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7.
이름: 엘레오노라 폰 오스칼.
레벨: 354
나이: 22
속성: 바람
특성: 고귀한 혈통
경지: 3클래스 마법사
이름: 미르엘 브레스트
레벨: 387
나이: 22
속성: 빙결
특성: 고결함
경지: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름: 일레이나 유클리드
레벨: 632
나이: 23
속성: 화염
특성: 이해력
경지: 6클래스 마도사
“음.”
이번에야말로 일행을 각자 방으로 돌려보낸 그는 침대에 누워 상태창 위로 간략하게 정리한 정보를 바라보았다.
대현자의 눈으로 파악한 능력치니, 오차는 없을 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일레이나의 능력치였다.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
성문에서 마중 나왔던 기사의 태도나 왕성에서 보였던 귀족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 자랑했던 명성이 허세는 아닌 듯해 보였다.
나이에 비해 세부 능력치도 높고 마도사에 이르렀음에도 아직 포텐셜이 넘쳤다. 이대로 쭉 시간이 흐른다면 서른이 되기 전에 마도사로서의 정점에 다다를 터.
초월지경인 대마도사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라 확언할 수 없지만, 그녀는 이진한이 이 세계로 와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였다.
어쩌면 엘레오노라나 미르엘보다 더.
‘일단은 두고 보아야 하나.’
첫 번째 메인 퀘스트, 「붉은 가넷의 수호자」는 마르딘 영지에 도착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녀들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한다면 거부할 생각은 없었으나, 그 반대는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 퀘스트는 뒤에서 관망하는 쪽으로 가야겠군.”
마법 이론이나 이렇다 할 검술을 알려주기는 힘들었다.
잦은 대련을 통해 전투 센스를 늘려주는 것은 모르겠지만, 이론적인 측면은 자신 역시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가.
성장에 가장 큰 관여를 하는 요소는 단연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침 적당한 던전이 눈앞에 있으니 자신은 최대한 나서지 않은 채 일행의 수준을 성장시킬 좋은 기회인 듯했다.
‘여차하면 쓰고 버릴 고기 방패도 있고.’
왕실 기사단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용병들.
엑스트라에 불과한 그들까지 기억을 할애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나머지는 내일 생각하자.”
이미 밤이 깊었다. 그렇기에 그는 가볍게 손을 휘젓는 것으로 상태창을 치워버리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쿵-.
돌부리에 걸린 마차가 덜컹거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창가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괸 자세로 밖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천천히 바뀌어 가는 풍경에 눈을 돌렸다.
때는 이미 저녁이 한참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왕성에 집결했던 조사대는 간략한 작전 회의 후 지체할 것 없이 던전을 향해 출발했다.
코랄 산맥은 수도와 그리 멀지 않다. 성을 나선 마차들이 일렬로 줄지어 달려 나가는 모습은 위풍당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암.”
물론, 그에겐 지루할 따름일 뿐인 여정이었다.
“일단 눈여겨보아야 할 강자들을 꼽아봤어요. 먼저 페르포치아 왕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레펠 알록시아드.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고, 소드 마스터 경지에 이르렀어요. 그 휘하에 있는 스물하나 역시 전부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예요.”
“왕국도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군요.”
“당연하죠. 왕국 후계자에 명운이 달린 일인데. 그리고 그 뒤로 왕실 마법사 다섯이 있는데, 솔직히 신경 쓸 수준은 아니에요.”
“용병 중에 제법 준수한 실력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분명 녹색 전갈을 표식으로 사용하는 이들이었지요.”
“그린 스콜피온. 남부 게헤라 사막 쪽에서 활동하는 이들이에요. 어째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막에서 날리는 이들이라 알고 있어요. 그리고 또…….”
일레이나, 엘레오노라, 미르엘은 머리를 맞댄 채 조사대 면면을 파악하고 있었다.
마차 벽면에 눈여겨볼 만한 강자의 리스트까지 적어둔 것이 제법 본격적인 회의였다.
“…당신은 안 봐둬도 돼요?”
