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6.
「어림없…….」
흑백쌍린의 송곳니에 신성력을 담았음에도 카라반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리치킹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신성력이었지만, 카라반은 질 수 없다는 자존심이 고통보다 우위에 있는 것인지 제 가슴팍을 뚫고 나온 송곳니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예전에 누가 해준 말이 있었지.”
이진한은 그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 조용히 속삭였다.
카라반은 그것에 반항하며 손바닥이 짓이겨질 정도로 송곳니를 억눌렀지만, 그 위에 서린 빛은 점차 찬란할 정도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계획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처맞기 전까지는.”
「그으아아아아-!」
카라반의 몸이 경련했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육체는 마기와 완벽하게 일체화되었다. 그렇기에 상극인 신성력이 그 중심을 파고들자 형태가 무너져 내리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네가 그렇도록 증오하는 《정의》의 동료인 《안식》의 사제가 해준 말이다.”
「……!」
카라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녀석은 핏발이 선명하게 솟아오른 눈동자로 이진한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흑발에 흑안! 그 검은 로브는!」
“알아차려봤자 늦었어.”
이진한은 흑백쌍린을 쥔 손에 시퍼런 핏줄이 불끈 솟아오를 정도로 힘을 주었다.
촤아아악-!
카라반의 양어깨가 갈라지며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악마와 계약한 주제에 아직 붉은 피를 지니고 있는지 꺼림칙하기 그지없다. 녀석은 양팔이 덜렁거리는 채로 바닥에 쓰러져 내렸고,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내가 《지혜》의 검은 현자다.”
휙-.
그는 흑백쌍린을 휘둘러 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곤 닿을 리 없는 말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 시끄러운 폭음이 끊이질 않았던 공동이 적막이 내려앉는다. 성소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공략대는 모두 나지막하게 입을 벌린 채 그쪽을 바라보며 고요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저, 저기.”
“고생했다. 이제 다 끝났으니 나갈 준비를 하도록.”
이진한은 더듬거리며 말해온 레펠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그의 수고를 치하했다. 하지만 레펠은 떨리는 동공으로 짧게 고개를 저으며 저 너머의 뒤를 가리켰다.
“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뭐?”
이진한은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쓰러졌던 카라반은 비척거리며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팔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덜렁거렸지만, 녀석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거, 좀 싸한데.’
이만큼 고생시켰으면 여기서 좀 끝나도 되지 않는가.
하지만 조금씩 카라반의 몸 위로 피어오르기 시작한 마기는 곧이어 시작될 파국의 전조를 알리는 듯했다.
철컥.
이진한은 로브 밑으로 용아청성창의 자루를 쥐었다.
앞서 말했듯 그는 위험을 남겨두는 타입이 아니었다. 파국의 전조를 알리는 복선 따위는 최대한의 힘을 가해 제거하면 될 터.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발끝에 힘을 싣는다. 슬쩍 상체를 기울여 무게중심을 극단적일 정도로 옮길 준비를 끝낸 뒤에는 마지막으로 전신에 마나를 극한까지 활성화했다.
쉬아아아아악-!
한줄기 질풍이었다.
적어도 곁에 있던 레펠은 그렇게 느낄 정도로 이진한의 기세는 더 없이 날카롭게 허공을 가로지르며 기어코 일어나는 데 성공한 카라반을 향했다.
여지 따위는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용아청성창의 위로 찬란한 신성력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그 끝은 이내 카라반의 가슴을 관통했고, 그것도 모자라 공동을 가로질러 그 가장자리에 있던 벽까지 밀어내었다.
쉬익-쾅!
용아청성창에 매달린 카라반의 몸이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한 채 대롱대롱 흔들린다.
창이 정확히 녀석의 심장에 박히는 것을 확인한 이진한이 한숨을 내쉬던 그때,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카라반의 모습에 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구우우웅-.
귓가로 알 수 없는 존재가 토해내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분명 직전까지는 인간의 것이었을 눈동자 위로 시커먼 어둠이 번져나갔고, 그 가운데 샛노란 한 줄기 선이 그어지며 또 다른 존재의 각성을 알렸다.
“야, 설마…….”
아이돈처럼 너도 네 주인을 불러온 것이냐.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몸을 덮친다. 후욱 하는 느낌과 동시에 전신이 붕 뜸과 동시에 시야가 어둡게 물들며 일순간 모든 감각이 끊어졌다.
머릿속 한구석으로 진한 기시감이 들었고, 이진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건.’
검은 현자의 유적에서 베히모스에게 멋모르고 덤볐다가 근접 카운터를 맞고 뻗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
이윽고 막혀 있던 숨을 겨우 토해내자, 자신의 몸이 그때와 같이 수북한 잔해에 파묻혀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베르너님!”
미르엘의 목소리고 귓가에 울린다. 이진한은 울컥 올라온 피를 뱉어냈지만, 그때와 같이 무기력하게 엎어져 구조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뒤지게 아프네, 진짜.”
“베르너님 괜찮으세요?”
다가온 미르엘이 부축하며 그의 몸을 잔해더미에서 빼냈다.
겨우 한숨을 돌린 이진한은 가슴팍이 우그러진 갑옷을 바라보고는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해제했다.
“그 녀석은…….”
“레펠경이 맡고 있어요.”
“괜찮을지 모르겠네.”
이진한은 엘릭서를 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였다. 명색이 소드 마스터이니 경계한다면 한 번에 당하진 않겠지만…….
콰아아아앙-!
그렇게 생각할 찰나, 이진한의 옆으로 무언가 매서운 속도로 날아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성소의 벽에 처박혔다.
