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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49화 (49/210)

◈ 049.

솔직히, 이쯤 했으면 깨어나도 충분하지 않냐고 생각했다.

잠깐 두 눈을 감았다 뜨니 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색 천장이었고, 곧 내가 깨어난 것을 눈치챈 간호사가 의사를 불러와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첫 마디는 ‘이진한 환자 괜찮으십니까. 가상현실 접속 기기의 오류로 기존 제한 시간보다 오래 접속하게 되었습니다.’로 시작하면서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한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의사는 내 동공과 맥박 같은 걸 확인한 후 정상이라고 결론 낼 터.

머지않아 월드에서 나온 직원이 내 앞에 석고대죄하며 부디 조용히 넘어 가주시면 막대한 금액의 보상을 해주겠다며 달콤한 제안을 할 것이 분명했다.

이때까지의 기억은 가사 상태에 들었던 내 뇌가 그간의 정보를 토대로 삼아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

게임을 하던 중 의식을 잃었기에 ‘월드’의 무대가 토대로 형성되었고, 플레이어인 내가 그 가운데를 누볐던 것이었다.

몇 번의 검사 후 나는 퇴원해 집에 돌아간다. 그렇게 생생했던 경험이 다 허구라는 것에 진한 아쉬움은 남아있지만, 그저 잠깐 꿨던 꿈에서 깨어나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문제는 없었다.

“…….”

그런 기대를 담아 살며시 눈을 떴다.

[번아웃(Burn Out) 경계선에 도달했습니다.]

[신체 기능 대부분이 큰 폭으로 저하됩니다.]

【47:52:39】

제일 먼저 자신을 반기는 것은 익숙한 상태창의 모습, 그리고 누군가의 등에 업힌 채 쉴 새 없이 달려 나가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깨어나기 직전의 기억까지야 말로 달콤한 꿈이었다.

“베르너님?!”

미르엘은 자신의 등에서 느껴진 움직임에 희망을 담아 그를 불렀다.

이진한은 비척거리면서 고개를 들자, 미르엘의 뒤를 따라 달리던 두 여인 또한 그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베르너님 괜찮으세요?”

“몸은 좀 어때요? 말할 수 있겠어요?”

“…멈, 춰바.”

시간의 유예를 보니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지난 듯싶었다.

이진한은 메마른 입으로 겨우 목소리를 내었고, 미르엘은 달려 나가던 것을 멈춰 섰다.

“…끄응.”

미르엘은 조심스럽게 그 신형을 근처에 있던 나무에 기대주었다.

이진한은 신음을 내며 겨우 자세를 잡았고, 깊은 한숨과 함께 제 상태를 살폈다.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해서 몸이 박살났네.’

마법사의 한계라 할 수 있는 번아웃(Burn Out)에 도달한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사실 번아웃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즉시 마법의 사용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보다 더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고 두통이 심해졌으며 성공 확률이 현저히 낮아질 뿐.

지금 상황을 보니 그래도 그 가운데 잘도 매스 텔레포트를 성공시킨 듯싶었다.

“…상황은?”

몇 병째인지 모를 엘릭서를 비운 후 이진한이 입을 열자 초조한 표정으로 저 너머를 지켜보던 일레이나가 말했다.

“그리 좋지 않아요.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당신이 공략대 전부를 밖으로 텔레포트 시킨 것까지는 베스트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이 무너지면서 저게 빠져나왔어요.”

“…저거?”

이진한의 물음에 엘레오노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사역마가 보고 있는 시야가 그 앞에 송출되며 무지막지한 상황을 보여주었다.

-쿠구구궁-.

산맥이 무너져 내리며 그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온몸에 짙은 푸른색의 털을 가진 존재로, 인간과 같이 이족 보행을 하면서도 그 머리엔 한 쌍의 기다란 뿔이 기이하게 꺾여 있다. 외관만 보자면 카라반이 악마화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진짜 넌덜머리가 나네.”

“동감이에요. 처치했나 싶었는데 일어나고, 처치했나 싶었는데 또 일어나고.”

고대 악마 바포메트의 현신이 명백한 상황에 이진한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토해내자 일레이나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니까 잘 막고 있는 것 같은데.”

“던전이 무너지면서 저 산양 같은 녀석만 나타난 게 아니에요. 어디 숨어 있었는지 만티코어 몇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활개를 치는 바람에 다들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어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만티코어의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일레이나의 말에 미르엘이 덧붙였다.

