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54화 (54/210)

◈ 054.

데메드리오 왕국의 도시인 핀달릴은 아침을 맞이해 부산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찼다.

가게는 문을 활짝 열었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청소하거나 산책하는 등 자신만의 방법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진한 일행이 숙소로 정한 여관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러한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저는 곧바로 외숙부께 연락을 보낼게요. 이곳에 도착한다면 마중 나와 주신다고 하셨으니.”

“나랑 일레이나는 도시를 둘러보고 있을게. 겸사겸사 필요한 것도 사고.”

이진한은 인벤토리를 바라보았다.

고인물이라 해서 장비나 재료가 무한한 것은 아니다. 특히 여기까지 오면서 격한 전투를 몇 번이라 치른 탓에 엘릭서나 화살 같은 소모품이 많이 소진되었다. 그렇기에 모처럼 만에 얻은 여유로운 시간을 이용해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 저희는 정보 길드로 갈 생각인데…….”

“그러면 거기서 만나자. 나도 의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알겠어요.”

이진한은 일레이나와 함께 여관을 나섰다.

아침이 조금 지난 시각, 도시는 생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일레이나는 살짝 들뜬 표정으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겼고, 가게 하나를 마주칠 때마다 좌판을 둘러보며 두 눈을 빛냈다.

“데메드리오 왕국은 처음 오는 건데 신기한 게 많네요. 제국에 있을 때보다 가짓수가 더 다양한 것 같아요.”

“제국보다?”

“네. 제국은 그런 쪽으로는 까탈스럽거든요. 격에 맞지 않는 물건은 아예 받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어느 것을 골라도 평균 이상은 한다는 것일 터. 제법 흥미로운 소리였으나, 가끔 그런 꽝들 속에 아주 작은 확률로 대박이 숨겨져 있는 것이 묘미 아니겠는가.

“당신은 뭘 사게요?”

“포션 재료랑 화살 같은 것들.”

촉은 미스릴을 가공해서 만들 수 있더라도, 화살대는 또 다른 이야기다. 그것 하나하나까지 만들고 있을 여유는 없었기에 기성품을 구매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괜찮은 게 있으면 검도 구매하고 싶은데.”

“…그때 좋은 걸 얻었다면서요.”

일레이나가 슬쩍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고대 악마와의 계약을 증표로 검을 받다니. 이건 학술적으로도 굉장히 가치 있는 발견이에요. 의식 쪽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거든요.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전승에 따르면…….”

부전공이 악마 연구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는 신난 표정으로 제 지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잠시간 잠자코 그것을 듣고 있던 이진한은 그런 일레이나를 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거리끼거나 그런 모습은 없네. 그래도 명색이 고대 악마라 불리는 존재랑 계약한 건데.”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죠. 악마라는 이름이 주는 부정적인 울림은 태곳적부터 자리 잡은 거니까요.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부터 보자면 그것 또한 하나의 계약이에요. 마법 역시 세상과의 계약을 토대로 펼치는 현상의 개변이니 그리 다를 건 없죠.”

“…….”

이진한은 솔직히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그럴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 마검(魔劍)의 사용자라는 게 알려지면 골치 아플 수도 있잖아.”

이진한은 월드의 설정을 떠올렸다.

이 세상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마검을 무장으로 착용하고 있으면 성직자 계열 및 그 비슷한 직종 클래스 NPC에게 호감도가 파죽지세로 깎였다.

더러는 저주를 정화해주겠다며 두 눈을 희번덕 뜨고는 달려 들은 적도 있지 않았는가.

“하긴 그렇겠네요. 좋은 검인 건 둘째 치고, 인식이 그러니. 아, 저긴 어때요?”

마도구 점을 발견한 일레이나가 이진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안에 들어가서는 날카로운 눈으로 벽에 걸린 수많은 스태프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옅은 한숨과 함께 주인장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은 가게가 보이질 않네요. 이왕 사는 거 돈 좀 쓰려고 했는데.”

일레이나는 제일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는 스태프를 만지작거렸지만, 성에 차지 않은 듯 아쉬운 얼굴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 직후 무언가를 발견한 듯 두 눈을 반짝이더니, 착각이었다며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이런 작은 도시에 비싼 물품이 있을 리가 있나.”

“그래도 이런 변두리에서 그런 걸 찾아내는 낭만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 뭔지 잘 알지. 그러면 저런 쪽 한 번 둘러보는 게 어때?”

마도구 점을 나온 이진한은 그 앞쪽에 있던 골목을 가리켰다.

“…골목요?”

“보통 그런 걸 파는 상점은 구석진 곳에 숨어 있잖아. 다 쓰러진 건물에서 장사한다든가, 아니면 겉으로는 식당이나 주점인데 아는 사람들만 아는 무구점이라든가.”

“있을 법한 이야기이긴 한데 저런 좁은 골목에 뭐가 있을까요?”

