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6.
“참, 제 소개가 아직이었군요. 아레나의 부길드장인 이사벨라에요. 복장은 이렇지만요.”
이사벨라는 계단을 올라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진한은 잠시 그 손에 얼룩진 핏자국을 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위층을 향했다.
“결계?”
“네. 지금부터 할 이야기들은 제법 기밀을 요하는 주제라서요.”
이진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부길드장 정도 되는 인물이 손님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안쪽에는 그보다 더 윗선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슈우욱─.
그들이 이층에 오르자 마치 물의 표면을 통과하듯 허공이 일렁였다. 마법과는 조금 다른 스킬의 종류였기에 일행이 감탄을 토해낼 찰나, 앞서가던 이사벨라는 문고리를 잡고 밀며 안쪽을 가리켰다.
“길드의 마스터이신 아레나 님이십니다.”
“…마스터?”
뒤쪽으로 엘레오노라가 놀람을 토해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진한은 두 눈에 힘을 꽉 준 채 앞을 바라보았다.
아레나란 이름답게 강한 존재가 튀어나오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자 곧 허공 위로 상태창이 튀어 올랐다.
Lv.658 「아레나」 아레나 정보 길드 마스터
레벨 역시 상당히 높은 축에 속했다. 대략 일레이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근방에서는 제법 위세를 떨치는 경지일 터. 하지만, 앉은키가 상당히 낮았다.
“…아이?”
이진한은 소파에 앉아 있는 대여섯 살은 될법한 소녀를 보고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르엘의 은백색과는 다른 느낌의 새하얀 머리카락, 아직 앳된 모습을 버리지 못한 탱탱한 볼과 더불어 그사이에 휘둥그레 뜨인 새빨간 눈동자는 어딘가 눈토끼를 연상시키게 하는 것이었다.
“음.”
아레나는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을 보며 우뚝 멈춰선 상태였다. 한 손엔 포크를 쥐고, 그 앞엔 반쯤 사라진 조각 케이크가 자리했다. 입가에 묻은 흔적들을 보아하니 조금 전까지 신나게 그 맛을 탐미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머.”
일레이나와 미르엘은 그 이질적인 모습을 보곤 두 눈을 가늘게 떴지만, 뒤따라 들어온 엘레오노라는 그 귀여운 광경에 입을 가린 채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아레나님.”
이진한은 귓가를 스치는 서늘한 목소리에 슬쩍 한 걸음 비켜섰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들어온 이사벨라는 성큼성큼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가늘어진 두 눈으로 제 상관을 바라보았다.
“제가 분명 머지않아 손님들을 모시고 오겠다고 했지요. 아레나님께서도 얌전히 기다리겠노라 그리 말씀하셨는데, 어째서?”
“…아, 아직 점심도 먹지 못하지 않았느냐. 이사벨라 네가 말한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케이크 한 조각 정도는.”
“아레나님.”
아레나는 허둥지둥하며 변명을 내뱉었지만, 이사벨라의 일축에 쥐 죽은 듯 입을 닫았다.
“손님들이 계시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요.”
“…알겠느니라.”
종래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그것이 동정표를 끌어낼 심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사벨라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분이 바로 아레나 길들의 마스터이신 아레나 님이십니다.”
“…흠. 본인이야말로 대륙을 아우르는 정보 길드의 마스터인 아레나이니라.”
“아레나 님.”
“…아레나입니다.”
존댓말로 말을 바꾸는 아레나의 모습에 이진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그 앞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은 채 물었다.
“그래서, 대륙을 아우르는 정보 길드의 마스터께서 무슨 목적으로 우릴 보고자 한 것이지?”
“히끅.”
아레나는 그 모습을 보고 딸꾹질을 흘렸다.
마치 한 마리 야수 같은 모습이 아닌가. 시퍼런 빛이 일렁이는 그 눈동자를 보아하니 절로 목숨의 위협이 느껴졌다.
이사벨라는 그 경직된 모습을 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신해서 말을 이었다.
“우선 여러분께서 원하신 정보들입니다.”
탁자 위에 여러 개의 서류가 올라왔다.
오스칼 제국의 정세부터 이진한이 원했던 고대 영웅들의 유산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조직도까지 상세히 적힌 것들이었다.
엘레오노라가 밝은 표정으로 그것들을 집어들 찰나, 이진한이 손을 뻗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이쪽이 제국 암부에게 쫓기는 상황인 것은 알고 있겠지.”
이미 자신과 황녀의 정체는 들킨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 순순히 정보를 넘겨주며 협력한다? 길드 입장에서는 차라리 오스칼 제국에 비싼 값을 주고 이쪽의 위치를 파는 것이 더 효율적일 테지만, 그렇지 않았다.
‘즉, 이들도 내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
그 주체가 엘레오노라나 일레이나일 수도 있지만, 제국과 척 질 위험을 등한시하고 이쪽과 접촉해온 것을 보니 그 목적이 분명해 보였다.
“맞습니다. 길드 입장에서도 여러분과 직접 접촉하는 것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면서 내린 결정이지요.”
“그렇다는 것은?”
“드래곤 슬레이어께 의뢰를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국과 엮인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조금 안심한 눈치다.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 되는 강자에게 부탁할 정도의 의뢰니, 난이도로 보자면 이쪽이 더 어려울 가능성이 클 터.
“들어는 보지.”
“말씀드리기에 앞서 계약 조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건 먼저?”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는 것은 조건을 듣고 수락을 해야 의뢰 내용을 말해준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목적이기에 이리 뜸을 들이는 걸까.