“…….”

이진한은 전신을 짓누르는 짙은 피로감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몸은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다. 잠깐 방심하면 천근만근인 눈꺼풀이 내려와 수마에 빠져들 것만 같은 이 감각.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로 손을 놓고 쉬고 싶었지만, 퀘스트 성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현신한 바포메트를 쓰러뜨려야 끝을 맞이하는 것이 분명했다.

“…진짜 빌어먹을 숙명이네.”

“…….”

일레이나의 귀가 쫑긋했다.

「숙명」

베르너가 검은 현자의 계승자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계승자가 이렇게 세상을 떠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경에 떠도는 드래곤을 쓰러뜨리고, 도시를 침공한 몬스터 군단을 저지하며, 마왕을 숨기는 마르바스 교단의 음모를 막아냈다.

지금 역시 고대 악마가 출현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닌가.

제국 암부에게 쫓겨 달아나는 것에 급급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당시에 나눴던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지만, 이때까지의 정황으로 보아 검은 현자의 계승자인 그는 무언가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꽈득.

이진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몸의 근육을 풀었다.

뒤틀렸던 근육은 엘릭서로 회복되었고, 잠시간의 휴식 덕분인지 번아웃을 알리는 경고도 어느덧 사라졌다.

‘그래도 많아 봐야 두세 번이 한계인가.’

이번에도 번아웃에 이른다면 정말로 장시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터. 현재 자신의 최대 화력을 낼 수 있는 초월 마법은 결정적일 때에 써야 했다.

“가자.”

이진한은 검은 현자를 상징하는 이카루스의 로브를 다시 어깨에 두르며 몸을 돌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로브의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고, 엘레오노라는 예상했다는 듯 냉큼 그 뒤로 따라붙었다.

철컥.

다시금 제 허리춤의 검을 정비한 미르엘 역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끝자락에 우두커니 서 있던 미르엘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같이 가요!”

***

레펠은 침중한 낯빛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바포메트라 특정된 고대 악마의 현신은 그 거대한 몸을 이끌며 천천히 코랄 산맥을 횡단하고 있었다.

“…정녕 멈출 방법은 없습니까.”

“난들 어쩌겠나.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보겠지만…….”

페르포치아 왕국 유일의 마도사인 베르하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베르너의 마법으로 던전을 빠져나온 직후, 그들은 생환의 기쁨에 취했다.

그 본인의 상태가 심각했지만, 남은 포션을 전부 들이붓자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되었다.

자잘한 부상 정도야 수도로 돌아가 사제와 치료사를 불러 극진히 치료하면 끝날 문제다. 던전 안에 그런 위협적인 존재를 남겨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지금 당장 굳이 그것을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사실 두려웠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압도적인 강함과 시커먼 어둠은 본능에 숨어 있는 공포란 감각을 건드려 손끝이 떨리게 만들어왔으니.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레펠은 지체할 것 없이 철수의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찰나 밖에 만끽하지 못했던 생환의 기쁨이 끝나고 말았다.

던전이 위치한 지반이 무너져 내린다. 그 위로 아까 던전 안쪽에서 보았던 산양을 닮은 푸른 악마의 거대한 몸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주위로 몇 마리나 되는 만티코어가 제 날개를 펄럭이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

레펠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또 그러한 위협과 마주하니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 공략대를 뿔뿔이 분산시켜 산맥 밑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와 합류하게 했다.

그 자신과 왕실 기사들은 끝까지 남아 만티코어의 발목을 붙잡았고, 일행이 무사히 도주한 것을 확인하고는 그들 역시 후퇴했다.

그 자체로는 참으로 훌륭하며, 살신성인을 기조로 하는 기사의 귀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재앙이었다.

왕실 마도사인 베르하치는 던전에서 나온 그 존재를 고대 악마 중 하나인 바포메트라는 것을 간파했다.

하지만 단지 그 정체를 꿰뚫어봤을 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할 순 없었다.

태고 시절의 악마인지라 그 정보가 극단적으로 적었다.

이름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정말로 우연한 계기로 얻을 수 있었던 서적에서 떠올린 것일 뿐, 그마저도 어떻게 쓰러뜨려야 한다는 기록은 적혀 있지 않았다.

“…피난은 시작했다고 하지만 제때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포메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왕국의 수도인 그르노블이 분명했다.

