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38화 (38/210)

◈ 038.

“…이건.”

레펠이 경직된 얼굴로 벽을 더듬고 있을 때, 일레이나는 슬쩍 이진한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마법이 억제된 건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시나요?”

“글쎄. 나도 같이 억제당한 입장이라.”

“…대마도사의 힘을 제한할 정도의 수준이라고요?”

“억지로 풀려고 하면 풀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아까도 말했잖아. 피치 못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겠다고.”

“진짜로 그러려고요?”

“강해지고 싶다며. 아쉽게도 난 보모 노릇은 잘못해. 냉혹한 실전만이 성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지.”

“…말은 참 잘하시네요. 하여튼 알겠어요. 대신 위험해지면 꼭 나서주시는 거예요?”

일레이나는 눈짓으로 앞쪽에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가리켰다.

마법이 억제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 그 둘이라도 챙겨달라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일레이나는 기가 찬 눈빛으로 고개를 젓고는 아직도 막힌 벽에서 입구를 찾고 있던 레펠에게로 다가갔다.

“레펠경.”

“…아, 일레이나 마도사.”

“보고서에 기록된 것에는 없는 현상이군요.”

마찬가지로 벽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일레이나의 노골적인 시선에 레펠은 쓴웃음을 지었다.

“숨기는 것은 없습니다. 일부 표현에 있어 가감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용 자체를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마법의 억제나 사라진 입구 역시 처음 겪는 현상이라는 거군요.”

“예. 그런 의미에서 애머시스트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음.”

일레이나는 차분히 사방을 훑어보았다.

경관은 얼핏 본다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느끼도록 의도되었다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마나의 농도가 옅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일 터.

더욱이 일레이나는 던전에 들어옴과 동시에 베르너의 기세가 사뭇 변한 것을 느꼈다. 안쪽을 바라보는 두 눈이 가늘어졌고, 그 눈동자엔 분명 숨길 수 없는 호기심과 흥미가 깃들었다.

그것은 마도(魔道)를 걷는 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질에 대한 학구열이었다.

베르너는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경지에 있는 대마도사였지만, 그런 ‘기색을’ 파악하는 것쯤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닫힌 공간이네요. 아마 특정 조건을 달성하지 않는 이상 출구가 다시 개방되는 일은 없겠죠.”

“외부에서 지원을 들여보내려 해도?”

“애초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보통 이런 현상은 순리의 이해를 가볍게 짓밟기 마련이니.”

“…확실한 겁니까.”

아직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던 레펠의 모습에 일레이나는 제 스태프의 끝으로 벽을 살짝 두들겼다.

“얼마 전에 이런 곳과 비슷한 공간에 갇힌 적이 있어요.”

검은 현자의 유적지, 그곳에 봉인된 베히모스가 존재하던 히든 필드 콜로세움을 뜻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 곳이었죠.”

“그렇다면 어떻게…….”

“중심이 되는 곳에 존재하던 문지기를 쓰러뜨렸어요. 그러니 천장이 열리더군요. 이곳도 아마 그렇겠죠.”

“…그것이, 베히모스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흠.”

상당히 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레펠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들며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일행과 상의해보겠습니다.”

“좋으실 대로.”

일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왕궁 마법사라 할지라도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저들이라고 해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을 터.

그렇기에 발걸음을 돌려 일행에게로 되돌아가자 엘레오노라가 두 눈을 빛내며 말해왔다.

“방금 엄청 멋있으셨어요. 설마 그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분석하고 있을 줄은.”

“무엇을요? 아, 던전에 대해서?”

“네. 저도 검은 현자의 유적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세세히 살펴보진 못했거든요.”

“아하.”

그 말에 일레이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뻥이에요. 순도 100%의 허세. 저도 아무것도 몰라요.”

“…네?”

“실제로 유적지 쪽과 같은 현상일 수도 있는데, 아닐 가능성도 있거든요. 아무리 마도사라 할지라도 슬쩍 보고 판단하는 건 불가능해요. 베르너, 저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러면…….”

“일단 레펠을 비롯한 이들에게 각인시켜 놓은 거죠. 「나는 지금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미 이와 비슷한 공간에 갇혀봤고, 탈출도 해봤다. 그러니 나를 지켜라」 대충 이런 뜻?”

“…그렇군요. 마법사 전력이 크게 격하되었으니 중요도가 떨어지는 지금에서…….”

“흔들리는 위치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죠. 다행이에요, 거기부터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일레이나는 고개를 돌려 미르엘을 바라보았다.

“미르엘, 당신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졌어요. 저는 어떻게든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지만, 엘레오노라는 보조 마법 이외에는 그리 유의미한 힘을 내기 힘들 거예요.”

“저는 언제나 엘레오노라님을 지키는 검이자 방패입니다.”

미르엘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말하자, 일레이나는 헛기침을 내며 제 존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레이나님도 도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한 점 티 없는 미소였다.

뒤에서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완벽하진 않으나 그에 가까운 대처였다.

다만, 그 비틀린 면모를 그런 쪽으로는 아직 순수하다 할 수 있는 황녀가 보고 배울까 심히 걱정되었다.

“다들 주목해주시겠습니까.”

제 일행과 이야기를 끝낸 레펠이 공략대의 이목을 끌어 모았다.

잠시간 좌중을 둘러보던 그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고, 이내 입을 열었다.

“작금 닥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왕궁 마법사뿐만 아니라 이런 현상을 겪어보신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께서도 같은 의견이었으니 틀린 방향성은 아니겠지요.”

“…….”

그 말에 일레이나는 코웃음을 쳤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전위는 저희 왕실 기사단이 서겠습니다. 마법사들을 최후미로 배치하는 것을 제외하곤 이전과 같은 형식으로 하지요. 이견이 있으십니까.”

