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5.
천장으로부터 시퍼런 낙뢰가 떨어져 내렸다.
카라반은 황급히 마검을 들어 올렸지만, 머리 위에서 내리찍는 강렬한 기세에 신음을 토해냈다.
「끄으윽-!」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그의 얼굴은 당황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앞에 선 이진한은 용아청성창의 창대를 유려하게 돌리며,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타닷-!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질주하자 카라반은 거칠게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제 몸을 옭아매던 뇌전을 흩어버리곤 핏발선 눈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같잖은-!」
같잖은 수작 따위 통하지 않는다. 그리 말하려 했지만, 여유롭게 말이나 내뱉고 있기엔 창끝이 이미 목전에 이르러 미간을 찔러오고 있었다.
휙-!
카라반은 제 허리를 힘껏 젖혔다.
날카로운 살기가 코앞을 스치며 허공을 꿰뚫었을 때, 그는 몸의 반동을 이용해 벼락같은 일 검을 내질렀다.
파아아앗-!
시커먼 마기에 휩싸인 검이 내지른 창 밑을 타고 심장을 노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이진한은 찔러가던 창대를 밑으로 눌렀고, 마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카라반의 빈 몸을 공격했다.
그그극-!
살을 주고받는 것은 손해라 판단했는지 그는 창대를 타고 검을 긁어 올리며 그것을 막아냈다.
「움직임은 제법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할 따름이야.」
싸늘한 살기에 젖은 보랏빛 눈동자가 어둠 가운데 가늘어진다.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창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휘리릭-.
창대가 회전하며 맞닿은 검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러면서 이진한은 왼손을 옆으로 뻗었고, 인벤토리서부터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파앗-!
황금빛 궤적이 어둠을 길게 베어 갈랐다.
카라반은 그 검이 용살검인 것까지는 몰랐으나,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기에 두 눈에 경계심을 담아 치켜떴다.
하지만 그 직후에 벌어진 일은 아무리 그라도 고성을 토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네놈!」
쉬이이익-!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용살검을 내던졌다. 카라반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그것을 힘껏 쳐냈지만, 그 직후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하리만큼 검에 집착하는군. 설마 그 검이 본체인가?”
서걱-.
어느새 카라반의 뒤로 이동한 이진한은 그를 등진 상태로 창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창날의 끝이 그의 왼쪽 어깻죽지부터 팔을 베어 갈랐고, 잘려 나간 팔은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타닷-!
카라반은 제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채 땅을 박차 거리를 벌렸다. 그러곤 침중한 안색으로 마검을 들어 올렸다.
「이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넣다니.」
“…네가 너무 약한 것 아니야?”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의문을 표했다.
기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한 것이었다.
리치킹인 아이돈이 그랬던 것처럼 카라반 역시 1천 레벨을 넘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 역시 초월지경에 도달했다는 소리일 터.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검사 클래스의 초월지경인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보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좋다. 네겐 그리 말할 자격이 충분하니.」
쿵-.
카라반의 말과 동시에 그가 쥐고 있던 마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농도가 한층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이는 건 천년 만이군.」
카라반의 몸이 검은 불꽃으로 뒤덮였다.
이진한의 공격에 찢겨 나풀거리던 옷은 순식간에 불타 엎어졌고, 창백했던 피부 위로 꺼림칙한 마기가 휘감으며 마치 갑옷을 대신하는 듯했다.
종래엔 그 머리 위로 염소의 것을 닮은 한 쌍의 뿔이 자라났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확연한 기세.
「하아.」
잠시 두 눈을 감고 그 넘쳐나는 힘에 취해 있던 카라반은 이내 이진한을 바라보며 선명한 투지를 일으켰다.
「영광으로 알도록. 이 힘은 과거 네놈들이 고대 영웅이라 부르는 녀석 중 한 명인 《정의》의 검사와의 결전 이후 처음으로 사용하는 것이니.」
“…뭐?”
