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2.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지하로 이어진 것 같군요.”
공략대는 총 이틀에 걸친 여정 끝에 다음 관문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했다.
레펠은 던전 탐사를 비롯한 실전에 경험이 많아 공략과 휴식의 완급 조절이 뛰어났다. 그렇기에 공략대 중 탈락자는 아직 찾지 못한 이진한을 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틀 전에 말씀드렸지만, 이 앞부터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다들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합니다.”
고요한 침묵 가운데 그의 경고만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다들 몸에 힘이 들어갔고, 자연스레 경직된 분위기가 이어졌다.
‘아직 시체는 보이지 않았어. 하다못해 그 잔해라도 남아있어야 정상인데.’
일레이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까지 살폈음에도 아무런 흔적도 없다는 것은 조사대가 이 너머까지 도망쳤다는 뜻.
전에 있었던 세 마리의 만티코어를 어떻게 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 가능성이 제일 커 보였다.
“보물이라도 있으면 좋겠군.”
“그거 좋네. 보상도 짭짤하긴 하지만, 이런 던전의 별미는 그런 부수입이지.”
밑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쭉 나아갔음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공략대 사이로 슬며시 여유가 깃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백의 몬스터와 세 마리의 만티코어를 쓰러뜨린 것으로 사기가 올라 있었다.
어지간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의 발걸음을 막기 힘들 것이라는 자신감이 팽배해 있었다.
“…이건.”
공략대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던 레펠은 돌연 발걸음을 멈춰 섰다.
한없이 이어지던 길이 어느새 끝을 맞이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커다란 철문으로 마치 궁궐에나 있을 법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
그 위용을 눈앞에 둔 공략 대원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이전처럼 시시껄렁한 농담을 내뱉을 사람은 없었다.
“…진입하겠습니다.”
레펠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실 기사들이 문에 달라붙어 천천히 그것을 밀어나갔다.
뒤쪽에 있던 공략대는 감각을 날카롭게 가다듬었고, 혹시나 모를 습격에 대비하며 무기를 쥐었다.
구우우웅-.
거대한 문이 열려간다. 동시에 뜨거운 바람이 훅하고 그들을 향해 부닥쳤고, 이내 누구랄 것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썩는 냄새군.”
“깊은 지하라 그런 건가? 하지만 이 전까지는 이렇지 않았는데.”
문 너머에 펼쳐진 공동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소드 마스터인 레펠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것이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칠흑은 어째서인지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마치 유혹의 손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이의 정신을 빼앗으려 하는 것 같았다.
“…들어갑시다. 이곳에서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수도 없으니.”
짧게 숨을 토해낸 레펠이 먼저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전과 달리 빛을 내뿜는 에메랄드가 박혀 있지 않았기에 공략대는 부득이 횃불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제 옆으로.”
“알았어요.”
미르엘은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엘레오노라의 앞을 지키고 섰다. 그 옆에 있던 일레이나는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 내려 했으나, 위층보다 마법의 제약이 더 강한 것인지 한 줌의 마나도 모이지 않았다.
찰박.
횃불을 든 채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가던 레펠은 곧 질퍽한 땅과 만났다. 바로 앞에 지하수라도 흐르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불빛에 비친 그 색이 진한 녹색인 것을 보곤 입을 벌렸다.
“…이건.”
레펠은 황급히 그 원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성큼성큼 발을 내디딘 덕분에 머지않아 그곳에 도달했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잊었다.
“부단장님!”
그가 갑작스럽게 앞으로 치고 나가자 왕실 기사들이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황급히 쫓아왔다.
따라오던 공략대 역시 덩달아 속도를 높였고, 이내 우두커니 서 있던 레펠의 근처로 도달할 수 있었다.
“무슨 일 입니…….”
기사 중 한 명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할 찰나, 그들이 들고 있던 횃불에 의해 주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만티코어의 머리였다.
누구랄 것 없이 흠칫하며 검을 쥐었지만, 이내 그 눈동자에 생기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머리가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이 만티코어의 머리를 짓밟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산혈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시체는 산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었고, 그 밑으로 흘러나온 녹색 체액은 작은 강을 이루어 낮은 지대로 흐르고 있었다.
