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1.
“저거, 쓰러뜨릴 수는 있는 건가요?”
바포메트의 요격을 위해 레펠과 베르하치를 뒤로 한 채 얼마쯤 왔을까,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일레이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가 궤를 넘어선 강자라는 것은 알지만, 같은 인간인 이상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조금 전까지 번아웃 상태에 도달해 미르엘의 등에 널브러져 있지 않았는가.
이진한은 그녀의 걱정을 짐작했기에 작게 웃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돌렸다.
“실패하면 도망치지 뭐.”
“…그럼 계약은요?”
“실패했을 땐 어떻게 하겠다고 한 적 없는데.”
“그으건…….”
일레이나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맞긴 맞는 소리다. 계약 실패 시에 관한 내용은 이야기한 적이 없지 않은가.
“어차피 내가 실패하면 다 죽을 텐데 뭐.”
이만한 악마가 마음먹고 날뛰기 시작한다면 작은 왕국의 수도 따위는 한나절도 채 되지 않아 초토화될 것이 분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일레이나가 헛웃음을 뱉어내자 뒤쪽에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말을 보태왔다.
“괜찮아요. 이때까지 몇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끝에선 어떻게든 일을 해결하셨거든요.”
“맞습니다. 벨데르에서 드래곤을 쓰러뜨렸을 때나, 미들턴에서 몬스터 군단의 침공을 막아냈을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마, 저희를 안심시키려 하신 말씀일 거예요.”
“…진짜에요?”
일레이나가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자 이진한은 움찔하며 대답했다.
“거, 사람 무안하게.”
그로서는 시간의 유예라는 제약이 존재했으니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야 하는 퀘스트다. 실패할 시에 망설임 없이 도망치겠다는 것은 그녀들이 말한 대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였다.
탁.
그들은 곧 숲의 끝자락에 도달해 툭 튀어나온 절벽 위로 내려섰다.
바포메트가 향하는 수도로 향하는 직선 경로 바로 위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커다란 산양 머리를 한 악마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저걸 어떻게 요리하냐인데.”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엘레오노라가 살짝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들과 이진한의 전력 차이는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일레이나를 제외하고는 차라리 저쪽에 있는 이들이 더 도움이 될 터.
하지만 이진한은 씩 웃으며 제 로브 자락을 들쳤다.
후두둑.
무언가 잔뜩 그 밑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것 중 하나를 집어 든 미르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뚝?”
“정확히는 지극히 신성한 말뚝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겁니까?”
“있지. 그것도 아주 많이.”
툭.
발끝으로 그것을 차올려 손에 쥔 그는 고개를 돌려 주위에 자리한 숲을 가리켰다.
“너희는 이걸 숲 곳곳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아줘. 땅이든 나무든 상관없어. 어디든 박혀 있기만 하면 돼.”
“무언가의 촉매인가요.”
말뚝을 살피던 일레이나가 무언가를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단위 신성 마법을 위한 보조 성물(聖物)이다. 이걸로 녀석의 마기를 억누른 다음 마법으로 폭격을 갈길 거야. 그래도 통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이진한은 제 상태창을 살폈다.
HP나 MP나 엘릭서로 모두 가득히 회복했지만, 정신 쪽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이때까지의 싸움에서 겪은 피로가 계속 누적되었고, 잠깐이라도 방심한다면 잠들 것 같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아마 두 발, 잘하면 세 발이 한계겠지.’
두 번째 번아웃은 페널티가 더 크다. 세 번째에 이르러선 마법 구조식 자체가 망가져 버려 한동안 아예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최대한 녀석의 시선을 끌면서 시간을 벌 테니 그사이에 설치 부탁해. 끝나면 곧바로 멀리 피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어요.”
엘레오노라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이나 역시 말뚝을 챙겨 들었고, 미르엘도 각오를 다지며 제 장비를 점검했다.
“다 끝나면 신호해줘.”
타닷-!
이진한은 땅을 박차며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카루스의 날개를 펼 것도 없이 부유 마법을 사용했고, 순식간에 바포메트의 머리 위로 이르러 그 커다란 몸을 내려다보았다.
쿠웅-.
그 주위에선 페르포치아 왕국의 기사단과 군대가 필사적으로 공격을 가하며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늦추고자 애쓰고 있었다.
베르하치를 비롯한 왕궁 마법사들은 그들을 원조했고, 신성 교단의 사제들 역시 끊임없이 기적을 일으켜 전의를 북돋웠다.
안타깝게도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포메트에겐 일말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아까까지 마화(魔火)를 내뿜으며 제 주위에 붙은 이들을 공격하던 녀석이 더 이상의 반응 없이 꿋꿋한 태도로 움직이기만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기사단이나 군대가 저돌적인 모습으로 그 곁에 달라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것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끝까지 끌어 모아서 한 번에 없애려는 건가.’
이진한의 눈에는 그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어차피 인간의 군세는 바포메트에게는 날파리와도 같은 존재들일 터. 그러니 그들이 자신의 곁으로 가득히 모여들었을 때 공격을 가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둘 생각은 없지.”
짝-!
이진한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초월 마법은 녀석을 마무리할 필살기다. 그렇다고 다른 마법을 사용해서 애매하게 힘을 소비할 수 없으니 다른 클래스의 스킬을 생각이었다.
주술사 클래스 스킬 「핏빛 장마」
하늘에서부터 끈적한 빗물이 흘러내린다. 다만, 그 색은 피처럼 시뻘건 것으로 농밀한 점성까지 지니고 있어 대상의 몸을 옭아매는 디버프 스킬이었다.
