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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35화 (35/210)

◈ 035.

회합이 시작되기 전까지 회의장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인 면면 각자 자신의 터전에서 한가락 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렇기에 기세 싸움에서 지지 않고자 눈을 부라렸고, 더러는 이 순간을 기회 삼아 인맥을 넓히고자 조심스럽게 다른 이들과 접촉해나갔다.

끼이익-.

마침내 시간이 되었을 때, 회의장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인원이 들어왔다.

다들 이때까지와 같이 시종이 그 소개를 할 것이라 생각해 기다렸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와중 무리의 선두에 있던 노인이 회의장 앞에 있는 단상으로 걸어가 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인은 페르포치아 왕국의 재상을 맡은 데메오스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저명하신 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재상이라 함은 왕을 대신해 국가의 정무를 처리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예의와 격식을 갖추는 그 모습에 다들 무언가를 눈치챘다.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하구나.’

보통 귀족이라 불리는 부류는 용병이나 모험가 같은 부류를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굳이 경어까지 사용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도움이 절실한 게 분명했다.

“다들 들어서 아시겠지만, 현재 왕국은 미증유의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왕국의 일왕자이신 노르디움 전하께서 코랄 산맥에서 발견된 미공략 던전에서 왕국의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포함된 조사단과 함께 실종되신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전하를 비롯한 조사단 구출에 있어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데메오스는 사뭇 정중한 태도로 고개까지 숙여오자 좌중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이내 고개를 들더니, 두 손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공략대는 왕국의 정예들로 꾸렸습니다. 왕실의 기사단과 마법 병단의 마법사들이 나설 것입니다. 출정 시기는 내일 아침. 갑작스러운 이야기겠지만, 상황이 급박한 만큼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모두 참여해야 합니까?”

데메오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불쑥 외쳤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강제는 아닙니다. 이 자리에 모시는 과정에서 다소 강압적인 어조라 들어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나,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대신 희망하시는 분께는 그만큼 확실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파티당 최소 백만 골드, 거기에 공적 치에 따라 추가로 분배할 것이고, 노르디움 전하를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신 분께는 천만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

좌중은 또 한 번, 다른 의미로 침묵에 빠졌다.

‘통 크게 쓰네.’

이진한은 탁자에 턱을 괸 채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미들턴에서 몬스터 군단을 막아낸 값을 자체적으로 책정한 것이 천만 골드였다.

모험가 길드 미들턴 지부의 일 년 예산이 오백만 골드. 그러니 골드의 값어치가 그리 커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듣자 하니 미들턴 쪽은 애초에 몬스터 출현이 잦아 어지간한 길드 지부 서너 개를 합친 규모보다 큰 것이라 했다.

“참여만 해도 백만 골드라니.”

“이건 제법….”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제법 혹하는 표정이었다.

황급히 표정을 바꾸며 쑥덕거리는 이들도 있었고, 두 눈을 빛내며 먼저라도 던전에 뛰쳐들어갈 듯 의욕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그때, 어수선한 분위기를 헤치며 누군가 입을 열었다.

데메오스는 그 주인공을 보곤 두 눈을 살짝 빛내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이터널 학파, 애머시스트님의 질문이라면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던전 안에 있는 대부분의 가디언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라 들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있는 보스 몬스터겠죠. 생환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요?”

일레이나는 평소 일행과 있을 때와는 달리 냉철해 보이는 태도였다.

그 의외의 일면에 이진한이 두 눈을 가늘게 떴을 때, 데메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그것을.”

그가 눈짓하자 수하들이 무언가의 자료를 가지고 오기 시작한다. 곧 그것들은 단상 위에 펼쳐졌고, 장내의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벽에 걸렸다.

“…이건.”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지식의 깊이가 그 위명에 뒤지지 않으시군요.”

데메오스는 침중한 낯빛으로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던전을 지키고 있는 건 베히모스라 불리는 고대 마수입니다.”

사자의 머리와 몸, 뱀의 꼬리, 그리고 박쥐의 날개까지.

그 형태는 이진한과 일레이나가 며칠 전 콜로세움에서 싸웠던 존재와 똑 닮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최초 발견된 것은 천 년 전 동대륙에 있는 오스칼 황궁의 지하도라 합니다. 당시 고대 영웅들이 지하도에 있는 던전을 조사하다가 발견했고, 봉인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었지요. 워낙 예전 이야기인지라 저희도 찾는 데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여러 곳에 검증받은 내용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곧이어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공략 방법은 있는 것이냐, 위험하지는 않으냐, 보수는 언제 지급되느냐.

데메오스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차근차근 그것들에 대답해나갔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두들겼다.

정말로 그 던전에 베히모스가 있을 가능성은 작았다.

베히모스는 고대 마수라는 명칭이 붙은 네임드 보스 몬스터. 여기저기에 소환되어 돌아다닌다면 그런 희소성을 지니지 못했으리라.

그렇다면….

“아마 만티코어일 가능성이 크겠네.”

“만티코어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키메라 종류다. 잘 알려져 있진 않을 텐데, 베히모스의 외형을 본떠 만들어서 얼핏 본다면 혼동하기 쉽지.”

가장 큰 차이는 꼬리였다.