“마경의 도시 벨데르에서는 마룡(魔龍)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수천만 골드에 해당하는 희귀 원석을. 미들턴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몬스터 군단을 물리치고 리치킹을 쓰러뜨린 것으로 일천만 골드를. 얼마 전 페르포치아 왕국 수도 그르노블에서는 던전에서 깨어난 고대 악마를 쓰러뜨리는 대가로 삼천만 골드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얼추 비슷하다. 잘도 조사했군.”
부수입도 더러 있었지만,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의지에 찬 두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쪽의 의뢰를 달성하신다면 대가로 오천만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의뢰 내용은?”
“계약을 수락하신다면…….”
“그럴 수야 없지. 아쉬운 건 내가 아니잖아?”
“…….”
이사벨라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아레나를 흘깃 바라보았고,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침묵의 맹세를.”
“일행의 대표로 하지. 이곳에서 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외부로 흘러나가게 된다면 목숨으로 책임을 지겠다.”
우웅─.
언약이 성사되며 마나가 공명하자 일레이나를 비롯한 그녀들이 놀란 표정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괜찮겠어요?”
“어디 가서 말할 거 아니잖아?”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맹약이라고 해봤자 일방적으로 목숨을 빼앗기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꼼수, 예를 들어 자신을 대신할 제물을 바치던가, 아니면 교묘하게 그 틈을 빠져나가던가, 아니면 맹약 자체를 파기하는 등 여러 방법이 존재했다.
‘그리고 어디 가서 말만 안 하면 되는 거잖아.’
아레나와 이사벨라는 이진한이 그렇게 빨리 맹약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사벨라 쪽은 이내 헛기침과 함께 정신을 차리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렇게까지 의지를 보여주시면 이쪽도 어쩔 수 없군요. 그러면 아레나님.”
그 불음에 아레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몸은 드래고니프이니라.”
“…드래고니프?”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생소한 단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레이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신기한 생물을 보는 것처럼 아레나를 바라보았다.
“학회에서 들어본 적이 있어요. 드래곤과 드워프의 혼혈이라는…….”
드래곤과 드워프. 약간 생소한 조합에 이진한은 아레나를 바라보았다.
“내 어머니께선 유희 중인 드래곤과 정이 통해 나를 낳으셨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선지 그것을 눈치챈 드워프가 있었느니라.”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외모는 아이의 것처럼 젊었지만, 그 내면에는 수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리라. 이진한은 그것을 생각하며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드래곤은 제 유희가 계획대로 끝나길 바란다. 드워프 일족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쉬쉬하며 넘어가려 했지만, 한 욕심이 많은 드워프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지.”
“실수?”
“유희 중인 드래곤을 이용하고자 했다. 막대한 재화가 욕심난 것인지, 강대한 그 힘이 탐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 유희를 방해받은 드래곤은 유희를 끝내며 일족 전체에 저주를 내렸다.”
서대륙 남부의 대삼림(大森林).
그 한 구역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이들의 생명을 모두 정지시켜 버렸다. 더불어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결계로 뒤덮였고, 그 내부는 수십 년이 지나도 일말의 변화 없이 이전의 모습이 유지되는 동결(凍結)의 저주였다.
“드래곤은 내게 말했다. 제 일족을 되살리고 싶다면 자신을 쓰러뜨리라고.”
“그래서 길드를 만들고 세력을 키운 건가.”
“드래곤 슬레이어는 세기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하는 희귀한 인재이느니라. 우리는 네가 나타났을 때부터 쭉 지켜봐 왔다. 과거를 찾을 수 없지만, 드러난 행보는 파격적이기 그지없었지. 그래서 마침내 결정을 내린 것이노라.”
드래곤, 리치킹, 고대 악마까지.
자신들의 숙원을 달성하기에 충분한 인재라 판단했다. 그렇기에 길드의 자금 전부를 끌어모았고, 오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대가로 내세워 저주를 내린 드래곤의 목을 요구했다.
그렇게 잠자코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진한은 곧 결론을 내렸다.
‘내가 미쳤다고.’
시간을 동결시키는 것은 초월 마법 중에서도 최상위에 이를 정도로 수준이 높은 마법이었다.
드래곤이라고 전부 사용할 수 있었다면 벨라시온 역시 그 마법으로 자신을 압박해왔을 터.
하지만 1, 2 천년 정도 산 어쭙잖은 드래곤으로는 어림도 없었고, 끝내는 이쪽에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고룡(古龍)은 이야기가 달랐다.
마왕이 강한가, 고룡이 강한가.
의미 없는 고민이다. 그냥 둘 다 더럽게 쌔다. 혼자 잡는 건 불가능이고, 자신과 일선에서 같이 활약했던 공략대 전원을 데려와야 어떻게 할 견적이라도 나올 것이다.
‘모든 클래스의 초월지경을 달성하면……. 아니, 그래도 힘들 것 같은데.’
아레나와 이사벨라는 숨길 수 없는 희망에 찬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괜찮겠지만, 자신의 일행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드래곤을 쓰러뜨리고 드워프의 봉인을 풀어달라.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이긴 한데…….”
초조한 마음을 지우며 씩 웃었다.
“날 움직이기에는 너무 적군.”
“오, 오천만 골드다! 세상 어딜 가도 이런 금액으로 의뢰하는 곳은 없을 것이야! 말 그대로 사상 초유의……!”
“일억 골드.”
“…….”
장내로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보통이라면 일단 두 배를 지르고 보는 것이었지만, 이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시간의 유예도 충분하고, 엘레오노라 퀘스트도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다른 퀘스트를 받아들여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쪽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성의를 표한다면, 다시 생각해볼지는 모른다. 생각만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