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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44화 (44/210)

◈ 044.

횃불이 닿지 않은 벽이었다.

기사 중 한 명이 슬쩍 불빛을 기울이자 어둠이 물러났다.

이윽고 아흐라임의 손끝을 따라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이내 헛바람을 삼켰다.

“와, 왕자 전하!”

신을 부정하는 역십자.

그 구조물 위에 노르디움 왕자가 역십자와 같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 아래로 달려갔지만, 이내 멈춰서고 말았다.

역십자 아래에는 정체 모를 제단이 있었다.

그 가운데 비석으로 세워진 권좌가 자리했고, 기사들은 짙은 음영 속에서 누군가 그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

새하얀 백발의 사내였다.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은 창백한 얼굴 위로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어둠을 꿰뚫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기사들은 마치 밧줄에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격에서 오는 압박감. 트리플 헤드 만티코어와 마주했을 때도 받지 못했던 막대한 압박이 그들의 전신을 짓눌렀다.

「…이해가 가질 않는군.」

권좌 위에 턱을 괴고 앉은 사내는 의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네놈들 따위로 저곳을 넘어와 성소에 도달할 수 있었지?」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에 담긴 것은 순수한 의문이었으나, 기사들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말에 조용히 입술을 씹었다.

“본인은 페르포치아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인 레펠 알록시아드라 하오! 그대의 이름을 밝히시오!”

레펠은 날 선 표정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그토록 찾던 왕자가 저리 매달려 있는 가운데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던 것은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얼핏 보아도 경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

단지 시선이 마주하는 것만으로 전신이 오싹해지고 등과 손바닥에 절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더욱이 권태로운 모습으로 권좌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이 던전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는가.

「이름, 이름이라.」

사내는 레펠의 말에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연신 큰 웃음을 토해냈다. 그러곤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더니, 짙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아쉽게도 네놈 따위의 실력으로는 내 이름을 듣는 것이 불가능하겠구나.」

“…감히!”

그 말에 왕실 기사 중 제일 앞에 있던 이가 노호를 터트렸다.

레펠 알록시아드는 페르포치아 왕국을 대표하는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왕실 기사단의 일원으로 그 모욕에 분노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퍽-!

권좌에서 사라진 사내가 순식간에 그 기사 앞에 나타나 가볍게 발길질했다.

단지 그뿐인 움직임이었지만, 기사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피 분수가 튀었다.

“…….”

장내는 순식간에 침묵에 잠겼다.

왕실 기사들은 자신들 가운데 내려선 사내의 모습에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했고, 뒤에 있던 공략 대원들 역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경직되었을 따름이었다.

「주제넘은 짓을 하면 이리되는 것이다.」

사내는 머리를 잃고 쓰러진 기사의 몸을 짓밟으며 그 보랏빛 눈동자로 주위에 있던 이들을 응시했다.

「다만, 왕실 기사단이라 했나. 기개도 없는 놈들이군. 제 동료가 무참히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공포에 얼어붙어 있는 꼴이라니.」

“네, 네 이놈!”

옆에 있던 기사가 화를 참지 못한 채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검을 휘둘렀다.

찬란한 오러가 어둠을 베어 가르며 기다란 궤적을 일으킨다. 사내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눈앞에 둔 것처럼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말을 움직였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쉬이이익-!

일순간에 거리를 좁혀 온 레펠이 그의 바로 지척에서 검을 휘둘러온 것이었다.

사내는 몸을 돌려 제 등을 찌르는 기사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내고는 슬며시 발을 들어 레펠의 검을 막아 세웠다.

콱-!

“……!”

레펠의 두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사내의 발엔 아무런 기운도 둘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은 그가 무심하게 뻗은 발바닥에 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오러 블레이드로군. 네 딴에는 소드 마스터라고 꺼드럭거리면서 다녔겠지만, 나 때에는 감히 고개조차 들고 다니지 못할 수준이다.」

“큭!”

사내가 발에 힘을 주자, 레펠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트리플 헤드 만티코어와의 싸움에서 지친 탓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상대와의 격차가 너무나도 절대적이었을 따름이었다.

「뭐,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은 제물로 쓸 수 있겠군.」

사내의 다리가 휘둘러졌다.

음속을 넘어 마치 채찍처럼 허공을 때리며 자신에게 닥쳐온 그것에 레펠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검으로 공격해온 것도 아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였지만, 단순한 발차기조차 전부 읽어내지 못해 단순히 막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콰아아앙-!

레펠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가 성소의 벽을 부수며 박혀 들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 곧바로 잔해 가운데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으나, 사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귀찮다. 이만 죽어라.」

다리 끝이 다시금 허공으로 들렸을 찰나, 사내는 귓가에 들려오는 파공성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쉬이이익-!

예고는 없었다.

그만큼 갑작스럽게 닥친 기습에 그는 허공에 손을 뻗었고, 이내 시커먼 마기(魔氣)를 풍기는 검이 손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캉-!

일순간 검과 검이 부딪치며 피어난 불똥이 성소 안을 밝혔다.

사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과 검을 맞댄 상대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이진한은 입가를 비틀었다.

대현자의 눈은 레펠과 왕실 기사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눈앞에 서 있는 적에 대한 분석을 끝냈다.

