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2.
푹.
흰색 말뚝을 나무 기둥에 깊숙이 박아 넣은 일레이나는 고개를 돌려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핏빛 비가 떨어져 바포메트의 몸을 옭아매고 또 무수한 폭발이 일어나 지축을 흔든다. 눈을 깜빡일 때면 시퍼런 낙뢰가 그 위로 부닥치며 번쩍였고 그 뒤로도 무수한 공격이 고대 악마의 몸으로 쇄도했다.
“화려하게도 하시네.”
“그러게요.”
발밑으로 말뚝을 힘껏 밟아 넣은 엘레오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호응한다. 잠시간 저쪽을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나는 짐짓 궁금하단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 베르너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갑자기, 요?”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막, 다른 말뚝을 꺼내 들어 몇 걸음 옆의 땅에 박아 넣으려던 엘레오노라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았었나요? 미들턴에 도착했을 때 베르너님과 만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고.”
“그건 들었어요. 제가 궁금한 건 그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예요. 근원의 마탑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죠? 당신들을 도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물밑에서 황실을 돕는 수호자라던가, 아니면 모종의 계약이 있었다던가.”
“…계약 건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아아, 답답하네! 진짜.”
일레이나는 최대한 돌려 말하며 그녀의 의중을 살피려던 것을 포기했다.
“검은 현자.”
“……!”
그 말에 엘레오노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일레이나는 그녀의 반응에 힘을 얻었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의 계승자 맞죠. 그 본인은 계속 어물쩍하면서 넘어가는데, 이렇게 티가 나는 걸 모른 척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반역도로 몰린 당신을 굳이 도와주는 것도 고대 영웅과 오스칼 황실의 관계성 때문일 테고.”
“…….”
엘레오노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와 베르너는 맹약으로 묶인 관계. 그러니 배신은 하지 못할 터이지만, 이걸 자신의 입으로 알려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렇기에.
“…일레이나라면 어렵지 않게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죠? 그렇게 대놓고 티를 풀풀 내는데.”
일레이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엘레오노라에게는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 말에 호응해주었다.
“궁금한 거 하나 물어도 되나요?”
“베르너님에 대해서요?”
“아니요, 당신에 대해서.”
“…저에 대해서요?”
엘레오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 질문의 저의를 알 수 없었기에 시선을 보내자, 일레이나는 다음 말뚝을 박으면서도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마르딘 영지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머물 건가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엘레오노라는 잠시 말을 망설였고,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글쎄요.”
“갈피는 잡지 못한 거네요.”
“원래라면 마르딘에 남는 게 맞겠죠. 망명의 형태로 리베라 제국에 넘어온 다음 차분히 오스칼 제국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물밑으로 사람들을 모으려고 했어요. 저 말고도 그쪽의 이상한 점을 느낀 이들이 있을 테니.”
“했다는 건?”
“…그렇게 아등바등 발버둥을 쳐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엘레오노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발치에 있던 돌을 툭 찼다.
“저보고 희대의 악녀래요. 분수에도 맞지 않는 황위에 욕심내서 반란을 도모하고, 수많은 이들을 휘말리게 해 제국에 피바람을 불게 했다면서.”
적어도 수백은 죽었으리라, 그녀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선 황실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떠나고 싶은데…….”
“책임감 때문에 차마 그러진 못 하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 하죠. 최소한 오스칼 황실에 마족이 개입했다는 정보는 서면으로 넘겨야 이름에 걸맞겠죠.”
“성가시네.”
“성가셔도 어쩔 수 없어요. 오스칼의 혈통을 짊어진다는 건 그런 뜻이니.”
“뭐, 난들 어쩌겠어요. 맹약에 묶인 몸이니. 아, 이게 마지막 말뚝이네.”
“그러니까 제가 미들턴에서 부탁드렸잖아요. 제 신분을 밝히면서까지. …아, 저도 마지막이에요.”
“미르엘 쪽은 끝났으려나요.”
“끝나고도 남았을걸요. 그쪽은 육체파니까.”
“…그러면.”
일레이나는 손을 들어 하늘 위로 불꽃을 쏘아 올렸다. 말뚝의 설치가 전부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것이 하늘 높이에서 폭죽처럼 터졌을 때, 말뚝이 박힌 곳에서부터 신성한 빛줄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와.”
