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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48화 (48/210)

◈ 048.

푸쉬식-!

공동 안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자잘한 균열과 함께 자욱한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의 제한이 풀린 이진한이 그동안의 답답함을 갚아주려는 듯 초월 마법을 쉬지 않고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린 그는 뻐근한 어깨를 가볍게 풀어주었다.

엘릭서로 회복한 마나는 어느덧 바닥에 가까워 있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서서히 회복하고 있지만, 기껏해야 초월 마법 한 번을 더 쓸 정도. 하지만 그렇게 남긴 것마저도 의도한 것이었다.

“더 움직여봐. 아직 한 발 남았으니까.”

설마 여기서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경계심을 거두지 않자, 시커멓게 탄 재가 되어 있던 카라반의 몸이 연기와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종래엔 아까 카라반이 휘두르던 마검(魔劍) 한 자루만이 덩그러니 꽂혀 있었다.

아마 그것이 바포메트와 계약할 수 있던 연결책이자 본체일 터.

본래라면 좋은 검을 얻었다는 생각에 싱글벙글 비소를 지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진한은 몸을 돌려 일행이 있는 성소로 들어갔다. 그러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바닥에 누워 지친 한숨을 토해냈다.

“괜찮으세요?”

“…상처는 없는데, 너무 힘드네. 아, 나이스 어시스트였어. 설마 거기서 제단을 부숴줄 줄은.”

제단을 부숴 마법의 제한을 풀어낸 것은 카라반을 쓰러뜨리는 데에 막대한 일조를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엄지를 세우자, 엘레오노라는 사뭇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폈다.

“제가 그래도 보는 눈은 있다고요.”

“진짜로 잘했어. 덕분에 무리도 덜 할 수 있었으니까.”

광폭화의 후유증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 잠깐 발동한 것으로 5%의 능력치가 하락했는데, 전력으로 싸우기라도 한다면 당분간 움직이는 것도 힘들 터.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옆에 있던 일레이나가 슬쩍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단의 술식을 해제한 건 저예요. 공적치는 정확하게 가려야죠.”

“발견하지 못했다면 부수지도 못했잖아요.”

“발견만 하고 부수지도 못했을 수도 있죠.”

둘이 아웅다웅하며 서로 잘했다며 자신의 공을 자랑한다.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그 옆쪽에서 조용히 미르엘이 내밀어 온 물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참고로 제단을 부순 건 저입니다. 술식을 해체했어도 마법의 사용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으니 두 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죠.”

“하하하.”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확실히 제단이 힘껏 두들겨 부수기라도 한 듯 무차별적으로 박살 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기에 크게 웃음을 토해내자, 미르엘은 살짝 부끄러워졌는지 헛기침을 하며 목을 다듬었다.

“저, 저기…….”

그 가운데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이진한이 고개를 들자 왕실 기사들과 함께 그 앞에 선 레펠이 경외가 서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까 일행께서 베르너라 부르는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네. 이분이 그 베르너님 맞아요. 마경에서 블랙 드래곤을 쓰러뜨리고, 미들턴을 침공한 몬스터 군단을 막아낸.”

“아아!”

옆에서 일레이나가 슬쩍 말해오자 레펠은 감탄을 터트리며 이진한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위명이 자자한 드래곤 슬레이어께서 저희 왕국을 위기에서 두 번이나 구해주시다니, 참으로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니까 감사 치레는 사양하지.”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붙잡힌 손을 흔들어 빼냈다.

마음 같아선 미들턴 때 길드 마스터인 소르뎀에게 했던 것처럼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돈을 더 가져오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상황과 때를 보아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인물. 어차피 왕실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위쪽으로 보고가 올라가면 추가로 보상이 내려올 가능성이 컸다.

“제단은 파괴됐지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잠시 이곳에서 머물렀으면 하는데. 결계가 깨졌으니 밖에서도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으니까.”

“예, 그리하지요. 피로가 회복되실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갖겠습니다.”

레펠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두 손을 모은 채 대답했다.

이진한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갑작스럽게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아, 저 검은 건드리지 못하게 관리 부탁하지. 명색이 마검인지라 또 귀찮은 일이…….”

“…어? 전하?”

그가 말하는 도중 레펠의 뒤에 있던 왕실 기사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린 채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별 특별한 것 없는 부름이었지만, 이진한은 등골이 싸해짐을 느꼈다. 레펠 역시 마찬가지인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그 둘은 마치 녹슨 기계가 관절을 비틀 듯 고개를 돌렸고, 이내 마검 앞에 서 있던 노르디움 왕자를 볼 수 있었다.

“전…!”

왕실 기사가 다급하게 그를 부를 찰나, 레펠은 앞뒤 가리지 않고 땅을 박찼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마검(魔劍)이라 단언할 정도의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아니어도 이때까지의 싸움으로 보아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것쯤은 파악할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으으으…….”

노르디움 왕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 피부는 창백해 시퍼런 혈관이 드러날 정도였고, 게스름츠레 뜬 두 눈엔 시뻘건 핏줄만 돋아있을 뿐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말로 멈추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더 빠르다!’

레펠은 그 찰나에 판단을 내렸다.

순식간에 노르디움의 지척에 이르러 마검에 가까이 가는 왕자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마검에서 뿜어져 나온 농밀한 마기가 왕자의 팔을 끌어당기는 것보다 한 박자 늦고 말았다.

화아악-!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격류가 그들을 중심으로 내뿜어졌다.

“…윽!”

레펠은 어찌할 틈도 없이 그것에 휩쓸렸고, 그쪽으로 쇄도했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려 보내졌다.

턱.

한 번 더 벽과 충돌해 박살나기 직전인 그의 몸을 받아준 것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이진한이었다.