Lv.1027 「카라반 얀센」

【타락한 검의 구도자】

【바포메트의 계약자】

‘검의 구도자라는 칭호답게 스펙 역시 육체 피라미터 쪽에 치우쳐져 있네.’

타락한 검의 구도자.

그 이름답게 카라반의 육체 스펙은 정점에 달해있었다.

어째서 타락했는지는 몰라도 인간일 적에는 제법 이름을 날리는 검사였을 터.

이진한의 시선은 그 밑에 있는 호칭을 향했다.

‘사바트는 몰라도 바포메트는 알지.’

염소, 혹은 산양을 모티브로 한 악마.

물론 거기서 더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길함과 저주의 상징으로 숭배되는 악마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가. 네 놈이 저 너머의 만티코어를 전부 죽이고 이들을 이곳까지 이끌었나.」

카라반 역시 이진한의 수준을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단 일격이었으나, 자신을 움찔하게 할 정도이니 현시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실력자일 터.

「검의 구도자, 카라반 얀센의 이름으로 묻겠다. 네놈의 이름은?」

이진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을 부수고 쓰러졌던 레펠은 왕실 기사들에게 도움을 받아 저 멀리 물러난 상태였다.

그 너머의 공략 대원들은 모두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과 카라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제너드의 놀람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이름이라.”

샤아악-.

머리를 뒤덮었던 찬란한 금발이 바라며 짙은 어둠을 품은 듯한 검은 색으로 물들어간다. 그 눈동자 역시 벽에 박힌 에메랄드 위로 이곳을 뒤덮은 어둠이 물들어가듯 깊은 심연이 드러났으니.

「…호오.」

흑발흑안.

보기 흔한 조합이 아니었기에 카라반이 감탄을 토해낼 찰나, 이진한은 그에게 검 끝을 겨누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악마에게 제 영혼을 판 타락자 주제에 구도자 운운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군.”

「…….」

그 말에 카라반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마검을 쥔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불쑥 솟아오른 것을 보니 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듯했다.

「…과연, 눈썰미가 제법이군. 허나 내게 모욕을 준 대가는…….」

이진한은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카라반이 이 던전의 열쇠가 되는 것은 거의 확실한 상황. 그러니 빨리 녀석의 목을 베고 이 지긋지긋한 던전을 나가고 싶었다.

쉬이익-!

이진한이 순식간에 지척까지 쇄도한 후, 날카롭게 검을 베어 가르자 카라반은 말을 황급히 말을 멈추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간발의 차이로 그 공격을 피해낸 카라반은 두 눈을 가늘게 떴고, 더는 그 오만한 행태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듯 마검의 기세를 부풀렸다.

쿵-!

다시금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부딪쳤다.

이전과 사뭇 다른 파공성이 터짐과 동시에 성소 안이 흔들리며 작지 않은 충격이 그들을 중심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다들 물러나!”

겨우 상태를 회복한 레펠이 다급하게 외쳤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조차 저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소드 마스터인 자신조차 이러할진대, 다른 이들이 그것에 휘말린다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이 분명했다.

「보아하니 검에 자신이 있나 보군.」

카라반은 보랏빛이 번뜩이는 눈동자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강자에 대한 열망과 동시에, 오랜만에 다가올 피 튀기는 사투의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사실 내 주력은 마법이지만.”

이진한은 그런 카라반을 보며 제 검을 비틀었다.

“딱히 밀릴 것 같진 않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으로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잡기에 가까운 기예였지만, 카라반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제 코앞까지 다가온 이진한의 모습에 살벌한 투지를 불태웠다.

「내 비록 구도자의 몸으로 타락했다곤 하지만, 강자와의 싸움은 언제나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카라반은 물러나지 않은 채 오히려 자신의 몸을 들이밀었다. 그 때문에 이진한의 검에 옷의 가슴팍이 잘려 나갔지만,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며 마검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피가 들끓는구나!」

콱-!

카라반은 마검의 손잡이 끝에 농밀한 마기로 이루어진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가슴팍을 베어 들어온 검을 막아냈다.

생각지도 못한 기술에 그가 두 눈을 찌푸렸을 찰나, 카라반은 이진한이 했던 것처럼 제 몸을 돌리며 무게중심을 상대 쪽으로 이동시켰다.

「검의 구도자라 불렸던 몸이다. 이런 것 정도도 해내지 못했다면 내 위명을 꺾기 위한 수많은 도전자 앞에 진작 무릎을 꿇었겠지!」

순식간에 흐름을 빼앗겨 버렸다.

자칫 잘못한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상황. 그렇기에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검을 놓아버린 채 뒤로 물러났다.

「……?」

오히려 당황한 것은 카라반이었다.

검사가 검을 버린다니?

검사에게 있어 검은 제 자존심이자 또 다른 영혼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진한이 검을 놓아버리는 데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고,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네놈, 어째서 검을 놓아버린 것이냐.」

“위험했으니까.”

「…설령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검사가 검을 버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진한은 피식 웃은 채 허공으로 팔을 뻗자 그 손엔 언제 꺼내 들었는지 모를 푸른 창 하나가 쥐여 있었다.

“난 검만 쓴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용아청성창 전용 스킬 「만운천뢰(萬雲天雷)」.

만상이 진동하고, 파괴되어 비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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