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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36화 (36/210)

◈ 036.

회합 이후에는 가벼운 연회 자리가 있었다.

이진한과 일레이나는 참석을 거부했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과 합류했다.

“구조대라. 설마 거기도 저희를 놓고 가신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당연하지. 밖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엘레오노라의 말에 이진한은 고개를 저었다.

괜히 그녀들을 놓고 가서 쓸데없는 불안 요소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같이 가서 고생하는 게 낫지, 전부 다 끝내고 돌아왔는데 제국 암부가 들이닥쳐 습격당한 이후의 광경을 목격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만티코어라.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입니다. 베히모스를 본떠 만든 존재인 것은 알지 못했지만…….”

“그거 하나만 있는 건 아닐걸.”

미르엘의 말에 이진한은 침대에 풀썩 몸을 던지며 말했다.

“만티코어가 성가신 몬스터라고 해도 왕국 조사단 정도 되는 전력이 그 한 마리에 묶였다고 보기엔 어폐가 있지.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다른 이유라면…….”

“정말로 베히모스가 있을 가능성은 낮아. 그렇다면 그 안에 자리한 만티코어가 한 마리가 아니거나, 다른 몬스터가 또 있다는 거겠지.”

“어찌 되었든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건 분명하네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죠?”

일레이나는 성가신 듯 담뱃대 끝을 질겅질겅 씹었다.

“적당히 중간만. 다른 녀석들이 의욕이 넘쳐 보이니까 괜찮겠지.”

어디 지역에서 유명세를 날리는 용병이니, 무슨 마수를 쓰러뜨린 방랑 검객이니 해도 이진한의 시선에선 다 고기 방패일 뿐이었다.

단 한 명.

자신을 오코넬이라 소개했던 남자가 신경 쓰였지만, 그 본인은 구조대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당장 거론할 필요는 없었다.

“왕국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분명 저희를 앞장세우겠죠.”

“그러라고 거금을 들인 거니까.”

“여차할 땐 분명 이쪽을 버리는 패로 사용할 텐데…….”

“어림없지. 그럴 낌새가 보이면 바로 뒤집어엎어 버릴 거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일레이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엘레오노라는 제 제자로 들어온 귀족 가의 자제고, 미르엘은 그런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 정도로 하면 되겠네요.”

“적당하네. 지금이랑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러면 오늘은 이만 쉬자. 어차피 내일 저녁까지 왕궁으로 가면 되는 거니까 오랜만에 느긋하게.”

이진한이 침대에 누운 채로 그렇게 말하자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시끌벅적하던 장내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

잠시간 그대로 죽은 듯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진한은 이내 천천히 두 눈을 떴다.

【67:50:24】

시야 한쪽으로 사흘 남짓한 짧은 시간이 보였다. 잠시간 손을 들어 그것을 밀쳐낸 그는 상태창을 만지작거렸다.

표시된 스펙이나 스킬, 그리고 익숙한 UI는 게임과 다를 바가 없다. 운영자 호출과 로그아웃, 그리고 메신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빼면 게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관성에 휩쓸리고 있다.’

될 대로 대라는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일정이 엉켜 시간의 유예가 끝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진한은 지금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절대 게임 따위가 아니라고 90%는 확신하고 있었다.

남은 10%는 아직 놓지 않은 희망의 끈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굵기가 가늘어졌다.

“아, 모르겠다.”

“…뭘 모르겠어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가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위를 바라보자, 문가에 거꾸로 서 있던 일레이나를 볼 수 있었다.

“자러 간 거 아니었어?”

“막 씻고 나왔어요. 잠깐 긴히 할 말이 있기도 하고.”

“할 말?”

앓는 소리와 함께 이진한이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술병과 두 개의 잔을 볼 수 있었다.

“내일 나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이 정도는 입가심 아닌가요?”

짐짓 너스레를 떠는 일레이나의 모습에 그는 웃음을 터트리며 침대에 앉았다.

곧 옆에 있던 탁자와 의자를 끌고 온 그녀는 이진한 앞에 앉고는 잔에 술을 따랐다.

상큼한 향이 나는 위스키였다.

잔 안에 절반 정도 그것을 따른 일레이나는 이진한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우선 가볍게 한잔할까요.”

잔과 잔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이진한은 잠시간 그 향기를 음미하면서도, 천천히 들이켰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분위기를 잡을까.’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살짝 서늘한 바람이 방안을 훑었다.

위스키는 제법 값비싼 것이었는지 혀끝을 즐겁게 만드는 맛이었다. 전부 마신 뒤에도 남아있는 그 향이 입안을 간지럽혔고, 절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후우….”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에 이진한은 절로 만족스러운 숨을 내뱉었다.

살짝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나는 작게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소매에서 담뱃대를 꺼냈다.

“펴도 될까요?”

“상관없어. 일일이 안 물어봐도 돼.”

이진한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그녀는 씩 웃으며 불을 붙였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하네요. 호기심이 습관으로 변한 나쁜 유형이라.”

“중독이란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군.”

그 역시 흡연자였기에 모르는 심정은 아니었다.

더욱이 맛있는 술을 마신 직후에 피우는 담배는 더 각별한 맛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순수하게 그냥 당신이랑 한잔하러 왔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낮에 그런 난리를 치고 상당히 뻔뻔하네.”

“네? …아.”

일레이나는 곧 낮의 일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그때는 분위기가 조금 그랬잖아요! 지금이랑은 다르다고요.”

“어렵네.”

