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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55화 (55/210)

◈ 055.

“…예, 예?”

요새 날씨가 더워져 잠을 설친 탓일까.

귀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기에 리우에라는 무심코 반문했다. 그러자 이진한은 쐐기를 박듯 고개를 돌리며 재차 말했다.

“전부 산다고.”

“…전부요?”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아, 창고에도 남는 물건이 있으면 그것도 사고 싶은데.”

“어…….”

“둘러보면서 기다릴 테니 견적 부탁하지.”

“아, 예! 알겠습니다!”

리우에라는 넙죽 허리를 숙인 뒤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다시는 없을 횡재였다. 그렇기에 그가 허겁지겁 견적을 준비할 찰나, 일레이나가 다가와 헛바람을 토해내며 물었다.

“진짜로 다 사게요? 아니 꽤 좋아 보이는 것도 여럿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다 합쳐 봐야 몇 백만 골드 안팎일 텐데.”

“사실 그게 더 놀라워요. 이런 작은 가게에 이렇게 값어치가 나가는 아티팩트가 많다니.”

일레이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색이 마도사인 그녀도 이 가게에서 파는 아티팩트의 1할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도 하나 확실했던 것은 그 1할도 채 되지 않는 상품들이 전부 제국에서도 쉬이 구하기 힘든 상등품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건 말이야,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야. 사용하지 않더라도 나중에 좋은 값을 받고 넘기면 되니까.”

“…뭐, 어차피 당신 돈이니까요. 저는 스태프 하나면 됐어요.”

“아까 그거?”

이진한은 3층에서 일레이나가 유심히 바라보던 스태프를 떠올렸다.

곧게 뻗은 푸른빛 자루 위로 물결치는 듯한 끄트머리의 마감과 함께 큼지막한 자색 마나석이 달려있었다.

자신이 지닌 것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일레이나가 사용할 수 있는 것 중에선 최상급의 스태프일 터.

“네. 제 머리색이랑도 비슷하잖아요? 왠지 정감도 가고.”

“네 마음에 든다면 그걸로 됐네.”

그 스태프 하나만 하더라도 거의 50만 골드에 달했다. 저 레벨의 무구 치고는 꽤 값이 나가는 것이었으나, 그간 일레이나가 해준 것이 있었기에 군말 없이 사주기로 했다.

“…여, 여기 견적 뽑아왔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리우에라는 구매 물품이 적힌 견적서를 가져와 이진한에게 건넸다.

총 485만 골드.

어지간한 부자라 할지라도 손이 벌벌 떨릴 금액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변방의 가게 하나에서 이 정도 값어치를 지닌 물품들을 팔고 있다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전액 금화로 내지.”

이진한은 인벤토리를 조작해 딱 그 가격에 맞춰서 값을 치렀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일레이나와 함께 가게를 나설 찰나, 리우에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저 손님.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이름?”

어째서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그 시퍼런 눈동자에 리우에라의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로서도 장사한 지 2년 만에 온 첫 손님이 가게의 상품을 전부 구입한 기념비적인 날. 그러니 그 이름 정도는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

이진한은 그런 리우에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렇기에 문을 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베르너, 내 이름은 베르너다.”

다시 결계 밖을 나설 때까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꽤 무게를 잡으시던데요.”

“500만 골드 가까이 썼으면 마지막 정도는 멋있게 퇴장해도 되잖아.”

큰 지출이긴 했지만, 이진한으로서는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상등품의 아티팩트, 그리고 무구와 재료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있었고 다른 곳에 더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벨라시온이랑 카라반의 싸움에서 부서진 갑옷들도 보충했고.’

아쉬운 것은 검의 부재였다.

구매한 상품 중 검도 있었으나, 대부분 흔한 마법검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세간에서는 제법 훌륭한 수준으로 취급받겠지만, 그에게는 그다지 쓸모가 없을 따름이었다.

“마검이 있으니 성검도 다시 구하고 싶은데.”

“미들턴에서 사용했던 것도 성검 종류였죠?”

“듀란달. 들어본 적 있어?”

“음. 생소한 이름이네요. 악마 연구하면서 그 대항마인 신성 쪽도 간략하게 하긴 했는데 겉핥기 수준의 지식이라서요.”

“마왕의 공격으로 수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됐거든. 차라리 새로운 성검을 구하는 게 싸게 먹히겠더라. 혹시 소재를 아는 성검이라도 있어?”

이진한은 골목을 걸어 나가면서도 조금의 기대를 담아 물었다.

성검(聖劍)이라 붙은 이름은 검 계열 중 최고로 꼽는다. 애초에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없어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진한의 듀란달 역시 그가 비싼 돈을 퍼부어 겨우 장만한 한 자루였다.

마검(魔劍)도 그 뒤를 이어 비싼 값어치를 지녔지만, 성검은 마검에 있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성을 지녔기에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세간에 성검이라 소문난 검은 많지만, 대부분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을 뿐 정말로 신성한 가호를 띈 것은 몇 없어요. 그마저도 실존하는지조차 의심을 받고 있고.”

“…그렇겠지.”

