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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47화 (47/210)

◈ 047.

용아청성창의 창대가 잘게 떨렸다.

슬쩍 그것을 바라보니 표면으로 옅은 실금이 그어져 있다. 될 수 있으면 피하고자 했지만, 위급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막아낸 탓에 용아청성창의 내구도가 기하급수적으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한 대 맞으면 골로 가겠네.”

이진한은 한숨을 토해내며 창을 휘둘러 그 위를 타고 흘러드는 충격을 해소했다.

싸움을 지저분하게 끌고 가 악마화한 카라반의 속도에 익숙해진 것 까지는 좋았다.

어지간한 것은 피해냈고 위험한 것은 용아청성창으로 막아내어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카운터를 넣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소모전으로 가면 이쪽이 불리해.’

HP와 MP는 꽉 채워져 있다. 단순히 보기엔 문제가 없었으나, 월드의 시스템은 비가시적인 정보에도 큰 영향을 받는 구조였다.

숨 쉴 틈도 없는 영역에서의 전투는 단시간에 정신을 마모시키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시야가 살짝살짝 초점이 맞지 않으며 흔들리는 것이 아까 얻어맞은 충격이 제법 컸던 것 같았다.

“후우.”

근접 전투로 승부를 볼 수 없다면 거리를 벌려서 외곽부터 천천히 깎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진한은 작게 한숨을 토해내며 카라반에게 시선을 때지 않은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마법만 좀 쓰게 해주면 어디 덧나냐 진짜.”

현자 클래스의 장점은 다채로운 변환계.

특히 이진한은 마법을 섞는 조합을 애용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막혀버린 상황에서 저리 강한 녀석과 싸우게 되었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

슬쩍 뒤를 바라보니 공략대는 어느덧 회복한 레펠을 필두로 성소의 입구에서 단단히 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설마 악마화한 카라반이 인질을 잡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쉬이익-!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에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복잡해 잡생각이 많아졌다. 강력한 적을 두고 보인 한순간의 틈은 생사를 판가름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아니.’

그는 오히려 이 위기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카라반의 속도에 익숙해졌듯, 녀석 역시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했을 것이다. 거기에 변화구를 준다면 제법 날카로운 일격을 가할 수 있을 터.

광전사 클래스 스킬 「광폭화(狂暴化)」

스킬 발동을 기점으로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펌프질했다. 가슴을 중심으로 뜨거운 기운이 흘러나와 방으로 퍼져나갔고,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황홀감에 기분이 잔뜩 고양되었다.

뿌득, 뿌드득-.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전신의 근육이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최소 3할에 달하는 양이 증가했으며, 그 위로 시퍼런 핏줄이 솟아오르며 절정에 다다른 힘을 뿜어내었다.

거기까지 이른 것은 그야말로 찰나라 할 법한 시간.

쐐애애액-!

이진한은 허리를 젖히는 것으로 제 머리를 터트릴 듯 휘둘러졌던 카라반의 발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러곤 불쑥 손을 뻗어 녀석의 다리를 낚아챘고 용아청성창를 부러뜨릴 기세로 그 자루를 움켜쥐었다.

“진작 쓸걸.”

옅은 미소가 서린 나지막한 감상과 함께 시퍼런 섬광이 카라반의 몸을 꿰뚫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거센 폭풍이 장내에 휘몰아친다. 이진한은 그 위에 오롯이 선 자세로 저 끝까지 날아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벽에 처박힌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이거지.”

핏-!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가 일순간 날카로운 검에 베인 듯 반으로 갈라진다. 이진한은 그것을 눈으로 좇기보다 먼저 감각을 더 곤두세웠고, 거의 동시에 몸을 왼쪽으로 회전시키며 어느새 자신의 뒤쪽에서부터 후두부를 강타해오는 발끝을 흘려냈다.

촤아악-!

