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0.
이진한이 함정을 건드려 지하로 추락했을 무렵, 레펠은 육포를 씹으며 베히모스전을 상상하고 있었다.
‘대비는 충분히 했다. 만일 일레이나 마도사의 말대로 그보다 하위종인 만티코어라면 피해 없이 수월하게 잡을 수 있겠지.’
그들은 왕자의 구출에 눈이 멀어 무작정 던전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밀도 있는 조사를 했고 충분한 준비와 전략을 구상한 끝에 진입을 결정했다.
던전에 갇히게 될 거란 예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이르니 살짝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도록. 상대는 고대로부터 마수라 불렸던 놈이다. 필시 쉬운 상대는 아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던 수하들이 자신의 뒤를 바쳐주었다는 것이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온 그들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려 할 때, 레펠은 돌연 앞쪽에서 느껴지는 이변에 자리를 벌떡 차고 일어났다.
“베히모스가 움직였다! 전투 준비!”
그 말에 늘어져 있던 공략대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깃들었다.
다들 레펠과 같이 벌떡 일어났고, 제 무기를 꼬나쥐며 다가올 격전을 기다렸다.
“…그 사람이 사라졌다고요?”
“네. 잠깐 뭘 보고 온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돌아오시질 않네요.”
전투에 대비해 후미로 물러난 일레이나는 자신에게 은밀히 전해온 엘레오노라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싸움이 코앞인데 또 어딜 갔단 말인가. 아니면 정말로 격렬한 상황을 연출해내려고 일부러 몸을 숨긴 것인가.
‘아무튼 헛짓할 위인은 아니니까.’
일레이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신경을 거뒀다.
만티코어가 떼거리로 몰려와도 상처 하나 없이 전부 쓰러뜨릴 사람이었다.
지금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까지 다가온 적을 어떻게 피해 없이 상대하냐는 것. 그렇기에 고개를 휘젓는 것으로 쓸데없는 신경을 털어내며 말했다.
“어차피 그 사람이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죠. 저희는 일단 만티코어를 쓰러뜨리는 데 집중하죠.”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쿵, 쿵, 쿵, 쿵.
이윽고 저 어둠 너머에서 육중한 몸체를 지닌 존재가 지척에 이른 소음이 들려왔다.
네 발로 땅을 박차며 어지간한 짐승보다 빠른 속도로 쇄도한 그것은 이내 자신 앞에 자리한 60여명의 인간을 보더니,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오를 정도로 섬뜩해지는 기세였다.
선두에 선 왕실 기사가 살짝 가쁜 숨과 함께 검을 다잡았을 때, 레펠은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들 앞에 닥친 마수를 바라보았다.
‘뱀이 아닌 전갈의 꼬리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녀의 말대로 베히모스가 아니라 만티코어?’
그 생각은 만티코어를 중심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이질적인 기류에 깨어져 나갔다.
“…이건!”
“불꽃을 토해내려는 거예요!”
일레이나의 날카로운 외침에 왕실 기사들은 제 망토 뒤에서 널찍한 방패를 꺼내 들었다.
마치 벽을 쌓듯 빈틈없이 뭉치기 시작했고, 그 위로 마법사들의 마법과 사제들의 가호라 서리며 굳건함을 더했다.
화아아아아앗-!
만티코어의 입에서 토해진 시뻘건 화염이 사방을 휩쓸었다.
던전의 천장과 벽이 더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문드러져 흘러내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이 정도면.”
상정한 범위의 안쪽이다. 레펠은 검을 다잡은 채 날카로운 눈으로 불꽃을 전부 토해낸 만티코어를 바라보았다.
“기사단 전위 유지! 나머지는 작전대로 움직이도록!”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이었다.
주변에 일렁이는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 위로 발을 내디딘 그들의 손에는 굵은 밧줄이 들려있었다.
