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3.
“읏!”
마법사인 그녀의 신체능력으로 도망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마법으로 제 신체를 강화해 속도를 올려 봐도 만티코어의 추격을 뿌리치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타다다다다닥-!
그 순간,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미르엘이 전력으로 땅을 박찼다.
그녀는 만티코어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인 주인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역수로 쥔 검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베르너님이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빙결의 권능.
브레스트 가문의 혈계 전승으로 이어져 온 능력이 그녀의 핏줄을 타고 활성화됐다.
저저저적-!
주변의 기온이 삽시간에 내려가며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음 결정이 생겨나 미르엘의 권능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 날카로운 파공성에 허공을 꿰뚫었다.
퍽-! 퍽-!
무언가 터져 나가는 파열음이 콜로세움 가운데 울려 퍼짐과 동시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동시에 잡아먹을 듯 닥쳐왔던 만티코어의 몸이 저만치 밀려났다.
크어어어엉-!
만티코어는 제자리에 멈춰선 채 몸을 비틀었다.
그 왼쪽 머리의 두 눈이 파괴된 것이었다.
“이놈!”
그 사이 겨우 그들을 따라잡은 레펠이 만티코어가 더는 날뛰지 못하도록 그 몸을 찍어 누르며 압박했다.
“고전하고 있네.”
“…베르너님!”
언제 자신들을 따라온 것일까.
금발 머리를 흩날리며 자신들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진한이 바닥에 엎어진 둘의 몸을 안아들었다.
“상처는?”
“없어요. 미르엘 덕분에.”
“저도 없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아직도 간담이 떨리는지 깊은 한숨과 미소로 이진한의 귀환을 반겼다.
물론, 일레이나는 그런 그의 등을 철썩철썩 때리며 격한 모습으로 타박했다.
“…당신! 정말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여기는 제 마법도 잘 발동이 안 돼서 더 힘들었는데!”
“그래도 어찌 여기까지 잘 왔네. 설마 날 앞질렀을 줄은.”
“어디에 계셨어요?”
“저 안쪽의 공동을 지나왔지? 만티코어를 쓸어버리고 쉬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너희들이 벌써 지나갔더라.”
“…거기서 잠이 오셨어요?”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 노가다를 하면 정신적으로 지친다고. 너희가 이쪽으로 내려오는 게 느껴져서 대충 정리하고 조용히 합류하려 했는데 설마 이렇게 될 줄은.”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콜로세움에 트리플 헤드 만티코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공략대의 전력으로는 상대하기 버거울 테니, 자신이 조금 도움을 준다면 어렵게나마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들을 기다린 것이었다.
“일단 저기부터 도와줘야겠네.”
레펠을 필두로 왕실 기사단과 공략 대원들이 기를 쓰며 만티코어의 광분을 억누르려 애썼다.
하지만 그 이빨은 날카로웠고, 발톱은 빨랐으며, 꼬리는 치명적이었다. 어느 것 하나 방심할 수 없는 요소였기에 섣불리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척.
이진한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먼 거리에서 화살을 날려대는 모험가와 용병도 더러 있었지만, 오러 블레이드도 막아내는 그 몸을 직접 꿰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눈이나 배 안쪽 같은 급소를 노리며 그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이진한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쉬이익-!
그가 쏘아낸 화살은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맹렬한 기세를 토해내며 순식간에 공기를 갈랐다.
이윽고 만티코어의 몸에 닿은 화살은, 적지 않은 충격과 함께 털과 살을 꿰뚫고 박혀들었다.
“…그건.”
일레이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자,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재차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오러 블레이드도 통하지 않는데, 마법사인 내가 그것을 뚫어버리면 눈에 띄잖아.”
보우 마스터 스킬 「팬텀 애로우」
말 그대로 화살이 보이지 않게 하는 단순한 스킬이었지만, 정점에 다다른 그 능력치가 화살의 위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이진한은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레펠이나 공략 대원들이 위험해질 때마다 요소요소에 지원을 해주었고, 이내 자신의 뒤쪽에 있던 셋을 바라보았다.
“강해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저 녀석을 남겨둔 건데.”
“…그렇지 않아도 나설 참이었어요.”
일레이나는 제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아끼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이진한이 돌아온 이상 거리낄 여유는 없었다.
파아아앗-!
시뻘건 불덩이가 천장에서부터 생겨나 만티코어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엘레오노라 역시 미약하지만, 그 공격에 가세했고 미르엘은 둘의 앞을 지키며 검을 세웠다.
푹-.
몇 시간에 이어진 끝에 레펠은 처음으로 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직전까지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 하던 만티코어의 오른쪽 머리에 힘껏 검을 박아 넣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크어어엉-!
뭉개진 눈 위로 짙은 체액이 뿜어져 나왔다. 레펠은 훌쩍 그 머리에서 뛰어올라 지상에 착지했고, 지친 공략대를 다독였다.
“거의 다 끝났습니다! 녀석도 지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요!”
만티코어가 비틀거리며 물러났을 찰나, 겨우 얻은 천금같은 여유에 레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던전 안에 들어온 직후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순간이었다.
마나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고, 팔다리는 무쇠를 찬 듯 무겁기 짝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쓰러지면 공략대가 끝인 것을 알기에 의지를 북돋우며 검을 세웠다.
‘그리고…….’
레펠의 시선이 슬쩍 저 뒤쪽으로 향했다.
뒤따라온 것인지 실종되었던 레이먼이 어느새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라면 신경 쓸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활시위를 놓을 때마다 만티코어의 몸이 들썩이며 일순간이나마 움직임이 멎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공략대의 피해는 지금보다 서너 배는 더 컸을 터.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자신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화살을 쏘아대는 것도 그렇고, 오러 블레이드조차 막아내는 그 몸을 손쉽게 꿰뚫는 것도 그렇고 평범한 마법사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나도 질 수 없지…!”