팔뚝의 피부가 찢어지며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어디 부러진 곳 없이 훌륭하게 막아냈다고 할 수 있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제 피를 보았을 때 위축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진한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

허공을 가득 채우는 수십 방울의 피를 보니 불현듯 무언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 효율이 좋지 않기에 익혀만 두고 쓰지 않았던 클래스였지만, 마법이 봉인된 지금 의표를 찌르기엔 더 없이 알맞은 상황이었다.

툭, 투툭-!

고속화된 사고 가운데 카라반의 몸이 천천히,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자신에게 닥쳐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의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용아청성창의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놓고 열 손가락을 모아 수결을 맺고는 나지막하게 외쳤다.

“폭혈(爆血)-.”

주술사 클래스 스킬 「폭혈(爆血)」

츠즈즈즛.

수십 방울의 피가 그 언령(言靈)에 화답하듯 서로 호응하며 불그스름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빈틈을 찔러오던 카라반 역시 그것을 눈치챘지만, 얼마간의 피해는 감수하려는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코앞에서 그것을 바라보던 이진한은 입을 작게 오므리며 말했다.

“쾅.”

콰아아아앙-!

거센 폭발이 그들 사이로 터져 나왔다.

이진한은 그 기세를 거스르지 않은 채 뒤로 훌쩍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서도 가볍게 손뼉을 치는 것으로 다음 스킬을 발동시켰다.

“귀문(鬼門).”

마스터 어쌔신 클래스 스킬 「귀문(鬼門)」

수십 줄기의 그림자가 그를 중심으로 솟구쳐 공동의 벽과 바닥을 타고 폭발의 한 가운데로 쇄도했다.

귀문은 아주 강력하고 심플한 속박 스킬이었지만, 고정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즉, 그것을 피해 달아나는 적을 뒤쫓을 수가 없다.

본래라면 카라반은 자신의 발을 묶어올 그림자를 손쉽게 피했겠지만, 거기서 폭혈이 진가를 발휘했다.

주술사 클래스 스킬인 폭혈은 사실 그렇게 큰 위력은 없다. 그들 수준에 오른 정도면 가벼운 찰과상과 몸이 살짝 뜨는 넉백 정도뿐.

하지만 그 진면목은 1.5초 남짓한 아주 짧은 공황 상태를 유발한다는 것에 있었다.

콰아악-!

그리고 그 틈은 귀문이 제 역할을 다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

카라반은 있는 힘껏 몸부림쳤음에도 제 몸을 옭아맨 그림자가 떨어지지 않자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니,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더 거센 기세로 팔다리를 조여왔고 종래엔 바닥에 쓰러지지 않으려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다.

“30초 안에 벗어나기 힘들걸.”

괜히 귀문이 귀문이겠나.

한 번 묶이면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맞는다고 하여 타클래스 플레이어들에게는 씹문이라 불리는 스킬이었다.

스윽-!

이진한은 다시금 용아청성창의 자루를 쥐었다. 그러곤 두 다리를 사선으로 벌리며 허리를 비틀었고, 마치 메이저리거 투수가 공을 던지듯 창을 날려 보냈다.

쐐애애애액, 퍽-!

한 번으로는 뚫지 못했던 그 질긴 가죽이 드디어 찢어지며 용아청성창의 날이 박혀 들었다.

광폭화로 뻥튀기된 무지막지한 스탯은 아무리 악마화한 카라반이라 할지라도 두 번은 버텨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일단 다리 하나.”

이진한은 재차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익숙한 장궁이 손에 쥐어지고, 몇 개의 화살이 그 시위에 걸렸다.

사실 지금 상태라면 방금도 그랬듯 카라반과 정면으로 승부를 보아도 제법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진한은 제힘에 취해 날뛰지 않았다. 광폭화는 제 살을 깎아 막대한 힘을 얻게 해주는 양날의 검. 그 페널티는 유지 시간과 소모한 힘에 따라 차등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그렇기에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차분하게 외곽부터 카라반의 힘을 갉아나가고자 했다.

쉬이익-!

몇 대의 화살이 거의 차이를 두지 않은 채 허공에 쏘아졌다.

