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34화 (34/210)

◈ 034.

며칠간의 여정 동안 전부 도시나 마을에 있는 숙소에서 묵을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야영도 더러 했고, 탁 트인 공간에서 함께 자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서로 씻을 때 망을 봐주기도 했고, 번갈아가며 목욕을 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갑작스럽게 발작하는 그녀의 태도에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때랑 지금은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분위기, 가.”

일레이나는 스스로 말해 놓고 말문이 막혔다.

분위기를 착각한 것은 자신이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움추려든다면 괜히 묘해질 수 있어 되려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아니, 혼자 오해해놓고…….”

이진한으로서는 조금 억울한 이야기였다.

평상시와 같은 거리감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온 것이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줄이야.

“아무튼! 당신에게는 숙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요!”

“그런 것치고는 너도 이때까지 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신경 쓰지 않는 척했던 거라고요. 아이 참, 그래서 잘했다는 거예요?”

“잘못한 거는 없는 것 같은데.”

쳇바퀴가 돌아가듯 맞물리지 않은 양상이었다.

이진한이 어깨를 으쓱인 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일레이나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새침한 얼굴을 했다.

“…둘이서 뭐 해요?”

언제 돌아온 것일까.

문가에 선 엘레오노라가 미심쩍은 눈으로 침대 위에서 어정쩡한 자세를 하고 있던 둘을 바라보았다.

뒤따라 들어오던 미르엘 역시 그 홍옥을 품은 듯한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으니.

그 시선을 받은 일레이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요!”

***

식사 자리에서 사건의 경위를 전해들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그 사이에 정분이라도 난 건가 싶었으나, 그러한 이야기로 언쟁을 벌이고 있을 줄은.

“그래도 베르너님 정도면 잘 배려해주시는 편 아닌가요? 가끔 무식할 정도로 아둔한 자들이 있었으니.”

“맞습니다. 저도 이때까지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는데?”

“…….”

그 의기양양한 태도에 일레이나는 눈을 흘기곤 포크를 날카롭게 세워 스테이크를 쿡 찍었다. 이진한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수확은 있었어?”

“아, 네. 이건 널리 퍼진 거라 굳이 정보 길드에 의뢰하지 않아도 돌아다니다 보면 알게 되더라고요.”

“널리 퍼졌다?”

엘레오노라의 말에 이진한은 관심을 보였다.

“미들턴에서 몬스터 군단의 습격이 있었을 때 이곳, 그르노블에도 소란이 있었어요.”

“납치 및 인신매매가 성행했다고 합니다. 최초 타겟은 아이들이었는데 점차 범위를 넓혀나가더니 무분별하게 범죄가 일어났다더군요.”

“납치라.”

“처음엔 흔히 있는 범죄라 생각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종자가 세 자릿수에 이르자 경각심을 느꼈는지 왕실에서 직접 나섰답니다. 대대적으로 병력을 투입해 뒷골목에서 암약하던 조직을 뿌리째 뽑아버렸죠.”

“아까 들어오면서 도시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것도 그런 거군요. 당장 해결했다곤 하나 그 여파가 남아있을 테니.”

일레이나의 말에 엘레오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신매매라곤 하지만, 정보 길드에선 흑마법사나 마왕 숭배 교단이 아닐까 의심하는 추세라네요. 실제로 괴멸된 조직의 잔해 사이로 그런 연결점들도 발견됐고요.”

“이쪽도?”

이진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일레이나는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내일 저희를 왕궁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흑마법사 대책 관련이겠네요.”

“아, 그건 아니에요. 그쪽은 신성 왕국에 요청해 성기사와 성직자들에게 부탁한다고 해요.”

“성문 쪽에서 이름있는 실력자들을 초청했던 건 다른 이유였습니다.”

페르포치아 왕국의 수도인 그르노블의 앞으로 기다란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산맥이라곤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으로 왕국 자체에서 관리하는 길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 중턱 즈음에서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조사단이 며칠 밤낮을 꼬박 들어갔어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더군요. 중간중간 숨겨진 보물도 많았고, 나타나는 가디언 역시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 왕국 입장에선 횡재했다는 마음이었겠죠.”

“그렇게 꿀꺽하려다가 탈이 났고?”

이진한의 말에 미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페르포치아 왕국의 일왕자인 노르디움이 조사단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가 실종되었습니다.”

“생환자가 몇 명 있었는데, 안쪽에 던전의 터줏대감으로 보이는 존재가 있었다고 해요. 왕국에서 실력자들을 초청해 회합을 여는 것도 터줏대감을 쓰러뜨리고 고립된 왕자와 조사단의 구출이겠죠.”

“왕실 자체적으로 시도는 하지 않았나?”

“이미 기사단과 마법사들을 투입해 진입했었나 봐요. 물론 처참히 실패했다네요.”

“그래서 미들턴의 지원이 늦은 건가.”

이진한은 쓴웃음을 흘렸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곳 그르노블에서의 일과 미들턴에서의 일이 벌어진 시기가 같은 듯했다.

일국의 왕자가 실종되었으니 국경 쪽의 몬스터 군단을 알아차리는 것에는 늦었을 터.