잠시간 흥미로운 눈길로 카라반의 변화를 바라보던 이진한은 예상치 못한 말에 두 눈을 부릅떴다.
고대 영웅 중 하나인 《정의》의 검사.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너, 그게 무슨.”
「아쉽지만.」
카라빈의 신형이 일순간 이진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허공을 꿰뚫는 날카로운 파공성에 그는 다시금 용아청성창을 쥐었지만, 어둠을 베어 가르는 마검의 속도가 더 쾌속했을 뿐이었다.
서걱-!
그가 내뱉은 말에 정신이 팔려 살짝 반응이 늦었던 이진한은 힘껏 몸을 비트는 것으로 제 목을 노려오는 검을 피해내곤 훌쩍 뒤로 물러났다.
손을 대보진 않았지만, 뺨 위로 기다란 상처가 생겨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기는 점차 살을 좀 먹어가기 시작했고 쓰라린 고통과 함께 시커먼 피를 흘려대었다.
「지금의 내게 자비를 구하지 말아라.」
카라반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제 마검의 끝을 세웠다.
「그때의 나는 분명 《정의》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이 안에서 끊임없이 수련하며 세월을 보냈지. 비록 육신의 한계 때문에 악마와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어떠한가. 나는 끝끝내 초월지경에 발을 내디뎠고, 《정의》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풍토가 되어 그 짤막한 이야기만을 세상에 남겼을 뿐이니.」
창의 자루를 쥔 이진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의》의 나인하임.
검사 클래스 최상위 랭커로 제 딸의 이름을 따서 닉네임을 지었을 정도로 팔불출인 아저씨였다.
이진한과도 고대 신의 공략대에서 함께 지냈던 사이로, 오프라인에서도 종종 보곤 했을 정도로 친한 관계였다.
‘그 나인하임과 싸워 패배했다고?’
이진한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게임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 세계의 일인 것인가.
“조심하세요!”
그때, 귓가를 울리는 미르엘의 경고에 이진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 빈틈을 노린 카라반의 검은 이미 지척에 이른 상태였다.
「늦었다.」
슈아아아악-!
검은 일섬이 기다랗게 이어졌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 그는 두 팔을 교차하며 용아청성창으로 몸을 보호했다.
콰아아아아앙-!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악마의 힘을 끌어낸 지금이 전력에 가까운 것인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이진한의 몸은 이전에 레펠이 그랬던 것과 같이 튕겨 나가 그 밖에 있던 콜로세움까지 내팽개쳐진 상태였다.
“…큭.”
그는 신음을 토해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보다 거슬리는 것은 카라반의 공격에 의해 두 팔이 걸레짝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툭.
엘릭서를 꺼내 마신 이진한은 거칠게 입가를 닦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반은 그런 그를 보며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성소를 나왔고, 한껏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의 내게 자비를 구하지 말라고.」
휘릭.
카라반은 마치 장난치듯 제 손안에서 마검을 회전시켰다. 이진한은 잠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아직도 입을 열 여력이 남아있었나. 그래, 무슨 말을 할지 들어나 보자꾸나.」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의문인 산더미 같았다.
나인하임의 존재부터, 다른 이들 역시 자신처럼 이곳에 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그런 짓을 했고,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물어볼 곳이 없었으나, 천 년 전의 시간대를 살아온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너, 초월지경 아니지?”
하지만 이진한은 입가를 비틀며 조소를 보냈다.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은 녀석을 때려눕힌 뒤 물어보면 그만. 그렇기에 미심쩍은 의심을 말로 내뱉자, 카라반의 기운이 역류했다.
「감히-!」
이제껏 그렇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그의 가면이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단순히 도발하고자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카라반은 스스로 초월지경인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고 했지만, 이진한이 느끼기엔 무언가 부족함이 많았다.
마검을 중심으로 뿜어지는 농밀한 마기는 아이돈의 것보다 비슷한 기세로 경계할만한 대상은 맞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본인에 있었으니.
