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53화 (53/210)

◈ 053.

[사바트의 악마가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

갑작스럽게 떠오른 그 메시지에 이진한은 당황했다.

악마가 계약?

나에게? 갑자기?

궁여지책으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 그 전신에 피어오르는 마기는 미증유의 크기였고,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커다란 몸조차 본체가 아닐 터.

일전에 미들턴에서 리치킹 아이돈의 몸으로 강림했던 마왕 마르바스처럼 그 본신의 아주 일부이리라.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강대한 악마가 자신과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것일까. 몇 번이고 곱씹어봐도 뚜렷한 이유가 나오지 않았기에 이진한은 상태창의 메시지를 건드렸다.

[사바트의 악마가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계약은 쌍방에 속한 관계입니다.

사바트의 악마는 당신이 자신의 계약자가 되는 것을 바랍니다.

사바트의 악마가 원하는 것은 마기입니다.

마족이나 마인의 힘뿐만 아니라 인간의 부정적인 사념 또한 좋은 제물이 될 것입니다.

사바트의 악마는 그 대가로 당신에게 막대한 힘을 부여할 것입니다.

주저리주저리 쓰여 있지만, 마기나 인간의 부정적인 사념을 제물로 바치면 힘을 주는 쌍방의 관계라는 것이었다.

“음.”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지만, 곰곰이 살펴보니 그리 꺼릴 것은 아니다. 그 역시 대현자의 하위 클래스 가운데 네크로맨서나 흑마검사 같은 동종 계열을 익혔다. 악마와의 계약을 활용할 방도는 차고 넘쳤고, 그것이 바포메트와 같이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패널티는 없나? 아니면 적혀 있지 않은 건가.’

계약은 그 가운데 있어서 서로 한치의 숨김도 있어선 안 됐다. 비록 그것이 불공정한 것일지라도 모든 요소를 명시해야 하는바. 하지만 관계성 운운하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패널티나 받게 되는 제약 같은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사바트의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

이진한은 슬쩍 고개를 들어 바포메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안광엔 아직 가늠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마기가 깃들어 있었다.

‘거부하면 다시 날뛰려나?’

게임 속이었다면 옳다구나 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무려 고대 악마라 불리는 존재와의 계약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쪽에 도움이 될 터니 오히려 기꺼웠을 테고, 흑마법 클래스의 새로운 공략을 발견했다며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처한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형국. 여기서 불확정 요소를 더했다간 걷잡을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베르너님?”

미르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두커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그를 불러왔다. 이진한은 괜찮다는 뜻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생각 없이 지르는 건 성미에 맞지 않기는 한데.”

설마 지금보다 더 나빠지겠는가.

“까짓 거 해보지 뭐.”

[바포메트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파아앗-!

그와 동시에 극적인 변화가 눈앞에서 일어났다. 바포메트의 거대한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와 반대로 이진한의 앞으로 기다란 무언가가 점차 형태를 이루며 존재가 확립되었다.

“…검?”

미르엘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허공에 나타나 형태를 이룬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매끄럽게 이어진 검신은 짙은 흑색이었고, 그 손잡이는 얼핏 보면 동양풍의 장식으로 되어 있는 듯했다.

“이건.”

이진한은 그 익숙한 형태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자신들이 던전 안에 있을 무렵, 카라반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모습을 지닌 검이었다.

조심스레 그 자루를 쥐자 대현자의 눈으로 검의 정보가 표시되었다.

「마검(魔劍) 그라나다(Granada)」

그라나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전체적인 수치는 이전 마르바스와의 싸움에서 파괴된 성검 듀란달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는 것으로, 즉시 전력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역시 이게 본체였나.’

이진한은 문득 카라반에 생각이 미쳐 헛웃음을 토해냈다.

인간일 시절에도 명색이 검의 구도자였다. 고대 영웅 중 한 명이었던 《정의》에 패배해 수백 년간 던전 안에서 수련했고, 수명의 한계를 탈피하기 위해 바포메트와 계약을 맺고는 마인으로 탈피했다.

거기에 마검 그라나다를 쥠으로써 그 능력치가 대폭 상승했을 터인데…….

“그게 그 정도면 얼마나 약했다는 거야.”

이진한은 제 상태창을 살폈다.

바포메트와의 계약과 마검의 영향으로 상승한 퍼센테이지는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것은 이미 그의 능력치가 정점에 다다라 있었기 때문. 단순한 수치로만 따진다면 무시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척.

이진한은 마검 그라나다를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악마와 계약했다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손을 털었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 깨우자. 이제 정말로 끝난 것 같다.”

[「메인 퀘스트」 - 어린 왕자 달성]

수많은 보상으로 인한 알림이 쏟아지는 가운데, 선명한 상태창의 글귀가 그의 앞에 자리했다.

***

“솔직히 말해서 크게 아쉽습니다. 전하께서도 뵙고 싶다고 청해오셨는데…….”

페르포치아 왕궁의 마도사인 베르하치는 한껏 아쉬움을 표하며 말끝을 흐렸다.

시각은 이제 막 동이 틀 무렵, 이진한은 수도의 텔레포트 게이트 앞에 서서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다.”