“또 어떤 걸 보여주려는지.”
엘레오노라가 작게 감탄을 터트리자, 일레이나 역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것들을 살폈다.
신성 마법이라 함은 제 신앙을 촉매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당연히 현상을 ‘개변’하는 마법과는 상극이었고, 마법사는 제 마법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그는 무슨 재주를 부린 것인지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마법들을 구사하며 생전 보지 못한 농밀한 신성력까지 사용하지 않았는가.
학계에 알려지면 큰 파국이 몰려올 정도의 현상이었으나, 그 남자는 그런 행위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내 짐짓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단위 신성 마법을 펼친다고 하셨죠.”
“이때까지 보여준 것만 해도 엄청났었는데, 그 남자가 대단위라고 말할 정도의 것이면 어느 정도일지 예상도 되지 않네요.”
그리 멀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온 바포메트의 모습이 무섭긴 했으나, 그 남자라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그런 믿음이 그들 사이에 공통으로 자리했다.
이윽고 말뚝에서 솟구친 빛이 한점으로 모여들었을 때.
“…엘레오노라님! 일레이나!”
“미르엘?”
수풀을 헤치며 다급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미르엘의 모습에 엘레오노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잊으셨습니까! 베르너님께서 말뚝을 모두 설치한 뒤에는 곧바로 도망치라고 하셨습니다! 큰 마법을 사용할 거니 휘말릴 수도 있다면서……!”
“아.”
엘레오노라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마찬가지로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일레이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엿됐네.”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는 것이, 일레이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인도하라. 빛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길 잃은 어린 양들이 몰려들지니. 인자여 책임을 다하라, 수풀이 가득하고 가시밭이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주인은 양 떼를 버리지 않으니. 고난과 역경 끝에는…….」
이진한은 기도하듯 읊조렸다.
숲 사이사이 박혀 있는 지극히 신성한 말뚝으로부터 솟구친 빛이 그의 머리 위로 모였고, 곧 찬란히 빛나는 성호를 그리며 기적의 행사를 알려왔다.
‘없던 신앙심도 생겨나겠네.’
그 거룩하고도 신성한 모습에 절로 마음이 경건해졌다.
정작 본인은 어릴 적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 몇 번 가본 것이 전부였지만, 진정한 신의 기적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눈부신 광휘였다.
추기경 클래스 신성 마법 「엔제리너스」
향긋한 커피 내음이 감도는 이름을 지닌 이 신성 마법은 추기경 클래스의 대단위 신성 마법으로 지정 구역에 신성 속성을 부여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온 천지가 눈부신 백광(白光)으로 물들어간다. 짙은 마기에 삭아가던 나뭇잎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그러운 모습을 보였고, 죽음으로 물들어 있던 땅이 비옥한 옥토로 뒤바뀌었다.
구우우웅─.
바포메트가 처음으로 유의미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기와 상극인 신성한 빛이 그 전신을 태우며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으니 아무리 고대 악마라 해도 거슬리기 짝이 없을 것이었다.
저항하든가, 벗어나든가.
바포메트의 선택지는 두 개였고, 녀석은 후자를 택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먹음직스러운 식사가 수도 없이 펼쳐져 있는데 굳이 여기서 푸닥거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누가 순순히 보내줄 줄 알고!”
대지로부터 주박의 사슬이 솟구쳐 바포메트의 다리를 옭아맨다. 본래라면 몇 초도 버티지 못한 채 끊어졌겠지만, 그 전신을 휘감은 신성한 가호 덕분에 녀석의 힘이 약해져 얼마간 유지가 가능해졌다.
“초월 마법─.”
두 팔을 높이 들었다. 마나를 끌어올리자 뇌가 떨려온다. 코피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진 것인지 시야 한쪽이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래도, 아직 견딜만했다.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진홍의 보옥」
어둠으로 물든 하늘 가운데, 새빨간 태양이 떠올랐다.
“이 한밤중에 태양이라니.”
“…아니, 저건.”
그 기괴한 현상에 레펠이 눈살을 찌푸릴 찰나, 베르하치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인지를 벗어났다고 하여 초월이요, 마도사를 뛰어넘었다고 하여 대마도사라 불린 존재들의 전유물.