이진한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쉽게 손에 들어올 것이었더라면 그리 비싼 돈을 퍼부으면서 작업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뒤이어 흘러나온 일레이나의 말에 두 귀를 쫑긋했다.

“가장 신빙성이 있고, 가능성이 큰 쪽이라면 아무래도 그 성검이겠네요.”

“그 성검?”

“엑스칼리버(Excalibur)요. 이름은 들어보셨죠?”

“…그게 존재한다고?”

“네. 리베라 제국을 기준으로 저희가 있는 곳과 정 반대편인 브리튼 영지에 잠들어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 계승자를 자처하는 팬드래건 가문이 그곳을 다스리고 있죠.”

“하하…….”

이진한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브리튼 영지의 팬드래건 가문. 너무나도 노골적인 설정이 아닌가. 그 영지의 어느 바위 위에는 녹슨 철검 한 자루가 꽂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거긴 킵해놓고.’

지금 당장은 엘레오노라를 무사히 마르딘 영지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목표였다.

“아, 슬슬 시간이네요. 디저트 먹을 여유는 없을 테니 곧바로 길드로 가죠.”

“위치는 알고?”

“아까 오면서 봐놨죠.”

일레이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슴을 내밀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한적한 구역에 있는 한 주점이었다. 정보 길드가 다른 업종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은 소위 말하는 국룰 이었고, 이곳 길드 아레나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운영했다.

이진한이 일레이나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자리하고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찍 왔네.”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거든요. 두 분은 괜찮은 것 좀 발견하셨나요?”

엘레오노라의 말에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 얼마 썼는지 알아요?”

“얼만데요?”

“가게 하나에서 거의 500만 골드나 썼어요.”

“많이 쓰셨네요.”

“…….”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엘레오노라의 표정을 본 순간 일레이나는 자신이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이 사람, 황녀였지.’

동대륙의 패자인 오스칼 제국의 황녀다.

그 자산 자체만 하더라도 족히 몇 백만, 아니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몇 천만에 달하는 것이었을 터.

비교 대상군을 잘못 삼았다는 사실에 일레이나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이미 의뢰를 넣어 놓았어요. 지금은 답변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인데, 베르너님도 의뢰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지. 그렇긴 한데.”

이진한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정오인지라 주점은 한산하기만 했지만, 막상 내부의 분위기는 그러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있는 녀석이나, 그들의 주정을 받아주며 연신 술을 나르는 녀석이나,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시야에 드러나지 않게 몸을 숨기고 있는 녀석들까지.

‘정보 길드에 호위가 있는 건 당연하지만, 이건 비정상적인 수준인데.’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일레이나는 길드에 들어섰을 때부터 슬쩍슬쩍 시선을 보내오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는 알아차린 듯했다.

“여기, 주문 하지.”

이진한이 가볍게 손을 들자, 다른 테이블에 술을 가져다주던 여성이 쪼르르 달려와 그 앞에 섰다.

“네, 뭘 드리면 될까요? 개인적으로는 다낭산 흑맥주랑 베릴 새우튀김을 추천해 드린답니다!”

그녀는 짐짓 활발한 모습으로 말을 건네왔다.

이번엔 일레이나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제 딴에는 제법 좋은 아티팩트로 정체를 가리고 있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대현자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아레나는 일이 한가하나 보군. 길드의 요직을 맡은 이가 이런 변방에 종업원으로 파견까지 나오다니.”

“…어머.”

부정하거나 모른 척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여성은 그저 이때까지 보였던 활발한 분위기를 조금 가라앉힌 채 살짝 놀란 표정으로 제 입가를 가렸을 뿐이었다.

“……!”

이진한의 주위로 앉은 나머지 셋도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종업원인 그녀가 아레나의 간부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원래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접근하려 했는데 말이에요.”

여성은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안쪽으로 들어오시겠어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진한이 거만한 시선으로 되물었다.

“궁금하신 것이 많잖아요. 당신도, 그리고 그 앞에 앉아계신 두 분도.”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들이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주위를 경계할 찰나,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제 기세를 일으켰다.

지축이 흔들리거나 테이블 위에 있던 식기가 떨어진다는 요란한 소란은 없었다.

그저 싸늘한 한기가 장내를 뒤덮었을 따름이었다. 무형의 살기는 그녀의 심지를 갈가리 찢었고, 목덜미를 훑으며 올라와 정신을 파헤치려 했다.

하지만 여성 역시 길드에서 손꼽히는 실력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지만, 어떻게든 의식을 부여잡았다.

물론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흘러 내리는 두 손은 살포시 등 뒤로 감췄을 따름이었다.

“…….”

그 가운데서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해 보인 것은 그녀의 성격을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수하들의 충성심이 대단하군.”

“…이래 봬도 믿음직한 상사랍니다.”

이진한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던 길드의 요원들은 제 상관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도 한 치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기세에 억눌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명령이 떨어진다면 언제든 이쪽을 공격할 수 있게 날카로운 날을 벼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진한의 차분한 표정을 본 여성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그 역량을 잘못 가늠했구나.’

가벼운 기세의 발산만으로 이 정도라니.

대체 얼마만큼의 강자라는 것일까.

“…안내하겠습니다, 위로 드시지요.”

그래도, 만족할 만큼의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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