“베, 베르너님…….”

그는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마검을 쥔 왕자를 바라보았다.

시퍼런 광망이 깃든 대현자의 눈이 그 앞의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한층 더 농밀한 마기는 노르디움 왕자의 몸을 타고 들어가 그 골조 자체를 변화시킨다. 얼핏 보면 카라반 때처럼 악마화(惡魔化)로 착각할 수 있겠지만, 그 구조는 조금 더 단순했고 원초적인 부분에 닿아 있었다.

[고대 악마 「바포메트」가 현신을 준비합니다.]

“…이런, 씹.”

이진한은 일그러진 얼굴로 한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된 게 이름 앞에 고대라 붙은 놈들과 관련된 건 전부 곱게 끝난 적이 한 번도 없네.’

그그극-!

곧 노르디움 왕자의 전신이 걸레를 쥐어짜듯 쪼그라들며 피와 살점을 뿜어낸다. 그 주위에 휘몰아치던 어둠은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양분으로 삼았고, 점차 제 몸집을 부풀려가기 시작했다.

고대 악마의 현신.

그 단어 하나하나부터 쉬이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이진한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뒤에서 수십 명의 인원이 멍한 표정으로 이쪽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다. 어차피 필요 없는 사람들이니 일행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버리고 싶었지만, 사람 마음이 또 무엇인지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악마!”

레펠은 어둠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한 쌍의 샛노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경기를 일으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이 불길한 기운은 악마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강렬한 것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마주하는 압도적인 공포에 다리가 풀리며 쓰러지려 할 찰나, 이진한은 귀찮다는 듯 그 어깨를 붙잡고 성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들 이쪽으로 모여!”

휘몰아치는 어둠에 얼어 있던 공략대는 그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저 어둠을 뚫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유일한 동아줄로 보이는 이진한의 곁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전력을 다해 뛰어갔다.

“…잘 될지는 모르겠는데.”

어차피 이대로 여기에 있다간 무너지는 던전에 깔려 죽거나 현신한 바포메트한테 잡아먹히는 결말밖에 없었다.

이진한은 마법을 발동시켰고, 성공을 기원하며 잔여 마나를 전부 때려 박았다.

“초월 마법.”

파아앗-!

복잡한 술식이 성소의 바닥과 벽을 채워가며 눈 부신 빛을 발했다.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적색 마탑의 마법사를 비롯해 공략대에 속해 있는 적지 않은 수의 마법사들은 그것이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초월의 경지임을 알아보곤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떴다.

“끄윽.”

다만, 이진한 쪽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가뜩이나 광폭화의 후유증과 영역 끄트머리에 다다른 전투의 연속, 그리고 초월 마법의 남발로 인해 적잖게 지쳐 있던 상태. 그러니 그 반동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툭, 투둑.

실핏줄이 터져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고, 눈코입 가릴 것 없이 시뻘건 피가 흘러내린다. 마나의 역류로 근육과 뼈가 뒤틀리며 섬뜩한 소리를 내었으니, 장본인인 이진한으로서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남은 의식을 끌어모아 술식을 완성했고,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것을 발동시켰다.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매스 텔레포트」

다른 중세풍 RPG 게임이나 소설에서도 그러하듯 ‘월드’ 세계관 내에서도 텔레포트 마법은 존재했지만, 그것을 발동하기 위해선 텔레포트 게이트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 적이었다.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인 매스 텔레포트 역시 마찬가지로 앞에 매스가 붙은 것처럼 한 번에 더 많은 인수를 텔레포트 시킬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곤 일반 텔레포트와 다를 것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헛된 시도로 오히려 마나가 역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초월 마법의 실패 반동이라면 주위에 있던 이들도 휩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텔레포트는 지정 좌표와의 연결 통로를 만들어 대상을 이동시키는 마법.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는 이상 대마도사인 그가 전력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1m, 아니 10cm도 이동할 수 없었다.

하지만 1cm라면.

기본적으로 던전의 좌표는 그 내부 어디에 있던 모두 같은 곳으로 표시된다. 즉, 던전의 초입이나 제일 깊은 이곳이나 모두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던전 내부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1차 조사대가 했던 것처럼 매핑을 하는 것이었다.

이진한은 대현자의 연산 능력과 남은 마나를 모두 쏟아부어 그 1cm에 희망을 걸었다.

월드에서도 간간이 텔레포트 게이트 없이 텔레포트 마법에 성공한 사례가 나오기도 하지 않았는가.

물론 백번, 천 번에 한 번 정도였지만, 완전하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했다.

파아앗-!

그 순간, 어둠의 폭풍이 폭사했다.

그리고 엘레오노라는 휘몰아치는 어둠의 폭풍이 그들을 집어삼키기 직전, 눈부신 빛이 내부에 있던 모든 인원을 감싸 안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노르스름하게 물든 해질녘의 하늘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들은 성소 중앙에 모여 있지 않았는가. 지금은, 어째서 밖에 나와 있는 걸까?

“…마, 말도 안 돼. 텔레포트 게이트도 없이 이런 대단위 규모의 텔레포트를 시전하다니.”

그 옆에 있던 일레이나는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곤 손까지 떨어가며 막연한 경외심을 드러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던 엘레오노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텔레포트 마법에 감탄하기보다 먼저 베르너의 신형을 찾아 헤맸다.

매사에 철두철미함을 가장하려는 일레이나의 정신을 놓게 만들어버릴 정도의 마법을 사용할 정도이니 그 역시 제법 지쳤을 터.

“…베르너님!”

곧 그를 발견한 엘레오노라의 얼굴이 창백했다.

호수를 이룰 정도로 고인 피 웅덩이, 그 한가운데서 베르너가 엎어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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