“냄새만큼이나 지독한 광경이군요.”
미르엘은 두 눈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 슬쩍 제 주인을 향해 시선을 보내자, 엘레오노라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베르너님이시겠지.”
얼핏 보아도 수십 마리가 넘어 보이는 숫자였다.
먼저 이곳에 들어온 1차 조사대의 전력으로는 한두 마리조차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니 공략대에서 사라진 그가 우연히 이곳으로 들어와 싹 쓸어버렸다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을 터.
“…….”
레펠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선 채 어찌하면 좋을지 맹렬하게 고뇌했다.
주변에 보이는 것만 수십 마리다. 잘 보이진 않지만, 음영이 진 것으로 보아 저 안쪽에 있는 것까지 모두 합한다면 세 자릿수는 가볍게 넘을 것이 분명했다.
자기들끼리 싸운 것은 아닌 듯해보였으니 이 근처에 만티코어 무리를 쓸어버린 괴물이 있다는 소리였다.
앞쪽에서 레펠과 같이 상황을 살피던 일레이나는 슬쩍 뒤로 빠져 엘레오노라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 같죠?”
“네. 샛길로 먼저 들어오셨나 보네요.”
“그래도 이 숫자는 정말로…….”
일레이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의 사용이 제한되었으니 온전히 육신의 힘으로만 이것들을 쓰러뜨렸다는 소리가 아닌가.
정말로 기가 찰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강함이었다.
“돌파하겠습니다.”
레펠은 공략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차피 이곳까지 들어온 이상 뒤로 물러나도 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그러니 어디에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괴물과 마주치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찰팍, 찰팍.
바닥에 고인 녹색 체액이 터져 나가며 가쁜 발걸음 소리를 사방에 울렸다.
그들은 행여나 만티코어를 찢어발긴 괴물과 마주칠까 싶어 발걸음을 서둘렀고, 삼십 분에 가까운 주파 끝에 공동이 끝나며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후우…….”
하나같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사체가 지나온 길 위로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어떤 괴물이 저런 흔적을 남겼을까 하는 의문보다는, 그저 그 존재와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에 각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설마 저 앞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적막한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휴식을 취하던 이들은 슬쩍 고개를 들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가야할 길은 뒤쪽의 공동과는 달리 다시 벽 위로 푸른 에메랄드가 박혀 있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누군가 지나간 흔적은 없습니다. 어쩌면 저 안쪽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모험가 중 한 명이 손으로 땅을 훑으며 가늘어진 눈으로 말했다.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은 풀리는 눈치였다.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준비하십시오.”
레펠의 말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 있던 이들이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다시 앞으로 나아갔고, 이어진 길 끝에서 또 다른 경관이 그들을 맞이했다.
“…콜로세움?”
왕실 기사 중 누군가 중얼거린 그 말에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 그리고 미르엘의 몸이 움찔했다.
그렇기에 황급히 앞으로 나아갔고, 정말로 콜로세움처럼 자리한 원형 구조물을 볼 수 있었다.
“저 가운데에 있는 건…….”
사슬에 묶인 무언가가 콜로세움 한가운데에 웅크리고 있었다.
만티코어보더는 배는 더 큰 덩치로, 그 양옆에 머리가 하나씩 더 달려 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저건.”
“저것이야 말로 베히모스인가?”
다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자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일레이나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원래보다 덩치가 크고 머리가 두 개 더 달려있긴 하지만, 만티코어에요.”
고대 마수 베히모스와 직접 싸워봤던 그녀는 아직 그 압박감을 잊지 못했다.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흉포한 살기, 인간을 뛰어넘는 지성, 자신이 발한 모든 마법이 부정당하며 이때까지의 경험이 허무로 돌아가는 그런 무력감.
눈앞에 있는 트리플 헤드 만티코어 역시 강해보이긴 했지만, 베히모스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다.
“머리가 세 개니 세 배 강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
“세 마리와 싸우는 것보단 낫겠지. 몸은 하나잖아.”