페르포치아의 국왕은 악마를 쓰러뜨린 공훈에 대한 감사와 보상을 빌미로 이진한을 초대했지만, 그는 상처가 중하다는 핑계로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애초에 이야기되어 있던 보상만 베르하치를 통해 건네받았고, 왕성에서 개최되는 만찬이나 연회 또한 참석하지 않았다.

‘싸울 때는 몰라도, 이들이 노출되어서 좋을 건 없으니.’

이진한은 뒤쪽에서 살짝 들뜬 얼굴로 자리하고 있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 공적에 대한 보상을 받음과 동시에 곧바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끼워 넣었다.

악마를 쓰러뜨린 것에 비하면 정말로 사소하고 하찮을 정도의 요구. 페르포치아 국왕은 너무나도 시원하게 모든 절차를 생략했고,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그들이 무사히 이동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레펠경도 대신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상처가 심한가.”

“마기 오염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왕국의 귀한 인재이니 중히 관리 받고 있을 뿐입니다. 사제들이 열심히 치료하고 있으니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싶군요.”

베르하치는 대쪽 같은 베르너의 표정을 보곤 미련을 버렸다. 마음 같아선 왕국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분을 트고 싶었다.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라니.

그야말로 대륙을 아우르는 강자가 아니던가.

마법을 제외하고도 다른 분야의 무력 역시 예사롭지 않은 강함을 보유하고 있으니 연을 쌓고 싶은 것과 별개로도 지식욕이 강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마음을 열지는 않았다.

“그럼, 모쪼록 편안한 여정이 되길 바라지요. 페르포치아 왕실을 대신해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왕실의 손님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손님으로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괜찮으니 부디 부담 갖지 마시길.”

“호의에 감사하지.”

“그럼,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께도 작별을 고하지요. 귀하의 헌신에 왕실은 언제까지고 그 은혜를 기억하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일레이나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을 끝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곧이어 텔레포트 게이트가 활성화되었고, 이내 그들은 눈 부신 빛과 함께 몇 달은 걸릴 거리를 순식간에 뛰어넘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225:14:56】

“…넉넉하네.”

텔레포트 게이트를 빠져나온 직후, 이진한은 오랜만에 세 자리로 채워진 시간의 유예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 안에서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며칠간의 일정으로 유예가 전부 소진되었을 터. 그 이후의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가만. 그러면 유예가 부족할 땐 이런 부류의 던전에 들어가서 버티면?’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해결책이 생기는 것은 아닐 터. 잘못한다면 제2의 카라반이 될 수도 있으니 정말 최후의 상황이 아니라면 자중해야 했다.

“…너는 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냐.”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아주 꿀이 떨어지던데요.”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길을 걸어가던 중 일레이나는 짐짓 부루퉁한 얼굴로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걷어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명성이 있는데 한참 등한시하다가 마지막에만 구색을 갖추는 건…….”

“아니꼬우면 드래곤 잡던가.”

“…….”

일레이나는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진한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자 이진한은 그래도 되겠냐는 얼굴로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올리며 허공에서 흔들었다.

“받은 보상으로 장비 좀 사줄까 했는데, 싫은가 보네.”

“…장비요?”

“그 스태프, 부서지기 직전이잖아. 바꾼다고 해도 마도사 급이면 아무리 싼 거라 해도 몇 만 골드 단위는 할 테니. 뭐, 싫으면 됐고.”

“그렇게 섣불리 판단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요? 저랑 조금 진솔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아앗, 도망치지 말고요!”

이진한이 웃음을 흘리며 일레이나를 놀리고 있을 찰나, 미르엘은 지도를 살피며 제 주인에게 말했다.

“엘레오노라님. 이 바로 앞 블록에 여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자리 잡으면 될 것 같군요.”

“…….”

“엘레오노라님?”

“…어? 어어? 뭐라고 했어?”

“이 앞에 바로 여관이 있습니다.”

“그래? 거기서 묶으면 되겠네.”

엘레오노라는 짐짓 평상시와 다름이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미르엘은 그녀의 심경이 복잡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마르딘 영지에 가까이 와서 그런가.’

원래 계획대로 그곳에 체류할 것인가, 아니면 베르너를 따라 떠날 것인가.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체력 소모가 덜했던 미르엘은 출발 시각보다 한참도 전에 잠에서 깼다.

그러던 중 산책을 하던 일레이나와 마주쳤고, 별생각 없이 시간을 죽이며 잡담을 나눴을 뿐이었다.

사실 미르엘에게 있어 일레이나는 썩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녀가 이 파티에 들어온 뒤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 자체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는 미르엘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계셨다니.’

신하로서 주인된 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자신은 엘레오노라 황녀가 마르딘 영지로 가서 리베라 제국에 망명하는 것을 절대적인 명제로 두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그것밖에 활로가 없었으니.

하지만 그 가운데 베르너라는,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검은 현자라는 변수가 생겨난 이상 선택지가 갈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당신이 어떤 것을 선택하든 따라갈 뿐입니다.’

미르엘은 조용히 엘레오노라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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