의를 보여라, 이 말씀이시군요.”
이사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아직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알겠어요. 이쪽에서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다시 찾아뵐게요.”
“그렇다면 이번 이야기는 여기까지겠군.”
정보 길드를 수중에 넣는 것은 좋지만, 고룡과 싸워야 한다는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은 아직 큰 무리가 따르는 판단. 원만하게 관계를 유지하면 여러 도움도 받을 수 있을 테니 이진한으로서는 아쉬운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찰나, 이사벨라가 깜빡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한가지 서비스를 드리자면 제국 역시 당신들의 움직임을 눈치챘어요. 이미 이곳에 당도한 것은 알고 있을 거예요.”
“조언은 감사히 받지.”
“뭘요, 기껏 만나게 된 드래곤 슬레이어를 정치 암투에 잃을 수는 없으니까요.”
“지원해준다면 더 든든할 텐데.”
“안타깝네요. 강대한 적과 척지지 않는다는 것이 길드의 신조라. 말씀드렸다시피 이 자리를 만든 것도 제법 부담이 가는 일이라고요?”
“엄살은.”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Lv.925 「이사벨라」
아레나 길드 부길드장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경지의 마도사다. 초월지경에 도달할 수 있냐는 또 다른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그 힘만으로도 어지간한 강자들을 꺾을 수 있을 터.
“뭐, 좋은 시간이었다. 나중에 보길 고대하지.”
“모쪼록 살펴 가시길.”
이진한이 방을 나서자 다른 이들 역시 뒤를 따랐다. 곧 정보 길드를 벗어났을 때, 일레이나가 슬쩍 거리를 좁히며 물어왔다.
“일억 골드를 준비해보면 정말로 계약을 받아들이실 거예요?”
그 말에 이진한이 등 뒤를 돌아보니 일레이나나 엘레오노라, 미르엘 역시 모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왜. 같이 싸우고 싶어?”
“뭐, 당신이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죠. 저는 어차피 맹약으로 묶인 관계인데.”
일레이나는 제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의욕을 표출했다.
이진한은 내심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과 붙어 다니며 그 가슴에 헛바람이라도 든 것인가. 실상은 일레이나 백 명이 있어도 고룡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할 진대.
“그때는, 부탁하지.”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기에 매몰찬 말은 하지 않았다.
***
다음 날 새벽.
이제 막 동이 트며 도시가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잠기기 시작했을 무렵, 이진한 일행은 준비를 끝마친 채 식당 한구석에 앉아 공작 가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엘레오노라는 싱숭생숭한 표정이었다.
막상 이곳에 왔지만, 이게 맞는가 고민이 들었다. 이대로 공작가에 도착한다면 높은 확률로 베르너와 헤어져 그곳에 남게 될 터. 자신은 정말로 그것을 바라는 것인지 아직 결정 내리지 못했다.
“왔군.”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있던 이진한이 고개를 들자, 식당의 문이 열리며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이진한 일행을 발견했고 천천히 다가와 그 앞에 섰다.
“증표를.”
“…여기 있어요.”
짤막한 말에 엘레오노라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황가의 문양이 찍힌 반지를 보였다. 그것이 진품임을 확인한 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로브의 모자를 걷으며 그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마르딘 공작 가문의 기사인 헤르멘이라 합니다.”
“디골입니다.”
둘 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해당하는 강자였다.
헤르멘은 옅은 금발을 지닌 시원시원한 인상이었고, 디골은 짧은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굵직한 외모였다.
“…….”
둘의 얼굴을 본 이진한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여기까지 왔는데 또 배신 플래그가 서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둘 다 눈동자가 맑고 경건한 태도인 것을 보니 뒤통수 때릴 가능성은 현저히 적어 보였다.
“엘레오노라 아가씨를 뵙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랜만이에요, 헤르멘 경. 마지막으로 본 것이 5년은 더 되었죠?”
“기억해주셨군요.”
헤르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엘레오노라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러곤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간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영지까지는 저희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옆에는 제 일행분들인데…….”
“아, 이거 실례.”
헤르멘은 조심스레 엘레오노라의 손을 놓고는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곤 일행을 훑어보더니 이진한을 발견하고는 옅은 미소와 함께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위명은 당연히 전해 들었지요. 설마 근래 유명세가 자자한 분께서 아가씨를 호위해주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베르너다.”
이진한의 소개에 헤르멘은 호감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작께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감사의 표시도 하고 싶어 하시니 함께 오르시지요.”
“사양하지 않겠다.”
이진한은 살짝 들뜬 기분이 들었다.
제국 공작 정도 되는 이가 하는 감사의 표시는 어느 정도일까. 단순히 돈만 주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특색을 생각해 희귀한 아티팩트나 무기 정도는 쥐여 주지 않을까.
그들은 곧 헤르멘과 디골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섰다. 그러곤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고, 아침을 맞이하는 도시를 가로질러 도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곳에서부터 마르딘 영지까지는 사흘거리입니다. 반나절 더 가면 마중 나온 병력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들과 합류한다면 별다른 위험은 없을 겁니다.”
그들 역시 오스칼 제국의 이목을 의식한 듯했다. 그래도 공작가 기사단과 합류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암부라 할지라도 섣불리 손써오지는 못할 터.
“그러면 편히 이야기 나누시길.”
헤르멘은 배려해준 것인지 디골과 함께 마부석으로 옮겨갔다.
마차 안에 남은 것은 원래 일행 넷. 이진한은 창가를 바라보며 휙휙 바뀌어 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레오노라는 아직 수심이 깊은 표정으로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고, 미르엘은 그런 제 주인의 옆에서 조용히 두 눈을 감은 채 등을 꼿꼿이 편 채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정말로 이렇게 끝낼 거예요?”
얼마간 지속된 그 적막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일레이나였다.
마법으로 외부와의 소리를 차단한 그녀는 살짝 화난 듯한 표정으로 이진한과 엘레오노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가.”
“엘레오노라 말이에요. 아직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서요. 당신도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애초에 계약은 마르딘 영지까지 데려다주는 것이었어. 그다음은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아니에요, 베르너님 말씀이 맞아요. 계약은 마르딘 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일레이나가 더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은요?”
최후의 수단으로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던 미르엘에게 말을 돌리자, 그녀는 슬쩍 고개를 들고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저는 엘레오노라 님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일레이나는 이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록 최악에 가까운 첫 만남이라 할지라도 이때까지 함께 고생하면서 나름대로 정이란 것이 쌓이지 않았는가.
‘황녀가 어떻고, 계약이 어떻고.’
엘레오노라는 황녀로서의 이름을 제외하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마르딘 공작가에 남아 오스칼 황실의 타락을 규탄할 구심점이 된다면 황녀로서의 이름을 연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레이나가 보기에 그녀는 단지 두려운 것이었다. 황녀의 책임을, 오스칼 핏줄의 의무를 내팽개치는 것을. 황녀가 아닌 일레이나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문제. 하지만 그녀 자신이 원치 않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베르너의 단 한 마디, 그딴 것은 전부 버리고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 한마디면 속 시원하게 해결될 갈등일 터.
일레이나는 그 말을 해주지 않는 베르너에게 섭섭하고 서운함을 느꼈다.
‘너도 마찬가지야, 미르엘.’
제 주인의 뜻에 따른다고?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인형이 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제 주인이 원치 않는 막중한 짐을 짊어지게 될 가운데, 그저 그 옆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더는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또 그 기사로서의 신념이니 이상한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도 이젠 모르겠어요.”
그 장본인들의 반응이 시큰둥한 가운데 자신 혼자 열 번을 토해봤자 우습기밖에 더하겠는가.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