휘리릭-!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티코어를 향해 밧줄이 던져졌다. 마치 채찍처럼 솜씨 좋게 그 몸을 휘감은 용병들은 익숙한 모양새로 자리를 잡곤 그것을 잡아당겼다.
“과연.”
그 일사불란한 모습에 레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의 활동 지역은 남부 게헤라 사막. 그런 만큼 열기에 대한 내성이 강하며, 만티코어 같은 덩치가 큰 마수를 상대하는 데 전문적이었다.
굳이 저 멀리 있는 그들을 비싼 돈 주고 모셔온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으니.
“찍어눌러!”
모험가들도 그 뒤로 합세해 같이 밧줄을 잡아당겼다.
크어엉-!
일반적인 밧줄이라면 만티코어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가볍게 찢겨 나갔을 터이지만,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이 사용하는 것은 특수한 처리가 된 것이었다.
어지간한 철심보다 질겼고 열기에 강했으며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후우우-!
만티코어가 재차 입을 벌렸다.
또다시 화염을 내뱉어 사방을 휩쓸어 버리려는 모습이었으나, 허공에 생겨난 얼음 결정이 녀석의 입을 봉했다.
“구속은 잠깐이에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일레이나가 만들어준 찰나의 기회, 레펠은 이미 예열을 끝내고 전신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린 뒤였다.
파아앗-!
찬란한 빛이 그 검 위로 서렸다.
레펠은 힘껏 땅을 박차고 나가 일행 사이를 가로질렀고, 이내 허공으로 도약해 날아올랐다.
“알록시아드류-.”
페르포치아 왕국 제일가는 검의 명가인 알록시아드 가문의 절기가 그 끝에서 터져 나왔다.
알록시아드류 십이식, 가드레아(Gard Leia).
휘몰아치는 섬광이 떨어져 내리며 막, 제 입을 봉인한 얼음 결정을 부숴낸 만티코어의 머리를 강타했다.
쿵-!
타격이 큰 것인지 만티코어가 딛고 선 바닥 위로 쩌적 균열이 임과 동시에 그 거체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흡-!”
레펠은 다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큰 기술을 사용해 마나의 소모가 컸지만, 물러나지 않았고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렇게 한 시간쯤 뒤.
쿵-.
이윽고 그 검이 두꺼운 살과 질긴 근육, 그리고 단단한 뼈를 꿰뚫고 미간에 박혀 들었을 때가 돼서야 만티코어는 움직임을 멈춘 채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사방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만티코어는 어떻게 해서든 밧줄의 속박을 뿌리치려 제 몸을 던져 바닥을 구르거나 벽을 들이박았다.
하지만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과 모험가들은 끝까지 그것을 놓지 않았고, 만티코어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긴장을 풀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젠장, 더럽게 질기군.”
“내 생에 이렇게 악독한 녀석은 처음이네.”
“그래도 어떻게든 쓰러뜨렸으니.”
공략대는 모두 들뜬 기색이었다.
비록 베히모스는 아니었지만, 만티코어라는 마수를 쓰러뜨린 것만 해도 큰 공적이었다.
묵직한 보수와 명성은 덤이었기에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흠.”
그 가운데 오롯이 서 있던 레펠은 속으로 나지막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베히모스니 만티코어니 모두 만만치 않은 무게를 주는 이름이었지만, 큰 피해 없이 쓰러뜨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 던전 어딘가에 있는 노르디움 전하와 조사대를 찾기만 한다면…….’
던전의 터주대감인 만티코어가 쓰러졌으니 더는 자신들의 앞길을 막을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 앞에서 느껴지는 한 쌍의 불온한 기척에 그의 얼굴이 굳었다.
“…부단장님? 왜 그러십니까.”
동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왕실 기사 한 명이 제 상관의 경직된 표정을 발견하곤 의아한 모습으로 물었다.
만티코어는 쓰러졌다. 이제 왕자를 구출해 명성을 알리는 일만 남지 않았던가. 하지만 레펠은 느슨하게 쥐고 있던 검을 다잡은 채 나지막하게 공략대에 고했다.