“어차피 엘레오노라랑 약속한 시각까지 한참 남았으니까 허탕 치더라도 그리 큰 손실은 아니잖아?”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곤 대로(大路)를 벗어나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 이런 것은 즉흥적으로 해야 제 맛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정말로 숨겨진 비밀 상점이나 그러한 것이 나타난다면 정말로 작위적인 이야기겠지만, 어차피 남는 시간이니 혹시나 하는 확률에 희망을 거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정말, 당신은 종잡을 수가 없네요.”

“뭐가?”

“하는 행동이요. 어떨 때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더니, 어떨 때는 또 이렇게 기분파처럼 움직이잖아요.”

“사람이 원래 그렇지. 그리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이진한이 씩 웃으며 그리 말하자, 일레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은 만만해졌으면 좋겠어요.”

“어림없는 소리네.”

둘은 시시껄렁한 주제로 잡담을 계속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골목은 밖에서 보았던 모습처럼 별것이 없었고, 그마저도 얼마 들어가지 않아 끝이 났다.

“…뭐, 이게 현실이지만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디저트나 먹을까요? 아까 지나온 곳에 보니까 제법 괜찮은.”

“잠깐만.”

일레이나가 몸을 돌리며 기지개를 켤 찰나,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막힌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왜요?”

“저기 봐봐.”

“아쉽지만 전 이런 농담에 속아주는 유형은……?”

무언가 있다는 듯한 뉘앙스에 일레이나는 다시 몸을 돌려 막힌 골목을 바라보았다. 척 보아도 자신을 놀리는 것이리라 생각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지만, 마도사에 이른 그녀의 눈은 그 너머에 있던 미묘한 이질감을 간파해내었다.

“…결계?”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가 펼친 거네.”

이진한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손을 가져갔다.

대현자의 눈이 그 구조를 해석하며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지 파악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손이 쑥하고 들어가 버렸다.

“어, 어어? 두고 가지 마요!”

이진한이 그대로 안을 향해 들어가자 일레이나 역시 헛바람을 토해내며 뒤를 따라왔다.

결계 안쪽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별 특색이 없어 보이는 가게였다. 삼층 정도의 높이로 외관은 지금껏 지나온 곳들과 그리 차이가 없으나, 주변을 두르고 있던 결계는 잠깐이나마 이진한의 눈을 속여 넘겼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소설이었으면 작위적이라고 한 소리 들었겠군.’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온 골목에 이런 것이 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가녀린 오크」? 기괴한 이름이네요. 무슨 가게일까요?”

“글쎄. 들어가 보면 알겠지.”

이진한은 천천히 그 가게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레이나는 그 왼쪽 팔을 붙잡고는 조심스레 뒤따랐고, 조마조마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끼이익-.

경첩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관리가 덜 됐거나 녹이 슬어 나는 소리가 아닌,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해둔 장치로 보였다.

곧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이진한은 그 가운데서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던 젊은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딸꾹.”

그는 딸꾹질을 내뱉은 청년 너머로 가게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선반에 진열된 물품들은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것들로 가득했으니.

“…이 가게는 환영 인사가 딸꾹질인가 보네요.”

옆에 있던 일레이나가 속삭여 왔을 때, 이진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잭팟이라고.

***

“…….”

리루에라가 「가녀린 오크」의 관리인이 된 것은 이 년 전, 그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였다.

지방에서 이 도시로 올라와 구직 활동을 하던 도중 우연찮게 제안을 받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도 이 정체 모를 가게의 존재 의의를 알지 못했다.

다른 가게들처럼 홍보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 주변엔 인식을 저해하는 결계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렇다고 취급하는 물품이 잡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관리인인 처지에서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그는 가녀린 오크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용도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고용주는 그저 청소와 지정된 시각에 가게 문을 여닫는 것을 말했을 뿐,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1년 차에는 나름대로 책임감에 싸여 공부라도 하려 했지만, 평범한 상인이었던 자신의 지식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예요?”

“모릅니다.”

“그러면 이건?”

“하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건요?”

“…하하.”

그렇기에 자신의 첫 손님 중 한 명인 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성이 선반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며 물었을 때도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듯한 시선을 받는 것은 덤이었으나, 자신이 생각해도 어쩔 수 없기에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

그와 반대로 다른 일행 쪽은 조금 특이했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동자, 말로만 듣던 금발벽안이었다. 외모는 여성 쪽과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남으로, 입고 있는 옷이나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흠.”

그는 마치 제 안방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가게의 1층에서부터 3층까지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돌아보았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깊어진 눈을 하는 것을 보니 상품들의 용도나 값어치를 아는 듯한 눈치였다.

“가격이 좀 비싸지만, 비싼 만큼 값어치는 하는 것들입니다. 두 개 이상 사시면 제 권한으로 일부 품목의 할인을…….”

리우에라는 그 옆에 붙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2년 만에 온 첫 손님이다. 그간 청소만 하면서 돈을 받기 미안했는데 하나라도 팔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녀린 오크에서 취급하는 상품의 가격은 제일 싼 것이 몇천 골드 단위였다.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쉬이 사기 어려울 터.

“1층부터 3층까지.”

하지만 첫 손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부 사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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