바포메트의 존재를 확인 후 곧바로 수도에 알려 대피를 시작했다곤 하나 그 수많은 인원이 전부 시간 내에 대피할 수 있으리라 보기엔 어려웠다.

“으음…….”

바포메트가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베르하치의 주름이 더욱 깊어져 간다. 급히 불러온 왕궁 마법사와 페르포치아 정예 군대가 원거리에서 요격하며 바포메트의 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 어떤 공격조차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베르하치 역시 한바탕 마법을 쏟아낸 직후였다.

포션을 마시며 마나를 회복해나가던 그는 지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이가 들으니 이것도 못 할 짓이로군.”

“베르너님이 계셨더라면…….”

“…아직도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가?”

베르하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레펠을 바라보았다.

대마도사 급의 마법,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 팔라딘 급의 신성력, 보우 마스터에 버금가는 활 솜씨와 더불어 그 외에도 다채로운 능력을 지닌 남자.

마경에선 블랙 드래곤을 쓰러뜨린 드래곤 슬레이어며 미들턴 도시에선 수십만에 달하는 몬스터 군단의 침략자를 막아낸 구세주라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지.’

요 며칠간 던전 안에 갇혀 있던 것의 후유증이 제법 큰 듯했다.

“…후.”

레펠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요 한 시간 동안 바포메트의 앞길을 막으며 내내 이야기했건만, 베르하치는 믿어주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긴,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그 내용 하나만 할지라도 국가 단위로 이름을 날릴 지언데, 그 모든 것이 한 명에게 축약되어 있으니 어찌 쉽사리 믿을 수 있겠나.

“옵니다! 브레스, 브레스가 또 쏟아집니다!”

그들 앞을 지키고 있던 왕실 마법사가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레펠과 베르하치는 그것에 표정을 굳히며 각자 기운을 가다듬었다.

바포메트의 브레스.

툭 튀어나온 입에서 뿜어진 푸른 화염은 공포를 넘어 절망을 가져다주었다.

기사들이 세운 방패의 벽은 순식간에 허물었고,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쉴드 또한 통하지 않았다.

오직 사제들이 두른 신성력의 가호와 베르하치가 만들어낸 배리어에만 막혔을 뿐이었다.

파아아앗-!

코랄 산맥의 적지 않은 면적을 불사른 시퍼런 마염(魔炎)이 다시금 그 위로 토해져 나왔다.

먼저 베르하치가 배리어를 만들어낸 다음 교단의 사제들이 그 위에 가호를 덧씌웠다.

어지간한 상위 마법도 견뎌낼 강도. 하지만 그것은 이전과 달리 온전히 그 불꽃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파가각-.

가호가 순식간에 깎여 나간다. 배리어는 마치 달궈진 유리마냥 형태가 일그러졌고, 그 너머의 일부가 불꽃에 휩싸여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이런.”

베르하치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자신들의 힘은 다해가지만, 브레스의 기세는 줄어들지를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레펠을 바라보았다.

“도망가게. 자네 다리라면 충분히 저것을 넘어 영역 밖으로 피할 수 있겠지.”

“안 됩니다. 최소한 베르하치님은 모시고…….”

“배리어가 깨지면 자네가 도망칠 틈도 벌 수 없네. 내 헛되이 늙기만 하진 않았으니 이 중 몇 명은 더 살릴 수 있겠지.”

느닷없는 상황이었으나, 베르하치의 얼굴은 이미 예전부터 이런 미래를 각오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

레펠은 이를 악물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지금 자신들로는 저 악마를 막아내지 못하고,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은 발을 들어 한 걸음 내디뎠다. 사족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초연히 악마를 바라보며 배리어를 펼친 노인을 보며 입술을 씹었을 뿐.

파지직-.

그때, 허공으로 한 줄기 뇌성이 들려왔다.

레펠이 번쩍 고개를 드니 더없이 익숙한 형태의 창 한 자루가 바포메트의 머리 위로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괜한 객기는 부리지 말게! 기어코 늙은이가 호통을 쳐야 떠나겠는가!”

“아닙니다.”

레펠은 옅은 미소를 지었고, 이내 손을 들어 바포메트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저걸 보십시오.”

그와 동시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규모의 뇌성이 터지며 시퍼런 벼락이 바포메트의 정수리로 시원하게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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