한창 그렇게 열띤 토론을 나누던 일레이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실력이라면 이런 것들은 필요 없었지만, 평소 보이던 그 철두철미한 태도와는 거리감이 있지 않은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말했잖아, 이번 던전 공략은 관망하는 태도로 하겠다고.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나서지 않을 거다.”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사전 조사는 끝내놓은 상태였다.
조사단은 페르포치아 왕실 기사 21명, 마법사 5명, 그린 스콜피온 용병단 13명, 모험가 길드 소속 모험가가 19명, 적색 마탑 마법사 3명, 신성 교단 사제 둘, 성기사 하나, 그리고 자신들의 파티 넷까지 모두 68명.
그중 눈여겨볼 실력자는 일레이나가 말했던 소드 마스터인 레펠 알록시아드와 그린 스콜피온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최상급 전사, 그리고 모험가 중 서넛 정도였다.
그마저도 레펠 알록시아드를 제외하면 구조대 중에서 상대적으로 뛰어나단 것이지 이진한의 기준에 차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솔직히 그 전부가 달려들어도 한 손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시시껄렁한 생각마저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관심 없다는 듯 티를 내지 않았다.
정말로 그들이 위험해지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좋아요, 나설 차례도 없게 해드리죠. 뒤에서 구경만 하기 심심하다고 말 바꾸시기 없기에요.”
“내가 귀찮게 뭐 하러.”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해온 일레이나의 모습에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더 불태운 것인지 다른 두 명과 더 열렬한 태도로 작당을 모의해나갔다.
이윽고 마차는 코랄 산맥에 닿았다.
저물어가던 노을은 어느덧 자취를 감춘 상태로 어두컴컴한 주위가 그들을 반겼지만, 공략대는 당황하는 일 없이 각자 지닌 수단을 이용해 주위를 밝혔다.
“던전은 산 중턱 즈음에 있습니다. 여기부터는 걸어 이동해야 하니 다들 움직이시지요.”
공략대 선두에 선 레펠 알록시아드는 올해로 서른다섯에 이른 장년의 기사였다.
녹색 빛이 감도는 머리는 올백으로 단정히 넘겼고 세월의 성숙함을 지닌 각진 얼굴은 충분히 미남이라 할 법한 것이었다.
페르포치아 왕국의 몇 없는 소드 마스터로, 차기 왕실 기사단장의 후계로 유력한 후보로, 이번 1왕자 구출 작전은 그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해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왕국을 섬기는 충신이었다.
공적과 명예보다도 장차 왕국을 이끌어 나갈 차기 계승자의 구출이 더욱 중요했다.
그렇기에 신분이나 실력이나 한참 밑인 공략 대원들에게 존대까지 써가며 그들의 도움을 청했다.
“수고가 많네.”
이윽고 68명의 공략대가 던전 입구에 닿았다.
레펠은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에게 인사한 후, 몸을 돌려 공략대를 돌아보았다.
“던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지금 포기한다고 해도 늦지 않았습니다.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인 이 레펠 알록시아드의 이름으로 아무런 불이익 없이 돌아가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공략대는 전원 침묵을 지켰다.
이미 받은 돈이 많았고, 그것을 토해내기 싫었다. 더욱이 저마다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니 이 정도 인원으로 던전 공략에 실패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진입하겠습니다.”
레펠의 눈짓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그 앞을 가로막은 바위를 옆으로 치웠다.
“오.”
선두에 선 누군가 나지막한 감탄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입구부터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청록색 빛을 내는 에메랄드가 잔뜩 박혀 있지 않은가.
저리도 선명한 빛깔이라면 제법 비싼 값어치를 지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번 공략의 최우선 목표는 노르디움 전하의 구출입니다. 다들 잊지 마십시오.”
레펠은 행여나 그들이 다른 것에 정신을 빼앗길까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마나까지 섞여 있는 목소리에 공략 대원들은 정신을 차렸고, 이내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레펠과 왕실 기사단을 뒤따랐다.
“신비로운 분위기네요.”
엘레오노라가 사뭇 신기하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진한 일행은 공략대 최후미에 자리했다.
유일한 마도사인 일레이나는 단연 최중요 전력이었기에 취한 배치였다. 그러는 만큼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찬찬히 던전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별 특이점은 없는 것 같아요. 굳이 따지자면 마나의 농도가 밖보다는 옅다는 것?”