저적 균열이 일었고 돌무더기가 잔뜩 쏟아지며 또 하나의 석산을 만들어낸다. 곧이어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공략대는 그것이 조금 전까지 카르반 앞에 서 있던 레펠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레펠경!”
한 박자 늦게, 왕실 기사들이 절규하며 그 위로 뛰어갔다.
행여나 파묻힌 레펠이 다칠까, 그들은 조심스럽게 돌무더기를 파헤쳤고 이내 넝마가 된 레펠의 신형을 끌어내었다.
“레펠경! 정신 차리십시오!”
“포션, 포션을!”
“사제는 어디 있나!”
한눈에 보아도 금세 회복할 수 있는 상처는 아니었다. 짧게 혀를 찬 이진한은 빈 엘릭서 병을 옆으로 내던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르엘, 엘레오노라 옆에 꼭 붙어 있어. 일레이나도 섣불리 나서지 말라고 전하고.”
“…예, 조심하십시오.”
이진한은 어둠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던 카라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전신에 피어오른 마기가 몸을 휘감았다.
분명 인간이었을 신체 위로 짧은 털이 자라났고 걸레짝이 되었던 양팔이 점차 회복되어가기 시작한다. 가장 극단적인 변화를 보이는 곳은 다름 아닌 그의 두 다리였다.
티그닥.
쭉 뻗은 다리가 역관절로 꺾여있다. 방향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치 염소의 다리처럼 근육이 부풀어 올랐고, 그 위로 몸쪽과 마찬가지로 숭숭한 털이 덮여 있었다.
화룡점정인 것은 경주마처럼 두꺼운 발굽이었으니.
Lv.1027 「카라반 얀센」
【타락한 검의 구도자】
【바포메트의 계약자 - 악마화(惡魔化)】
악마화(惡魔化).
마족이나 악마와 계약한 이들의 최후 수단이었다.
생명의 끄트머리에서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것으로 한순간에 무지막지한 힘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만큼 막대한 패널티가 따랐지만, 그 막대한 성능 때문에 그것을 감수하고 일부로 악마화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것까지는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왕 마르바스와 계약한 리치킹 아이돈조차 악마화를 쓰지 않았다.
만일 그럴 수 있었더라면 자신의 공격에 그리 허무히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터.
그러니 자연스럽게 카라반 역시 악마화를 쓰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예상은 빗나간 듯했다.
푸스스-.
염소의 주둥아리처럼 툭 튀어나온 입이 긴 숨을 토해냈다.
카라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오직 한 쌍의 기다란 뿔이 솟은 염소가 두 발로 서 있었을 뿐이었다.
“살벌하네.”
그 전신에서 피어오른 기세는 이전 카라반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실제로 대현자의 눈이 분석해온 정보에는 녀석의 스펙이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상승했다고 알려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진한은 재빨리 장비의 세팅을 바꿨다.
이곳으로 걸어 나오며 항마력이 높은 팔라딘 클래스의 세트로 맞춰 입었지만, 아무래도 흑마법을 쏘아대며 싸우는 구도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드득-.
발굽이 땅을 뒤로 향해 긁으며 달려 나갈 예열을 하는 듯했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 마법만 좀 쓰게 해주면 안 되냐. 아무리 그래도 악마화한 녀석이랑 맨몸으로 싸우라는 건 조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라반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이진한의 두 눈이 사방을 훑었다. 대현자의 눈이 순식간에 정보를 처리했고, 이내 무서운 속도로 벽을 달리며 이쪽을 향해 쇄도하는 카라반의 기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흡-!”
이진한은 녀석의 공격을 파악함과 거의 동시에 몸을 돌리며 대응했다.
‘늦다. 그렇다면……!’
마음 같아선 방패라도 꺼내 막고 싶었지만, 아직 저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한 호흡 늦고 말았다.
그렇기에 온몸에 가호를 두른 채 두 팔을 교차해 제 앞을 막았다.
쩌엉-!
거센 기세로 찔러온 발굽의 끝이 정확하게 팔이 교차한 부분을 가격했다.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이진한의 몸이 뒤로 쭉 밀려 나가며 땅 위로 깊은 잔흔을 남겼다.
파스스-.
단 일격에 팔을 감싼 갑주가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는 것을 본 이진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까보다 더 강해졌네.”
악마화한 몸에 익숙해진 것인지 위력이 곱절로 올라갔다. 이 정도라면 제대로 한 방 먹을 경우 최악의 경우엔 정말로 빈사 상태에 이를 터.
아무리 자신이라 할지라도 회복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휘릭-.
두 팔이 욱신거렸지만, 이진한은 슬쩍 몸을 낮춘 채 용아청성창의 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쓰러뜨리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 정도도 홀로 꺾어내지 못한다면 이미 앞서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이나 리치킹 아이돈, 그리고 고대 마수 베히모스 때에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파앗-!
이진한이 호흡을 짧게 가지며 땅을 박차자 극한으로 활성화한 신체가 폭발적인 속도를 내며 앞으로 쏘아졌다.
물론 카라반에 비하면 조금 느린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에게도 전신의 힘을 증폭하는 광전사 클래스의 광폭화(狂暴化)나 특수 스킬인 회광반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최후의 수단. 일단은 카라반의 저 속도와 힘에 익숙해지는 것이 먼저였다.
“만운천뢰-!”
시퍼런 뇌광이 용아청성창 위에 휘감긴다. 이진한은 그것을 앞으로 내민 채 녀석의 몸을 찔러 갔고, 이내 공동 안은 눈부신 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