촉 위로 농밀한 신성력이 깃든 그것들은 여지없이 카라반의 몸을 꿰뚫었고, 카라반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제 몸을 옭아매고 있는 그림자 가운데서 발광을 했다.

두둑, 두두둑-.

그 노력이 통했던 것일까.

귀문의 그림자가 점차 끊어져 나가며 예정보다 십여 초 더 이르게 풀릴 기미를 보였다. 그것을 본 이진한은 이를 악물며 속사를 가했고, 카라반은 제 몸이 벌집처럼 되었을 때가 돼서야 겨우 속박을 끊어내며 자유의 몸이 되었다.

「키에에에엑-!」

이제는 인간의 언어조차 상실해버린 것일까.

카라반은 거센 마기를 피워 올리며 제 몸에 박힌 화살들과 다리를 꿰뚫은 용아청성창을 거칠게 뽑아내었다.

“…후.”

이진한은 짧게 숨을 토해내며 광폭화를 해제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가 마지노선이었다. 더 유지한다면 싸움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겠지만, 광폭화가 끝나기 전까지 카라반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당하는 것은 도리어 자신이 될 터였다.

[광폭화의 페널티로 능력치가 5% 하락합니다.]

“5%면 싸게 때웠네.”

몸이 살짝 쳐지는 감각과 함께 떠오른 메시지에 이진한은 쓰게 웃었다.

쿠구구궁-.

다만, 카라반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했던 것이 그리도 분했는지 바닥에 흘러내릴 정도로 농밀한 마기를 뿜어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벌하네.”

이진한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용살검을 손에 쥐었다.

가장 효율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인 마법은 봉인 당했고, 성검은 마왕과의 전투에서 파손된 지 오래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치명타를 가하기 힘드니 어떻게든 팔라딘 클래스의 신성력으로 승부를 보아야 했다.

‘팔다리 날아갈 걸 각오하고 또 직접 꽂아 넣어?’

흑백쌍린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 몸에 직접 날을 박고 전력으로 신성력을 쏟아 부으면 아무리 악마화한 녀석이라 할지라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볼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으로선 뚜렷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듯했다.

“진짜, 빌어먹을 던전이네. 마법만 사용할 수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어렵게…….”

[사바트의 제단이 파괴되었습니다.]

[마법의 출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됩니다.]

[멈춰있던 시간의 흐름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뭇, 뭐?”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반응한 것인 이진한뿐만이 아니었다.

스산한 살기를 내뿜으며 이쪽을 압박해오던 카라반은 그 자리에서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곤 황급히 성소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호락호락하게 보내줄 그가 아니었다.

“베르너님! 마법의 제한이 풀렸어요!”

“저한테 감사하세요! 이터널의 애머시스트에게 걸리면 이런 것쯤은……!”

“의견을 낸 건 저예요!”

“누가 저 제단의 술식을 풀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하하.”

이진한은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자신이 카라반과 싸우던 도중 그녀들이 한 건 크게 수확을 올린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지원이었기에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뻐근한 고개를 돌리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너, 이제 뒤졌다.”

쿵-.

그의 발이 가볍게 땅을 구르자 눈 부신 빛이 점멸하며 공동의 벽과 천장 위로 마법진이 빼곡하게 새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카라반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제껏 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닥쳐갔지만, 이제 속도가 가지는 이점이 영향력을 발휘할 시점은 지났다.

촤르륵-!

사방을 가리지 않고 솟구친 보랏빛 사슬이 카라반의 팔다리를 옭아맸다.

카라반은 더 이상 놀아나지 않겠다는 듯 거칠게 그것을 뿌리쳤으나, 주박의 사슬은 귀문의 그림자보다 더 상위에 있는 마법이었다.

“거기에 저번 전투로 얻은 경험을 교훈 삼아 술식을 더 강화했지. 아이돈이 와도 전부 막아내기 힘들걸?”

이진한은 사지가 결박된 채 허공에 매달려있는 카라반을 보며 히죽 웃었다.

마법이 돌아온 이상, 이제 무서운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더없이 경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초월 마법.”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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