“생각보다 크기가 크군요. 이 정도라면 움직임의 제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일레이나와 미르엘 역시 엘레오노라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오직 이진한만이 가늘어진 눈으로 앞서 나가는 레펠의 모습을 응시했다.
‘거짓말을 한 건가? 아니면…….’
보고서에 작성된 던전의 기록은 베히모스의 존재 빼놓고는 비교적 평범한 것이었다.
이렇다 할 함정도 없었고, 그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요람이라 추정된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평범하지도 않아 보였다.
[히든 필드 「사바트의 제단」에 입장하셨습니다.]
[제단의 활성화로 마법의 출력이 억제됩니다.]
[제단의 활성화로 시간의 흐름이 정지됩니다.]
[공격 마법 - 90%]
[보조 마법 - 50%]
[해방 조건 - 제단의 파괴]
‘마법은 봉인 당한 거나 마찬가지군.’
90%의 출력으로 쓸 수 있는 것 아니라 90%를 억제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 던전 안에서는 원래의 10%밖에 힘을 낼 수 없다는 소리. 일레이나를 제외하고 전부 마법사 클래스인 것을 생각하면 전부 무쓸모가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보조 마법은 그 절반밖에 깎여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니.
더욱이 주목할 점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알림이 뜸과 동시에 시야 한구석에서 쉬지 않고 카운트되던 시간의 유예가 얼어붙기라도 한 듯 멈췄다.
마법이 억제된 것과 반대로 이건 그에게 있어 더 없이 호재였다.
던전 공략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시간제한이 사라졌으니 제법 느긋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음.”
이진한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마도사의 이른 힘은 10%라 할지라도 어지간한 마도사를 압도하는 위력. 자신이 조금 더 무리를 부린다면 제단이 발휘하는 영향력에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제법 흥미가 생겼지만, 일레이나에게 말했듯 여차할 때까지는 먼저 나설 생각이 없기에 생각을 접었다.
‘제 마음대로 마법이 발동되지 않으면 깜짝 놀라겠지?’
공략대가 이변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취릭, 취릭-.
던전 안에는 베히모스만 자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크나 코볼트 같은 하위종이 둥지를 틀었고, 제일 먼저 공략대의 길을 막아섰다.
“전투 준비.”
레펠의 한 마디에 그들은 각자 노련한 모습으로 태세를 가다듬었다.
이윽고 왕실 기사단을 선두로 한 선봉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이내 습격을 개시했다.
서걱-.
하위종 따위는 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가볍게 검을 그어버린 것으로 그 연약한 몸뚱이를 베어 갈랐고, 조금의 피해도 없이 녀석들을 격멸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그럼에도 공략대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마법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는다고?”
“예, 그렇습니다. 던전의 효과인지 원래 출력의 일 할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보조 마법은 오 할 정도 살릴 수 있지만…….”
“다른 분들도 같습니까.”
레펠은 공략대의 다른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렇소.”
모험가 길드 소속 마법사 넷, 그리고 적색 마탑의 마법사 셋, 거기에 엘레오노라까지.
모두 같은 대답에 낭패 서린 표정으로 입술을 씹던 레펠은 자그마한 기대를 담아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이지 않는가.
혹시 그녀라면 다르지 않을까 싶었지만, 고개를 젓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도 똑같았어요. 그래도 절대적인 억제가 아니라 상대적인 건지 4클래스 정도의 힘은 낼 수 있을 것 같네요.”
“허어…….”
마도사인 일레이나가 저리 말할 정도라면 다른 마법사들은 어느 정도까지 격하되었겠나.
1, 2클래스의 수준으로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레펠은 잠시 숙고를 한 뒤 입을 열었다.
“마법사 전력의 손실은 상정하지 못한 바입니다. 일단 잠시 물러나 정비를 하는 것이 좋겠군요.”
마법사가 안 된다면 다른 부류로 전력을 채워오면 그만이었다.
차라리 훈련받은 병사들이 더 도움이 되었기에 그들이라도 지원을 받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공략대가 들어왔던 입구는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