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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39화 (39/210)

◈ 039.

백오십 가량의 몬스터 군락이 전부 정리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몬스터의 부산물 같은 것은 나중에 챙기면 되는 일이기에 그들은 간략히 정비를 끝냈고, 기세를 이어 던전의 안쪽으로 나아갔다.

“활 솜씨가 상당하더군.”

이진한은 제 옆에서 슬그머니 말을 걸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모험가라기보단 용병 쪽이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진한 흉터는 제법 인상적이었다.

살짝 낡은 듯한 가죽 갑옷은 움직임을 헤치지 않게 잘 손질되어 있었고, 손때로 반질반질한 검의 손잡이는 그가 제법 노련한 실력자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조잡한 실력이다.”

“하하하, 그 머저리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모래바람이나 맞으며 살던 놈이 무얼 알겠나. 아, 내 이름은 제너드네. 용병으로 일하고 있지.”

제너드는 슬쩍 제품에서 C랭크 용병패를 보였다.

‘C랭크?’

이진한은 살짝 흥미 어린 시선을 보냈다.

C랭크는 소드 익스퍼트 하급 정도의 수준을 말했다. 하지만 대현자의 눈으로 가늠하기에 그의 수준은 대략 익스퍼트 중상급 정도.

그렇다는 것은 모종의 이유로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소리가 되었다.

‘검에 창, 활도 쓰는군. 마법은, 억제되어 있어서 확인하기는 힘든가.’

이진한은 제너드의 손과 발달된 근육을 살피며 대략적인 실력을 추정했다.

애초에 그는 제너드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C랭크 용병인 것까지는 몰랐으나, 공략 대원 중 소드 마스터인 레펠과 일레이나를 제외하곤 가장 강했으니 자연스레 시선이 갔었다.

“레이먼 윌리엄스다. 떠돌이 마법사지.”

“이전에 들어서 알고 있네. 일레이나 마도사님과 연인 관계라지?”

“그래.”

“부럽기 짝이 없군. 저리 아름다운 분과 교제할 수 있다니. 참, 활은 노리고 쏜 것인가? 한 발에 세 마리를 꿰뚫다니, 옆에서 넋을 잃고 보다가 몬스터한테 머리가 깨져 죽을 뻔했다네.”

제너드는 이진한의 반응이 시큰둥했음에도 그 옆에 붙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오죽했으면 함께 발을 맞추던 엘레오노라가 질색한 표정으로 슬쩍 거리를 벌릴 정도였다.

“활만 쏘는 것은 아닐 테지? 스스로 말하기엔 뭣 하지만, 눈썰미엔 자신이 있거든. 육체도 제법 단련된 걸 보니 검이나 창 같은 무구도 쓰겠군. 아니, 둔기 계열인가. 호리호리한 체형으로는 조금 언밸런스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괜찮으려나.”

이진한이 그의 수준을 읽어낸 것처럼 제너드 역시 이진한을 읽어내었다.

다만, 스스로 눈썰미가 좋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그 경지까지는 가늠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

이진한은 그 말에 전부 침묵했다.

고작 그런 것 따위를 말하려고 다가온 것이 아닐 터다. 그렇기에 담담한 시선을 보내자, 제너드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으며 말했다.

“이것 참, 미안하네. 오랜만에 같은 동류를 만나서 들떴군.”

“동류?”

“자네, 블랙 워커(Black Walker)가 아닌가.”

블랙 워커.

처음 듣는 단어에 이진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직관적인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은유적으로 뜻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을 티 내지 않은 채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제너드는 역시란 표정으로 씩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네. 로브 안쪽으로 살짝살짝 보이는 차림새며 장신구며 모두 시커멓기 짝이 없으니. 검은 현자님을 동경해서 그리 입는 것이 아닌가. 내 갑옷 역시 비슷한 맥락이지.”

그는 제 낡은 가죽 갑옷을 툭 치며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그것은 보통의 가죽과 달리 시커먼 색으로 염색되어있어 조금 색다른 면모를 띠었다.

‘검은 현자? 동경?’

블랙 워커, 중구난방인 분야, 그리고 맥락까지.

이진한은 그 정보들을 한데 모아 취합했고, 이내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내 추종자들인가.’

블랙 워커, 제법 그럴듯한 이름이었다.

낯간지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이진한은 갑작스럽게 제너드에게 호감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추종하는 이가 아닌가. 그렇기에 가볍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굳게 닫고 있던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동류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하하, 반갑네. 원래 갑작스러운 만남은 우연에서 기인한 것이지.”