베히모스의 꼬리는 살아 움직이는 흑사(黑巳)였다. 하지만 키메라는 그 특성상 신체 부위를 이식하는 것이지, 그 본체를 제외하고 다른 살아있는 존재 자체를 합성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베히모스와 달리 만티코어의 꼬리는 전갈의 것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러겠지.”

“베히모스와 비교하자면 어느 정도일까요?”

“만티코어 열 마리가 동시에 덤벼도 베히모스 한 마리를 당해내기 힘들어.”

그만큼의 레벨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이 있을 터니 조사단의 포함된 왕국 기사단과 마법사들을 궁지에 몰았을 터.

“그러면 공략대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들께선 계약서를 작성해주십시오. 희망하지 않는 분들은 퇴장하셔도 무방합니다. 퇴장하신다고 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으리라 이 데메오스의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랐다.

오십 가까이 되는 인원 중 망설임 없이 떠난 이들이 열다섯이었다.

스물한 명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를 작성했고, 남은 인원은 어찌할 바를 두고 고심하는 듯했다.

“…어쩌실래요? 불이익은 없다는데.”

“글쎄.”

이진한은 눈앞에 떠오른 알림을 바라보았다.

「메인 퀘스트」 ─ ∑어린 왕자

◈ 페르포치아 왕국의 노르디움 일왕자는 호기롭게 던전 공략에 나섰다가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미공략 던전의 정체를 밝히고, 조사단을 구출하시오.

보상: ‘199시간의 유예’

퀘스트까지 떠 오른 이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굳이 우르르 몰려간 저들 사이에 끼기 싫어 때를 기다리자, 그들 옆으로 한 남자가 슬쩍 다가왔다.

“레이먼 윌리엄스라고 했지. 자네와 옆에 있는 마도사께선 신청하지 않는가?”

“…급할 건 없다. 사람들이 끝낸 다음에 작성해도 그만이지.”

이진한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그 속내는 표정과는 달리 살짝 복잡해진 상태였다.

‘…읽을 수 없다.’

대현자의 눈은 지금껏 장내에 있는 모든 이의 수준을 파악해내었다.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남자의 기운 역시 이미 옛적에 간파했다고 생각한바.

하지만 가까이 마주한 지금, 알 수 없는 기묘한 느낌만이 가득했다.

“그런가, 한다는 이야기군.”

새빨간 적발에 호쾌한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검을 다루는지 몸이 발달해있다. 신장은 이진한과 비슷한 정도로, 전신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세가 풍겨왔다.

“아, 내 소개를 깜빡했군. 오코넬 에드거네. 편히 오코넬이라 부르게.”

“…레이먼 윌리엄스다. 레이먼이라 부르도록.”

“그래, 레이먼. 반갑네. 그나저나 모험심이 강하군. 정체불명의 던전을 공략하려 하다니. 마도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이성과 논리를 뒤덮을 만한 돈이니까.”

“하하, 그것도 맞는 소리군. 헌데, 그리 궁해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 돈이다. 더군다나 나는 아직 배고프거든.”

“…재미있는 대답이군.”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인지 오코넬은 씩 웃으며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너도 공략대에 참여할 생각인가?”

“아니, 아쉽게도. 흥미는 넘치지만 할 일이 있거든. 자네들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라네.”

그는 짐짓 사람이 좋아 보이는 넉살을 떨며 이진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간만에 대화가 통하는 인연을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된다니 아깝군. 뭐, 정말로 인연이라면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될 터. 그때는 내 크게 한턱내겠네.”

오코넬은 다시금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곤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일레이나는 살짝 떨떠름하단 표정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렇게 친화력이 좋으셨어요?”

“몰라, 그냥 적당히 대꾸해준 것뿐이야. 척 봐도 정상인 놈은 아니었잖아.”

“…그렇긴 했지만요.”

“한 가지 조언해주자면 저런 부류가 가장 위험한 놈이다. 속을 알 수도 없고, 바라보고 있자면 머리만 복잡해지는. 차라리 없는 게 다행이야. 같이 던전으로 들어갔으면 골치만 아플 뻔했어.”

“제가 보기엔 당신도 마찬가지인 부류인걸요.”

“말이 너무 심하네.”

이진한이 샐쭉한 표정을 짓자, 일레이나는 놀리는 것에 성공했다며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계약서를 작성하러 나갔다.

“…그러면.”

이진한은 퀘스트창을 치우며 기지개를 켰다.

고작 만티코어 때문에 일어난 소란은 아닐 것이다.

퀘스트창에서 그랬듯 던전의 실체를 밝히라 그랬으니 그에 얽힌 무언가가 더 있을 터.

‘이번엔 조금만 쉽게 갔으면 좋겠는데.’

199시간의 유예.

남은 시간과 합한다면 제법 넉넉한 일정으로 다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속전속결로 해결하고자 이번에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과정에서 제외했다.

아직 이쪽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녀들 역시 숙소에서 안전히 기다릴 수 있을 터.

여차하면 일레이나를 둘러업은 채 다 부수고 들어가 퀘스트를 끝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퀘스트 이름 하나 고약하게 지었네.”

「메인 퀘스트」 ─ ∑어린 왕자

조사단의 구출이지, 일왕자의 생존이란 조건은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리고, 어린 왕자의 결말로 미루어 보아 그 운명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바.

고약한 취미의 작명이라며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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