검의 구도자라 불릴 만큼 제법 실력이 있던 것은 분명했으나, 말 그대로 그 정도일 뿐이었다.
카라반이 정말로 초월지경에 올라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었었더라면 방금의 그 일격으로 자신은 치명상을 입어 빈사 상태에 빠졌을 터.
“아니면 초월지경에 올라도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던가.”
이진한이 이죽거리며 재차 도발을 이어나가자 그를 중심으로 지축이 흔들리며 새하얀 백발이 점차 하늘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
이진한은 그 너머 성소에서 이쪽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설령 소드 마스터인 레펠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싸움에 휘말린다면 촌각도 버티기 힘들었다.
「인질을 우려하는가.」
카라반 역시 이진한의 시선을 따라 성소 쪽에 흘깃 시선을 보냈다.
「내 비록 악마와 계약하며 타락했지만, 일찍이 검의 구도자라 불렸던 몸. 그런 구차한 짓은 하지 않으마. 대신…….」
파앗-!
검은 일선이 이진한의 지척까지 순식간에 쇄도했다.
수십 줄기의 검광이 한 호흡에 난무했고, 무차별적인 공격이 허공을 베어 가르며 이진한을 공격해왔다.
「네놈의 사지를 잘라 저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때까지 고문해주마!」
“…후.”
서슬 퍼런 그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진한은 짧은 숨을 내뱉으며 평정을 유지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제단의 효과로 억제된 지금 팔 하나를 잘린 것과 진배없는 위기.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각성의 기회로는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녀석이 초월지경에 오르지 못한 것은 분명해. 힘이나 기술로는 밀릴 수 있지만, 그 수준은 엇비슷하다.’
이진한은 슬쩍 몸을 낮춘 채 쏟아지는 공격들에 대비했다.
아껴놓았던 마나를 남김없이 끌어올리자, 용아청성창 위로 시퍼런 불꽃이 피어오르며 흑색 난무를 모조리 쳐냈다.
단 하나의 상처도, 단 하나의 실수도 없었다.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카라반은 짐짓 여유로운 태도를 지우지 않으며 마검을 들어 올렸다.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나 궁금하구나!」
팟-!
다시금 그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귓가에 스치는 파공성을 듣자하니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른 속도로 콜로세움 내부를 내달리고 있는 것일 터.
“…….”
이진한은 그 가운데 두 눈을 감은 채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언제 어느 방향에서 공격해오더라도 반응할 수 있게끔 대비했고, 이내 등 뒤쪽의 사각에서 떨어지는 강렬한 살기에 빛살처럼 창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위에서부터 내리찍은 마검이 용아청성창의 자루를 두들겼다. 동시에 그들이 서 있던 땅이 움푹 주저앉았고, 카라반은 흥이 난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지닌 재능도 제법이고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군. 천 년 전이라면 제자로 삼을 만하겠어!」
“누가 네놈 따위의 제자를.”
용아청성창이 마검의 검신을 타고 흐르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카라반의 가슴을 노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예상이라도 했는지 훌쩍 땅을 박찼고, 이진한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마검을 내리찍었다.
「물론, 잘 해봐야 그 정도라는 것이다.」
푹-.
그의 정수리를 꿰뚫는 감촉에 카라반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손맛은 확실했다. 설사 피하더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터. 하지만 이내 흔들리기 시작한 그 신형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말했잖아.”
정수리가 꿰뚫린 몸이 그림자로 변해 무너져 내렸다.
카라반은 제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하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흑백쌍야의 두 칼날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나왔다.
“그 하나로만 싸운다고는 한 적이 없다고.”
폴리모프 상태였다곤 하나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의 몸을 꿰뚫었던 검이다. 그 위에 농밀한 신성력을 담았으니 칼라반에게도 치명적인 것일 터.
“힘이랑 기술은 괜찮은데, 수가 얕아. 머리가 멍청한 건가? 이런 간단한 함정에 걸리다니.”
「네, 놈……!」
녀석이 내뱉는 처절한 절규만이 콜로세움 가운데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