사슬에 묶인 트리플 헤드 만티코어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공략대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작전 회의 끝에 움직임을 개시했다.
“…….”
레펠이 제 검을 들고 경계하는 가운데,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이 천천히 콜로세움 가장자리를 타고 넓게 퍼져나갔다.
그들은 제각기 쥐고 있던 밧줄을 던졌고, 위쪽의 만티코어를 상대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녀석의 팔다리와 몸 구석구석을 옭아맸다.
뒤따라 움직인 모험가들이 그 뒤로 다가가 밧줄을 동여 잡았고, 금방이라도 움직일 끝낸 뒤 레펠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정면에는 왕실 기사들이 다시금 커다란 방패로 벽을 쌓았고, 마법사들은 겨우 움직이기 시작한 마나를 쥐어짜 그 위에 실드를 둘렀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레펠은 천천히 그들을 지나 콜로세움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만티코어 앞에 도달한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검을 들어올렸다.
‘더 기괴한 모습이구나.’
하지만 머리가 두 개 더 달렸다고 한들, 소드 마스터인 자신의 검을 막아내긴 힘들 터.
조금 고전하겠지만, 이전에 쓰러뜨렸던 세 마리와 같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파아아앗-!
새하얀 오러 블레이드가 한계치까지 몸을 부풀린다. 레펠은 행여나 만티코어가 반응할까 싶어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고, 그 몸을 베어 갈랐다.
쿵-!
손 위로 묵직한 충격이 들이닥쳤다.
피륙을 베어낼 때와는 조금 다른 감촉에 레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크르르르-.
분명 조금 전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던 만티코어의 머리가 전부 두 눈을 부릅뜬 채 날 선 눈빛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레펠의 검은 그 중 가운데 머리의 이빨에 잡힌 상태. 그는 안간힘을 쓰며 제 검을 빼내려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겨!”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의 조장인 가나온이 그것을 보곤 황급히 외쳤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이들이 만티코어의 몸을 옭아맨 밧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쿵-.
느슨해져 있던 줄이 팽팽해지며 만티코어의 몸이 밑으로 주저앉았다. 사방에서 당기는 힘 탓에 만티코어는 잠시 주춤거리는 듯 했으나, 이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주변으로 흉포한 살기를 터뜨렸다.
“흡!”
레펠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왼손을 휘둘러 만티코어의 이빨을 벌려내곤 억지로라도 제 검을 빼냈다.
자칫 잘못하면 팔이 잘릴 위험이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 삼아 역공에 나섰다.
파아아앗-!
찬란한 빛이 다시금 콜로세움 안에 떠올랐다. 이윽고 매서운 기세로 휘둘러진 검이 만티코어의 몸을 베어 가르는 듯싶었지만, 검날은 그 커다란 몸을 뒤덮은 털조차 베어내지 못했다.
“무슨!”
레펠은 경악을 터트리며 황급히 땅을 박찼다. 그 직후 그가 서 있던 자리 위로 만티코어의 앞발이 날카롭게 내리꽂혀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크어어어엉-!!!
만티코어는 제 몸을 귀찮게 하는 모든 것들에 분노를 토해냈다.
이윽고 놈이 힘껏 땅을 박차자, 몸을 구속하던 사슬이 끊어지며 밧줄을 잡고 있던 이들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넘어지거나 딸려가고 말았다.
“피, 피해!”
레펠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지만, 만티코어의 속도를 따라잡긴 역부족이었다.
벽을 만들어내던 왕실 기사들은 레펠의 외침에 몸을 던지며 도망쳤지만, 그 뒤에 있던 마법사들은 딱 좋은 표적이 되었다.
“끄아아악-!”
제일 먼저 당한 것은 적색 마탑의 마법사였다. 그는 오러 블레이드조차 막아내는 만티코어의 날카로운 이빨에 씹혀 순식간에 절명하고 말았다.
쿵-쿵-!
만티코어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 재차 몸을 날렸다. 뒤이어 모험가 길드의 마법사 한 명이 명운을 달리했다.
모두가 그 잔혹한 참상 가운데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가운데, 놈의 시선이 제 바로 앞에 있던 엘레오노라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