“모두, 전투 준비.”
“……?”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공략 대원들은 각각이 베테랑답게 반론하지 않은 채 다시 무기를 다잡고 일어났다.
레펠은 입술을 씹으며 그들을 돌아보았고,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만티코어는 한 마리가 아니었나 봅니다.”
어둠 속에서 두 마리의 만티코어가 재차 모습을 드러냈다.
***
쪼르륵-.
허공에서부터 운디네가 만들어낸 청량한 물줄기가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이진한은 그 위에 두 손을 내밀고는 물을 받아 제 얼굴을 문질렀다.
정령 마법도 마법 취급을 받는지 그 효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심지어 밑으로 내려갈수록 그 제약이 커지는 것인지 마법은 아예 발동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
시원한 물로 얼굴을 씻어낸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자욱하게 깔린 어둠 사이를 바라보았다.
대현자의 눈은 이제 어렵지 않게 그것을 간파했고, 제 앞에 남은 일백의 만티코어들이 처음의 기세와는 다르게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찔꺽.
잠시간 바닥에 꽂아두었던 용아청성창과 용살검의 손잡이를 쥐자 그 위에 묻어있던 찐득한 체액이 절로 불쾌함을 유발했다.
“…으.”
기껏 손을 씻어낸 것이 물거품으로 되돌아갔다.
잠시간 찌푸린 얼굴로 그것을 바라본 이진한은 짧게 숨을 토해내곤 고개를 들어 아직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짓이겨진 살점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다. 개중엔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도 있었고, 운이 좋게도 비교적 형태가 남아있는 것도 있었다.
바닥에 고인 녹색 체액은 강이 아니라 늪을 이루었다. 그 안에서 물장구라도 친다면 점성이 진한 그것들이 금세 온몸을 잡아먹을 것처럼 옭아맬 것이었다.
위쪽에 있는 공략대가 막 새로이 나타난 두 마리의 만티코어와 교전 중일 때 이진한은 약 이백여 마리에 달하는 만티코어를 쓰러뜨린 직후였다.
“오랜만의 노가다라 힘드네.”
다수를 상대하는 데 가장 효율이 좋은 것은 마법이었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봉인 당한 지금은 직접 발품을 파는 것밖에 없었다.
더욱이 만티코어는 애매하게 강했고, 질겼으며, 회복 능력이 좋았다.
제대로 숨통을 끊지 않으면 시체 사이에 숨어 있다가 몸을 회복한 뒤, 다시 덤벼왔기에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음.”
이진한은 천장을 노려보았다.
아쉽게도 단번에 어둠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처럼 다른 층을 볼 수 없는 듯했다.
‘그래도 여차할 때를 대비해서 준 게 있으니.’
일레이나나 미르엘은 모르겠지만, 엘레오노라에게 은밀히 넘겨준 아티팩트가 있었다.
강력한 베리어를 만들어내는 반지로, 만티코어 몇 마리가 몰려와 공격한다고 해도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강도를 지닌 것이었다.
자신이 차고 있는 다른 한 쌍에서 아직 별다른 신호가 없었으니 그 정도로 몰릴 상황은 아니라는 것일 터.
“한 마리는 여유롭게 잡겠고, 두 마리부터는 조금 버거우려나.”
그런 상황 가운데 혹시라도 어찌어찌 공략에 성공해 약 삼백여 마리의 만티코어가 있는 이곳으로 내려온다면 어떻게 될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선발대가 함정에 빠져서 이곳으로 떨어진 거라면…….”
넓은 공간이기는 했지만, 삼백여 마리의 만티코어를 피해 달아날 가능성은 현저하게 적을 터.
수백 마리에 달하는 숫자를 참살하며 제법 움직였음에도 그 흔적하나 발견하지 못했으니 전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것이리라.
역시 어린 왕자라는 타이틀은 악취미라 생각한 이진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