“없소이다.”

“저희도 없습니다.”

“우리도 없소.”

그린 스콜피온의 우두머리, 모험가 길드의 대표, 적색 마탑의 마법사가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굳이 왕실 기사단이 전위를 맡겠다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면 일차적인 목표는 노르디움 왕자님과 조사대의 신병 확보, 그리고 최종 목표는 베히모스의 공략과 던전 탈출로 하겠습니다.”

태세 정비를 마친 공략대는 곧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상의했던 대로 레펠을 비롯한 왕실 기사단이 선두에 섰다.

그들은 기사임에도 어지간한 모험가 못지않은 실력으로 철저히 던전을 수색했고, 나머지는 용병과 모험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꼬리 쪽은 지루한데.”

일레이나를 제외하곤 전부 후미로 밀려났다.

이진한 역시 명목상으로는 마법사였기에 앞서나가는 이들의 뒤를 쫓으며 살짝 심심하단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던전 안은 곳곳에 박힌 에메랄드가 뿜는 푸른빛 덕에 그리 어둡지 않았다.

천장에 맺힌 습기는 종유석의 끝을 따라 산발적으로 떨어졌고 어딘가 음습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

저 너머의 앞을 바라보던 그의 두 눈이 이내 가늘어졌다.

이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갈림길이 펼쳐져 있다. 그 앞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몬스터 군락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싸움은 불가피해 보였다.

“정지.”

제일 먼저 이변을 느낀 것은 레펠이었다.

소드 마스터 특유의 감각으로 이질적인 존재들의 기운을 느낀 그는 공략대를 멈춰 세웠다.

“앞에 몬스터 군락이다. 숫자는 대략 백오십 정도.”

후미에 있던 마법사들이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출력이 50%로 억제되었다고 한들 바로 앞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군락의 전력을 파악해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것은 오우거, 그리고 휘하 트롤 몇 마리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하위종인 오크나 코볼트 정도입니다.”

보통이라면 서로 공존하기 힘든 종족들이었다.

상위 포식자인 오우거나 트롤에게 오크나 코볼트 같은 하위종은 좋은 먹잇감. 하지만 던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군락을 이루게 했다.

“오우거는 제가 맡겠습니다. 왕실 기사단은 트롤들을, 나머지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확인했소.”

“인지했습니다.”

공략대의 두 배를 넘는 숫자였지만, 질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던전 안에서는 항상 변수를 유의해야 하는바. 그렇기에 속전속결로 처리하고자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쉬이익-!

전투의 개시를 알린 것은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의 궁사가 쏜 화살이었다.

그것은 세찬 파공성과 함께 허공을 가로질렀고, 이내 우두커니 서 있던 오크의 목에 박혀 들었다.

크륵, 크르륵….

살점이 뜯기다시피 한 상처였기에 제대로 된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한 채 피거품을 내뱉으며 쓰러졌다.

-……!

갑작스러운 이변에 몬스터들의 기세가 곤두섰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공략대 쪽으로 몸을 돌리며 저마다 흉포한 살기로 무장했다.

“돌격.”

레펠의 나지막한 말에 새하얀 망토를 두른 왕실 기사단이 앞으로 돌진했다.

그 뒤를 따라 그린 스콜피온의 용병들이 몸을 날렸고, 나머지도 전의에 찬 모습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압도적인 전력이었으니 전략이나 전술 따위는 필요 없었다.

물론, 안전한 후미에 자리한 마법사들은 팔자 좋은 태도로 그것을 구경했다.

“장관이로군. 이런 규모의 전투를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적색 마탑의 마법사 중 한 명이 마치 재미있는 공연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엘레오노라는 그런 마법사를 흘깃 바라보며 옆에 있던 이진한에게 속삭였다.

“적색 마탑은 서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곳이래요. 듣기로는 마탑주가 반인반룡이라는 소문도 있었어요.”

“드래고니안이라고?”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였지만, 그것마저도 그의 지루함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투둑-.

그 순간, 군락에서 뛰쳐나온 몬스터 몇 마리가 마법사들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략대 역시 그들을 지키기 위해 인원을 남겨놓았다.

미르엘을 비롯한 모험가들이 제 무기를 뽑아 들며 준비할 때, 이진한 역시 로브 밑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어쭈? 마법사 양반, 활도 쏘실 줄도 아시오?”

그린 스콜피온의 용병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마법사에 활은 그리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마법사들 역시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듯 한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이진한은 피식 웃은 채 활시위에 가느다란 화살을 걸었고, 이내 그 줄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법사 양반, 나쁜 소리는 하지 않겠소이다. 괜히 까불지 말고 내려놓으소. 조악한 궁술 때문에 몬스터가 이쪽에 쏠리면 곤란해지는 건 당신뿐만이…….”

쐐애애애액-!

이진한이 쏘아 보낸 화살은 제일 처음 그린 스콜피온의 궁사가 쏜 것과 차원이 다른 파공성을 내뿜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지난 그것은 이내 달려오던 오크의 이마에 닿았고, 그 단단한 뼈를 부수며 뒤통수를 찢고서도 사그라지지 않은 기세로 다음 목표를 노렸다.

“어, 어어…….”

세 번의 파열음이었다.

단 한 발의 화살이 몬스터 세 마리의 숨을 끊어낸 것이었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기술.

재차 화살을 꺼내 활시위에 건 이진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잡한 실력이라 미안하군. 헌데…….”

그는 아직 우두커니 서 있던 용병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것이 조잡할 정도면 그쪽엔 신궁(神弓)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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