이진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자 그녀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정말. 예전부터 느꼈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은 섬세함이 부족해요.”

“계속 아픈 부분을 건드릴래?”

현실에서도 그러한 이유로 비슷하게 여러 번 차여봤다.

물론 허울 좋은 구실일 수도 있었지만, 내심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이었다.

“…사실, 맞아요.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거예요.”

“어려운 건가 보네.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을 정도면.”

“어렵다기보단 번거롭겠죠. …이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죠. 앞으로 싸울 적들은 만만치 않을 거라고.”

“그랬지.”

“솔직히 당신이 쓰러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 외의 요소에서 피치 못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그리고 일레이나 자신을 말하는 것이리라.

만약 그녀 중 누군가 인질로 잡힌다면 이진한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

“…….”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까지의 맥락으로 일레이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에 조금 더 확실하게 하고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네. 후회하시진 않을 거예요.”

일레이나는 한 치의 떨림 없이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만일 그가 한 번에 상대할 수 없는 다수의 적이 나타나거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빠져 서로 떨어지게 된다면 최소한 시간을 벌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쉽지만, 내 마법은 보통의 것과 달라.”

이진한의 마법은 시스템 어시스트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마나를 끌어올리고, 해당 마법의 술식을 입력하고, 영창으로 발현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아무리 가르쳐준다고 하여도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알아요, 척 보기에도 그러니까.”

하지만 일레이나는 그 말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잘 숨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저는 이미 알고 있어요. 당신이 검은 현자….”

그 말에 이진한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엘레오노라와 미르엘만이 알고 있던 사실을 홀로 유추해낼 줄은.

“…의 계승자라는 것은.”

“…뭐?”

다만, 그 뒤에는 사족이 붙었을 따름이었다.

“시치미 떼셔도 이미 늦었어요.”

일레이나는 강한 확신을 갖은 눈으로 말했다.

물론, 그것 역시 허세였다. 하지만 허세를 부릴 때는 스스로조차 속여 넘기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기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이내 이진한이 쓴웃음을 짓자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좋았어!’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니.

세상에 그것을 자처하는 이는 많았지만, 지금까지의 데이터로 보아 내뱉는 말만 그럴듯한 쭉정이들에 불과했다.

검은 현자는 무슨, 검은 쭉정이도 되지 못할 낮은 수준에 실망했던 것이 한두 번이었던가.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시작부터 드래곤 슬레이어의 위명을 달고 나타났지 않은가.

그 이후에도 리치킹에 이어 그 몸에 강림한 마왕을 쓰러뜨렸고, 검은 현자의 유적지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 마수인 베히모스까지 공략하는 데에 성공했다.

‘경로상 갈 필요가 없었던 그곳에 굳이 가자고 했던 것도 그러면 이해가 가지.’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오는 일레이나의 모습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삼켰다.

얼추 접근했다 싶더니 거하게 헛다리를 짚다니.

‘하긴 그 본인일 거라고 상상하긴 힘들겠지.’

무려 고대라 불리는 시대의 신화다.

검은 현자 본인보다 계승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게 느껴지는 추론일 터.

“예정보단 이르지만…….”

이진한은 제 정체를 밝히려 했다.

거기까지 도달했으니 괜히 계승자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사실대로 알려주는 것이 나으리라.

하지만 말이 전부 이어지기 전에 방문의 경첩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우당탕탕 무너져 내렸다.

“읏?!”

일레이나는 설마 하는 습격자인가 싶었지만, 곧 문과 함께 바닥을 구르고 있는 인영들을 보곤 입을 벌렸다.

“으윽.”

문 뒤로 엿듣고 있었던 것인지 잠옷 차림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얽혀 있었다.

엘레오노라는 이내 부스스한 모습으로 겨우 몸을 일으키더니 제 밑에 깔린 미르엘을 바라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르엘, 요즘 살찐 것 아니야? 조금 기댔다고 경첩이 부서지다니.”

“사, 살찐 것 아닙니다! 근육입니다!”

“거짓말, 그럼 내 손에 잡히는 이건 뭐야.”

미르엘은 빨개진 얼굴로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으나, 엘레오노라는 콧방귀를 끼며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옆구리를 움켜쥐며 보란듯이 흔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뭐 하는 거예요?”

보다 못한 일레이나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말하자 그녀는 그제야 아차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흠, 미르엘이 물 마시러 가다가 당신이 베르너님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하지 뭐에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혹시나 해서?”

“…아무튼.”

한 쌍의 주홍빛 눈동자가 이진한을 바라봐왔다.

“사실 저희도 예전부터 부탁드리고 싶던 이야기였거든요. 이어지는 상황이 급박한지라 섣불리 꺼내기 힘들었지만, 일레이나가 물꼬를 터줬으니 묻어갈까 해서요.”

“너희들도 가르쳐달라고?”

“네.”

이진한의 물음에 엘레오노라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미르엘 역시 아직 살짝 붉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의지가 담긴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저도, 강해지고 싶습니다.”

“음.”

이진한은 그 셋을 바라보았다.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이리 적극적인 모습으로 바뀔 줄이야.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성가시다고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좋아. 하지만 한 가지만 알아둬. 나는 이론을 가르치는 건 젬병이야. 그러니 철저한 실전 위주로 수련을 시킬 건데 그래도 괜찮겠어?”

“문제없어요.”

“저도요.”

“오히려 환영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들의 모습에 이진한은 씩 웃었다.

그때까진 그 누구도 그 웃음의 의미를 몰랐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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