레펠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웠고, 그렇게 한 시간도 더 이후에 결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쿵-.
하나 남은 머리가 반쯤 쪼개진 만티코어가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그 생명이 다했음을 알려왔다.
하지만 공략 대원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쓰러진 척하면서 다시 일어나 덤벼든 것이 벌써 몇 번이었다. 천천히 녀석에게로 다가간 레펠을 역수로 잡고 그 미간을 푹 찔렀다.
생겨난 상처를 따라 녹색 체액이 뿜어지며 난리가 났지만, 만티코어의 몸은 조금 움찔했을 뿐 다시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후우…….”
그가 한숨을 내쉬며 물러서자 뒤에 있던 이들은 그제야 지친 기색으로 땅에 벌러덩 누웠다.
처음 때와는 달리 환호도 없었고, 신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공략대에는 처음으로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왕실 기사 중에선 둘이 죽고 다섯 다쳤다.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은 한 명의 용병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짓이겨졌고, 적색 마탑 쪽은 만티코어에 잡아 먹혀 죽은 동료에 다른 둘이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험가 쪽 역시 다섯이 사망했고, 부상자도 더러 있었다.
교단의 사제들과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마법사들이 그사이를 오가며 부상자의 치료를 했다.
“난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치료해주시지요.”
사제 한 명이 지친 기색으로 벽에 기대어 있던 레펠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상처라곤 찰과상 정도였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육체는 그마저도 금세 회복해나갔으니 머지않아 멀쩡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콜로세움, 만티코어가 웅크리고 있던 너머로 또 하나의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쯤 목적을 이루고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그 뒤에선 이곳보다 강한 적이 도사리고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트윈 헤드 만티코어가 몇 마리씩 나오고 그런 일은 없겠죠?”
엘레오노라가 불안하단 눈빛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일레이나와 미르엘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사바트의 성소(聖所)」
성소(聖所)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공간을 뜻했다. 그렇다는 것은 즉, 저 문 너머는 무언가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라는 뜻이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은데.’
고인 물로서의 감각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던전의 ‘진짜’는 바로 저곳이라고.
“…일단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저와 기사들만 잠시 저 문을 살피고 오지요. 혹시, 도와주실 분이 계십니까.”
레펠의 물음에 제너드를 비롯한 모험가 몇몇과 이진한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그래도 이만한 적을 쓰러뜨렸는데 곧바로 무언가가 튀어나오진 않을 것이리라.
모두 비슷한 생각을 품으며 굳게 닫힌 문으로 다가갔고, 천천히 그것을 열었다.
“…….”
안쪽 역시 지나온 공동처럼 어둡기 짝이 없었다.
레펠은 수하에게서 건네받은 횃불로 슬쩍 안을 비췄고,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아흐라임경?”
그 바닥 가운데 누군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레펠은 그 얼굴과 복장이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쓰러진 이를 안아 들었다.
“…이건.”
뒤따라 들어온 기사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닥에 쓰러진 것은 아흐라임 한 명이 아니었다. 1차 조사대로 온 이들 중 스물에 가까운 이가 의식을 잃고 그 가운데 누워 있었다.
“…왠지 저번에 갔었던 검은 현자의 유적지랑 비슷한 느낌인데요.”
“느낌은 비슷한데, 용도는 다른 곳 같네.”
「사바트의 성소(聖所)」
이진한은 제 시야 한쪽에 떠오른 그 이름을 노려보았다.
‘사바트, 사바트.’
대체 무슨 뜻일까.
머리로 궁리해보아도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뒤쪽의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사바트가 무슨 뜻인지 알아?”
“사바트요?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레이나와 미르엘은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답했다.
그렇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은 채 엘레오노라를 바라보자,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겨우 떠올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고대 제국어로 안식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요. 지금은 쓰지 않는 사어(死語)에요.”
“사어?”
“네. 지금은 없는 단어에요. …고대라면 모를까. 저도 제국 역사를 배우면서 곁가지로 보았던 말이네요.”
고대라면 자신이 활동할 당시의 언어라는 것이었다.
“안식일이라.”
안식일의 성소?
그다지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은 아니었다. 그렇게 이진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품을 찰나, 레펠은 조사 대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다들 쇠약해진 상태로 의식은 잃었으나 목숨엔 지장이 없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인원보다 현저하게 줄어든 숫자였지만, 그래도 생존자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법 고무적인 사실이었다.
“다행이네요. 더 별일 없이 끝낼 수 있어서.”
일레이나가 지쳤다는 듯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지만, 이진한은 모호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기는 힘들 것 같네.”
“왜요? 또 뭐가 있어요?”
“아니. 왕자가 없잖아.”
“아.”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가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쓰러진 이들 가운데 그 어디에서도 왕자를 발견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레펠을 비롯한 왕실 기사들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굳힌 채 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으…….”
레펠이 제일 처음 발견한 아흐라임은 사제의 치유 가운데 신음을 내뱉으며 겨우 의식을 각성했다.
“아흐라임경! 정신이 드는가!”
“…레, 레펠 부단장님.”
힘이라곤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맥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레펠은 개의치 않고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나일세! 자네들을 구하러 왔어! 왕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
그 물음에 아흐라임의 두 눈이 공포로 뒤덮였다. 동시에 몸을 덜덜 떠는가 싶더니, 레펠의 재촉에 천천히 손을 들어 그들 앞쪽에 있던 벽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