파아앗-!
핏빛 비가 바포메트를 중심으로 쏟아져 내려 그 몸에 달라붙는다.
처음에는 그저 그 위에 색을 물들여갈 뿐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방으로 손을 뻗쳐 움직임까지 제한해갔다.
구우우우─.
바포메트가 입을 열었다.
마치 제 움직임을 방해받아 불쾌한 듯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하늘 위를 부유하고 있던 이진한과 시선을 마주쳤다.
“이크.”
시퍼런 마화(魔火)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토해져 나왔다. 황급히 몸을 기울이는 것으로 궤도를 바꾸어 몸을 덮치는 불꽃을 피해낸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숲의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3할 정도인가.’
파스스.
바포메트의 몸을 옭아맸던 핏빛 장마가 점차 연기를 내며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 농밀한 마기의 격을 이기지 못하고 삭는 것이었다.
“조금은 더 버텨줄 줄 알았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쉬운 얼굴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연계 스킬을 발동했다.
“폭혈(爆血)”
주술사 클래스 스킬 「폭혈(爆血)」
쉬이익-!
길게 늘어진 장마를 타고 거센 불길이 일었다. 마치 해일처럼 부닥친 그것은 이내 바포메트의 몸을 타고 올랐고, 이내 거센 폭발을 일으키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큽?
-물러나, 물러나라!
저 멀리서 기사단과 군대가 황급히 거리를 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최대한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펼친 것이었건만, 그 폭발 규모에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휘릭-.
용아청성창을 손안에서 돌린 이진한은 적잖은 마나를 그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하늘 위로 먹구름이 모여들었고, 이내 아련한 뇌성을 울리며 곧 다가올 파국을 알렸으니.
“「만운천뢰(萬雲天雷)!」”
그가 힘껏 용아청성창의 끝을 그어 내리자, 그 움직임에 따라 시퍼런 뇌광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까 이곳으로 온 직후 바포메트의 머리 위를 가격한 것보다 곱절은 더 큰 위력으로 순식간에 매케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와아아아아!
그 폭발적인 공격에 페르포치아 군세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주먹을 불끈 들어 올린 채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런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바포메트의 그 커다란 전신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음이 드러나자 환호성은 뚝 끊겼다.
“퉤.”
이진한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지금의 연격은 시간을 끌기 위한 것. 마음 같아선 달라붙어서 칼질이라도 하고 싶지만, 성검(聖劍) 종류가 아닌 이상 그 몸에 흠집이라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구우우웅─.
다행이라면 바포메트가 그를 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누적된 데미지는 녀석으로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는지 시퍼렇게 뜬 두 눈을 이진한에게로 향하며 그 커다란 손을 뻗어왔다.
“어림도 없지.”
부유 마법을 해제한 이진한은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주변은 숲인지라 높이 솟은 나무가 수없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지형. 그는 곧게 뻗어 나온 가지들을 밟으며 장궁을 꺼내 들었다.
쉬이익─.
촉에 농밀한 신성력이 인챈트 된 화살이 허공을 꿰뚫으며 쉴 새 없이 그 몸이 박혀 들었다.
표적이 워낙 크기에 빗나갈 염려는 없다. 이진한은 한 대에 몇십 골드나 하는 미스릴 화살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고, 곧 녀석의 다리를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더라도 큰 피해는 없겠지만.”
마기로 이루어진 존재이니 신성력이 제 체내로 파고든다면 거슬리게는 할 수 있으리라.
그가 잠시 자리에 멈춰선 채 호흡을 고르고 있을 찰나, 바포메트의 시퍼런 눈빛이 번뜩였다.
키잉─.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파공성이었다.
그 눈에서 쏘아진 빛이 숲을 가르며 부닥쳤고, 이진한은 본능적으로 땅을 박차 몸을 날렸다.
“…레이저까지 쏘는 거냐고!”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른 그는 분통을 터트리며 흔적도 없이 소멸한 왼팔을 바라보았다.
화끈한 통증이 결손된 부위 상처 위로 부닥친다. 그는 거친 손놀림으로 성수(聖水)를 부어 마기를 정화했고, 엘릭서로 신체를 회복시켰다.
“더럽게 아프네.”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바포메트를 바라보았다.
“1차 페이즈에서는 호구처럼 맞아 주는 게 정석 아니야?”
보통 보스 레이드에선 1차를 넘어 2차, 3차로 이어지는 페이즈가 있지 않은가.
1차에서는 호구처럼 맞기만 하다가 2차부터는 본래 힘을 보여주겠다니 뭐니 하면서 각성하는 이벤트가 자주 있었지만, 이 빌어먹을 고대 악마님께서는 그런 것 없이 초장부터 강하게 나오는 듯했다.
‘만약에 1차가 끝이 아니라 2, 3차 페이즈로 이어지면…….’
고대 악마에서 무슨 멸망의 악마로 바뀌어서 파멸적인 힘으로 찍어 눌러온다면, 자신 혼자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
그러니 신성 마법으로 녀석의 힘을 최대한 억눌러 놓은 뒤 초월 마법을 때려 박아 다음 페이즈가 진행되지 않도록 한순간에 끝내려는 것이었다.
피이잉-!
그때 숲 한가운데서 붉은색 불꽃이 솟아올랐다.
하늘 높이서 마치 폭죽처럼 터진 그것에 이진한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끝났나.”
사냥감을 옭아맬 덫은 준비되었다.
나머지는 토끼몰이일 뿐. 사냥꾼은 다시금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