“비싼 돈 주고 각지에서 용병을 불러들였나 봐요. 그런 가운데 저희가 성문을 넘은 거죠.”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 불리는 저 정도면 당연히 눈이 돌아갈 만하겠죠.”

엘레오노라의 말에 일레이나가 흐뭇한 미소로 가슴을 쭉 내밀었다.

한껏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는 그 모습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던전의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이곳에서도 교단의 흔적이 발견된 건 무슨 관계가 있으려나?’

어렴풋한 의심이 드는 항목이었다.

그렇기에 두 사건 사이에 관계를 고민할 찰나, 어느덧 도란도란 이어지던 대화가 끊긴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이진한이 고개를 들자, 각기 다른 색을 품은 세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정석대로라면 참석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면 회합이 열리기 전에 떠나는 걸 추천해 드릴게요.”

“참석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다며?”

이진한의 말에 일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이곳에서 계속 머무를 땐 그러겠죠. 하지만 이터널 학파가 어디 구멍가게도 아닌데 일개 왕국이 어쩔 수 있겠어요?”

자신감이 뿜어져 나오는 태도였다.

“….”

그것을 두고 이진한은 잠시 고민했다.

남은 시간의 유예는 77시간 남짓.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한다고 해도 다음 목적지까지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런 가운데 퀘스트 같아 보이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왕자의 구출과 미공략 던전이라는 미증유의 위험. 아직 상태창의 퀘스트가 뜨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의 분기점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일 터. 아마 내일 왕궁으로 간다면 그것에 다다를 것으로 보였다.

“가자. 혹시 모르니 회합에는 나와 일레이나 둘만 가는 것으로 하고.”

고인물로서 물지 않을 수 없는 미끼였다.

***

다음 날 저녁.

땅거미가 져가는 때에 한 대의 마차가 이진한 일행이 묶고 있던 숙소 앞으로 멈춰 섰다.

곧 일레이나와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그것에 탑승했고, 이내 마차는 왕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뭐 어때.”

일레이나의 물음에 로브의 모자를 벗은 이진한은 씩 웃으며 좌석에 걸터앉았다.

과연 왕실 정도 되는 곳에서 보낸 것이라 그런지 제법 휘황찬란하다. 자신들이 이때까지 타고 온 것도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으로 알고 있었거늘, 내부 장식과 마감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 모습이셨죠.”

“조금 낯간지럽긴 한데, 흑발흑안의 드래곤 슬레이어는 너무 유명해졌으니까.”

이진한은 금발이 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알아본 결과 자신의 이름과 신상이 곳곳에도 널리 퍼졌다고 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는 너무 특색이 강했기에 미들턴에서처럼 금발에 청안으로 바꾸었다.

“그나저나 떠돌이 마법사라니. 설정도 기괴하게 잡으셨네요.”

“원래 신분을 가리기엔 적당하지. 어차피 보증도 네 이름으로 설 테니 문제는 없잖아?”

“…그럼 그 뒤의 설정은요.”

“연인인 거? 뭐, 어때. 설마 그쪽에서 연인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겠어?”

“그건 그럴 테지만.”

일레이나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천연덕스럽게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지나가다가 벼락이나 맞으라며 그녀가 투덜거릴 때 이진한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여기가 왕성인가.”

“이제부턴 상의했던 대로 레이먼이라 부를게요.”

“그래, 거리감도 조심해. 자칫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다른 사람들이 의심할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요. 그런 동요를 드러낼 만큼 풋내기도 아니니.”

“믿음직스러운데.”

이진한이 놀리듯 씩 웃으며 말하자 일레이나는 토라진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는 곧 페르포치아 왕성 입구에서 멈춰 섰다.

왕성에선 왕족에 대한 예의로 일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나 마차에 내려 걸어야 하는바.

그렇기에 이진한은 먼저 마차에서 내렸고, 일레이나를 에스코트하며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터널 학파의 일레이나 유클리드 마도사님, 그리고 일행이신 레이먼 윌리엄스 마도사님. 확인했습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왕실 기사에게 신분을 확인받은 후, 그들은 회합이 있을 회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레이나.”

“네, 느끼고 있어요.”

안쪽엔 이미 수십 명에 달하는 인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부분 신경 쓸 것도 없는 쭉정이였으나, 간혹 제법 눈여겨볼 만한 굵직한 기운도 느껴졌다.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 일레이나 유클리드 마도사님과 그 일행이신 레이먼 윌리엄스 마도사님이십니다.”

회의장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시종이 그들의 입장일 알리자, 먼저 회의장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문가로 쏠렸다.

여전히 태평한 표정으로 일레이나를 에스코트하며 걸어가는 이진한은 갖가지 감정이 뒤섞인 눈길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며 배정된 자리로 향했다.

“…인기 많은데?”

그가 내심 놀랐던 것은 일레이나의 등장과 동시에 좌중이 한 번 술렁였다는 점이다.

자신의 위명이 대단하다고 말해왔던 것이 허풍은 아니었는지, 마법사 대부분이 그녀를 반짝이는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이들 역시 호기심이 가는지 연신 흘깃거리며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

미들턴에서와는 사뭇 다른 무게를 주는 그 존재감에 절로 감탄이 토해져 나와 고개를 들었다.

“누누이 말했잖아요, 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라고요.”

일레이나는 이번 역시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어깨를 펴며 말해왔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