“사실 나도 널 눈여겨보고 있었다. C랭크 용병이라기엔 너무 실력이 출중했으니까.”

“나보다 낫군. 난 방금에서야 자네의 그 비범한 기색을 눈치챘는데.”

“실력을 숨기는 이유가 뭐지?”

“뭐, 여러 이유가 있지만, 로망이라 할 수 있네.”

“로망?”

“아무런 기대도 받지 않았던 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활약해 주목을 받는다. 그것만큼 가슴이 뛰는 일이 있겠는가.”

“…알 것 같군.”

“그렇지? 자네라면 그리 대답할 줄 알았네.”

둘은 곧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눴고, 그것은 배치가 바뀌어 제너드가 선두 쪽으로 이동했을 때가 돼서야 겨우 끝을 맞이했다.

“…죽이 잘 맞으시던데요.”

엘레오노라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 옆에 있던 미르엘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슬쩍슬쩍 이진한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제 주인과 비슷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블랙 워커라더라.”

“…아, 그런 것도 있었죠.”

“그런 것?”

“아무것도 아니에요.”

엘레오노라는 제 말실수를 자각한 듯 황급히 둘러대었다.

하지만 이진한이 계속해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봐오자,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블랙 워커는 검은 현자의 추종자를 뜻하는 단어에요.”

“그런 것 같더라.”

“그리고, 음…….”

엘레오노라는 신중한 기색으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세간에서는 대체로 정상이 아니라고 취급받아요.”

“뭘 그리 뜸 들이는가 싶더니. 뭐, 그렇겠지. 검이나 마법 하나만 파고들어도 힘든데 한 번에 다 익히려 하니까…….”

“아, 아뇨.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엘레오노라가 무안한 표정으로 뺨을 긁으며 시선을 피하자, 보다 못한 미르엘이 대신 말을 받았다.

“엘레오노라님께선 상당히 순화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세간에선 정신병자라 인식되지요. 고대 영웅 중 진정으로 영웅이라 불릴 이는 검은 현자뿐이며, 나머지는 그 들러리에 불과했다. 검은 현자의 업적에 질투한 그들이 기록을 조작했다. 그러면서 검은 현자를 거의 신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무슨.”

“물론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에요. 온건한 블랙 워커도 있지만, 항상 일부 과격한 이들이 문제죠. 비틀린 역사를 다잡기 위함이라며 성전(聖戰)을 선포하고, 다른 고대 영웅들의 신전이나 유적지에 테러하기도 하고.”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을 전부 하는 둘의 말에 이진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즉, 내 얼굴에 똥칠하는 놈들이라는 거네.”

“…네, 뭐.”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부일 뿐이니, 블랙 워커의 악명을 빼고 검은 현자의 명성이 훼손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미르엘이 위로하듯 말을 해왔다.

‘그런 녀석이랑 하하 호호하면서 떠들었다니.’

이진한은 가늘어진 눈으로 저 선두에 선 제너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챈 듯 슬쩍 고개를 돌렸고, 이내 작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화답해왔다.

“…블랙 워커인지 코커인지 모르겠지만.”

이진한은 검은 현자의 추종자라고 거들먹거리며 자신의 얼굴에 똥칠하고 다니는 놈들을 가만둘 생각은 없었다.

***

“정지.”

던전 탐사는 거의 한나절 동안 이어졌다.

아무리 걸어도 길은 끝나지 않았고, 간간이 마주치는 몬스터 군락만이 같은 길을 돌고 있지 않다는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다만, 연이은 싸움은 피로를 누적되게 했다.

아직 부상자는 없었지만, 실력이 떨어지는 이들부터 체력의 한계가 온 상황. 그렇기에 레펠이 휴식을 선언하려던 그 때였다.

우웅-.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껏 상대했던 몬스터와는 질적으로 수준이 다른 것으로 소드 마스터인 그의 감각조차 곤두서게 할 정도로 강대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마주쳤군. 모두 전투 준비. 목표물을 찾은 듯합니다.”

“베히모스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다들 여기서 충분히 체력을 회복한 뒤에 나아가도록 하지요.”

녀석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공략대는 현재 위치에서 안전을 확보한 뒤 체력을 회복하며 다가올 격전을 준비하기로 했다.

“레펠경.”

“일레이나 마도사. 무슨 일입니까.”

레펠은 자신에게 다가온 보랏빛 여성에 고개를 들었다.

휴식을 방해받기는 싫었으나,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 정도 되는 이의 부름이라면 귀담아들을 만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여정에 톡톡한 도움을 받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정중한 태도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무래도 저 앞의 몬스터는 베히모스가 아닌 것 같아요.”