‘내 생에 이 경지의 마법을 볼 수 있다니.’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베르하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마법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한 경지의 대마도사가 펼쳐내는 것임을.
쿠구구궁─.
태양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포메트는 두 팔을 뻗어 그것을 받아내려 했지만, 고대 마수인 베히모스와 리치킹, 그리고 드래곤조차 버텨내지 못했던 마법이다. 아무리 고대 악마라 할지라도 온전히 그것을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런 미친!”
이진한은 기겁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떨어져 내리던 진홍의 보옥이 바포메트의 저항으로 인해 하늘에 걸치게 되었다. 절정에 이른 마기가 녹아내리는 상처를 수복하고 파괴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한 치의 밀림 없는 대치를 이어나갔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먼저 사라지는 것은 진홍의 보옥 쪽일 터.
“…뭐, 한 발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베히모스를 잡을 때도 두 번의 초월 마법을 필요로 했다.
고대 악마라면 그보다 못하진 않을 터. 그렇기에 이진한은 두 손을 벌벌 떨며 두 번째 초월 마법을 영창했다.
“…컥!”
코피로 모자라 시뻘건 피가 그 입에서 토해져 나왔다. 그럼에도 그는 영창을 끝맺었고, 수없이 많은 스크롤과 영약을 동력 삼아 마법을 완성했다.
쿠구구궁-!
떨어져 내리는 태양 위로 새로운 태양이 나타났다. 그것은 위태롭게 유지되던 균형을 깨부쉈고, 인정사정없이 바포메트의 몸을 덮쳤다.
파아아아앗-!
하늘 끝에 다다를 정도의 불기둥이 일었다.
범위를 한 곳에 집중시킨 덕에 오직 바포메트만이 그 화마에 휩싸이며 전신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베르너님!”
“…아.”
일순간 끊어졌던 의식이 미르엘의 외침에 돌아왔다.
눈과 코에 흘러내리던 피를 닦아낸 이진한은 고개를 돌렸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꼴이 왜 그래?”
“…그, 마력 폭풍에 휘말렸습니다.”
미르엘은 비교적 멀쩡했지만, 그 양손에 들린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는 흙투성이가 되어 축 늘어져 있었다.
말뚝을 박고 바로 피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큰 상처는 아니었기에 이진한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쓰러뜨린 건가요?”
“이걸로 안 죽으면 진짜 도망쳐야지.”
이진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미르엘이 양옆구리에 기절한 둘을 낀 채로 자신을 엎고 도망칠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곧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포메트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고대 악마가 아니라 고대 악마 할아비가 와도 이건 못 버티지.”
끔찍한 형태였다.
염소를 닮았던 그 머리와 상반신은 7할 가량이 녹아내렸고, 왼쪽 다리는 뼈밖에 남지 않은 채 겨우 서 있는 것이 고작인 것으로 보였다.
-천천히 접근해라!
-방심하지 마! 악마의 술수일 수도 있다!
기사단과 군대가 천천히 녀석에게 접근하며 정말로 쓰러진 것인지 확인에 들어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진한은 아예 바닥에 벌러덩 누우며 인벤토리에서 꺼낸 엘릭서를 입에 물었다.
“이거 끝나면 바로 떠나자. 일을 너무 크게 벌렸어.”
“그러네요. 이젠 저나 엘레오노라님이 문제가 아니게 됐습니다.”
기절한 두 여인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미르엘은 쿡쿡 웃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곤 이진한의 머리를 조심스레 받쳤다.
“고생하셨어요.”
“진짜로 고생했지.”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페르포치아 왕실에 받을 포상과 넉넉한 시간의 유예가 있으니…….
구우우웅─.
“……!”
귓가에 들려오는 이질적인 울음소리에 이진한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설마.”
저 지경이 되고도 살아 움직이려는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바포메트는 하나 남은 눈으로 선명한 마기를 피워 올리며 이진한과 시선을 마주쳤다.
“이런 씨…….”
절로 욕지거리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젠 모르겠다며 그가 미르엘에게 도망치자고 말하려 할 찰나,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사바트의 악마가 당신과의 계약을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