“베히모스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고대 마수인 베히모스에 관한 기록을 찾아본 적이 있어요. 물론 저 앞에 있는 존재의 기운이 강대하긴 하지만, 고대 마수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에요. 더군다나 외형이 달라요.”

“외형이 다르다?”

“만티코어. 베히모스의 모습을 모방해 만들어낸 키메라입니다. 그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졌으나, 베히모스 정도는 아니죠.”

“만티코어?”

그에겐 생소한 이름이었다. 옆에 있던 왕실 마법사들에게 들어본 적이 있냐 시선을 보내자 그들 역시 고개를 끄덕여왔다.

“사실 의심하고 있었긴 했습니다.”

“베히모스와 만티코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꼬리입니다. 베히모스의 꼬리는 살아있는 죽음이라 불리는 흑사(黑巳)지만, 그것을 본떠 만든 키메라인 만티코어의 꼬리는 전갈의 것을 하고 있다 했습니다.”

“저 앞에 있는 놈의 꼬리는 전갈이란 소린가.”

“예. 그 때문에 일레이나 마도사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가 유력해 보입니다.”

“만일 만티코어라면 교전 결과는?”

“베히모스로 상정했을 때보다 대폭 올라갑니다. 아마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행인 이야기로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베히모스라 상정하고 전투에 임하겠다.”

“저도 그편이 좋을 거로 생각해요.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

“일레이나 마도사님의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이 사례는 왕궁으로 돌아간 다음 따로 톡톡히 해드리겠습니다.”

일레이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하곤 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뭐래?”

“일단 베히모스라 상정하고 싸운대요. 혹시 모르니까.”

“현명하네.”

이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턱대고 베히모스가 아니라 만티코어다! 라는 말만 믿고 싸우기엔 그리 녹록한 상황은 아니지 않는가.

만일 덥석 그렇게 믿었더라면 레펠이라는 소드 마스터의 평가가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잠깐.”

“뭐 하시게요?”

“아까부터 좀 걸리는 게 있었거든. 잠깐만 확인해보고 올게.”

지나온 길 가운데 대현자의 눈에 걸리는 장치가 있었다.

어지간한 함정이나 기관은 기사나 용병들이 처리했지만, 그들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무시된 것이었다.

“주석이 달려 있지 않아서 뭔진 모르겠지만.”

그는 보물 창고로 통하는 비밀 통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대현자의 눈이 알려준 벽의 위치를 꾹 눌렀고.

덜컹.

“…어?”

이내 바닥이 푹 꺼짐과 동시에 그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프, 플라이-!]”

한 치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 이진한은 황급히 마법을 영창 했다.

하지만 마법의 억제력이 높아진 공간인지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고, 속절없이 추락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뒤늦게 떠오른 이카루스의 망토를 활성화하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듯했다.

“흡-!”

바닥이 보였다.

이 정도로 즉사하진 않겠지만, 아플 것이 분명한바. 그렇기에 그는 몸을 빙그르르 돌렸고, 지상에 도달함과 동시에 낙법을 취하며 충격을 흘려냈다.

“…빌어먹을, 함정이라니.”

그러고도 바닥을 구르는 것을 막지 못했지만, 저 높은 위에서 떨어진 것 치고는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착지했다고 할 수 있었다.

츠즈즈즈-.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대현자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 가운데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으며 닥쳐왔다.

“만티코어?”

위쪽에 있던 것을 제외하고 한 마리가 더 있던 것인지 사자의 몸통을 한 몬스터가 제 흉악한 이빨을 들이밀었다.

“어딜.”

그것에 콧방귀를 낀 이진한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곤 자신의 몸을 물어뜯으려 입을 쩍 벌린 만티코어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콰아아앙-!

공략대에서처럼 힘을 절제할 필요가 없었다.

단 한 방으로 만티코어의 머리가 박살났고, 그대로 땅에 균열이 일며 처박히고 말았다.

“까불고 있어.”

툭툭.

손을 턴 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떨어뜨린 함정은 이미 닫혀버린 듯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다. 일단 이 장소가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 시뻘건 눈동자가 떠올라 이쪽을 바라봐왔다.

“그렇다 한들.”

이진한은 피식 웃었다.

만티코어가 몇 마리라고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솔직히 열 마리가 한 번에 달려들어도 머리를 깨부숴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를 지닌 존재가 오십을 넘고 일백과 이백을 넘어 삼백에 다다랐을 때.

“…어지럽네.”

미소를 그렸던 그의 입이 경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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