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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33화 (33/210)

◈ 033.

사흘 뒤, 페르포치아 왕국의 수도 그르노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성안으로 들어가는 행렬 끄트머리에 다가섰다.

마부석에서 고삐를 쥐고 있던 미르엘은 눈앞에 펼쳐진 인파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한참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안쪽을 향해 말하자 마부석의 문이 열리며 엘레오노라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네요. 어쩔 수 없죠. 기다리는 수밖에.”

“배고픈데. 아, SS랭크 용병패를 보여주면 빨리 못 들어가려나?”

일정을 맞추기 위해 식사를 간략히 하느라 허기가 진 이진한이 의견을 내놓았다.

“어렵진 않겠지만, 우리가 온 걸 동네방네 소문낼 생각이에요?”

“…아쉽네.”

일레이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그는 아쉬움을 삼키며 마부석으로 나아가 미르엘의 옆으로 털썩 앉았다.

미들턴의 몬스터 군단이 와해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인지 성을 출입하는 인파가 활발했다.

이진한의 말대로 SS랭크 용병패를 보인다면 우선순위로 성안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신들이 여기 있소 라며 홍보하는 꼴이었기에 기각되었다.

“….”

일레이나는 막간을 이용해 미르엘에게 장난을 치는 이진한의 모습을 무시한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앞을 주시했다.

혹시라도 무언가 특이점이 있나 살피려는 목적이었다.

오스칼 제국 암부의 철저함과 끈질김은 서대륙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 무슨 술수를 부려 놓아도 이상하지 않기에 대비해놓아야 했다.

‘그래도 내가 합류했다는 소식까진 모르겠지.’

맹약의 조건 중 하나로 소르뎀에게 자신이 이 파티에 합류했다는 것의 발설을 단단히 금지해두고 왔다.

그 나름대로 길드의 지부장이니 감히 어길 생각을 하지 못할 터.

설사 암부 쪽에서 그 사실을 알아낸다고 했더라도 자신들은 이미 페르포치아 왕국을 떠난 뒤의 일일 것이리라.

“다음.”

그 많던 행렬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제 그들이 탄 마차의 차례가 되었기에 일레이나는 천천히 마차에 내리며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가짜 신분을 꾸민 셋의 신원으로는 수도의 출입을 보증하기 어려웠기에 그녀가 나선 것이었다.

“음.”

이터널 학파의 마도사임을 알리는 증표를 받은 병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모습을 본 일레이나는 마차 안쪽의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은근슬쩍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터널 학파의 애미시스트, 일레이나 유클리드.

그 위명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정상적인 반응이 이러했다.

“이터널 학파의 일레이나 유클리드 마도사님 맞으십니까.”

“맞아요. 뒤에는 제 일행이랍니다.”

그녀는 살짝 미소까지 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되는 신분이라면 모든 절차가 간략화되었다.

사실 출입 자체도 상당한 차례의 순번을 생략할 수 있을 터이지만, 그렇게 한다면 이목이 너무 끌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일행분들도 검사하겠습니다.”

병사는 마차 앞으로 다가가 다른 이들의 신분증 역시 확인했다.

하지만 일레이나의 이름이 있기 때문인지 대충 눈으로 확인만 하고는 출입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발목을 잡힌 것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병사가 불러왔는지 안쪽에서 기사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일레이나는 사뭇 긴장했으나,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며 의문 어린 얼굴로 다가온 기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아, 다름이 아니라 왕국 지침상 전달 드려야 하는 안건이 있어서 말입니다.”

“왕국 지침?”

일레이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기사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왕국 지침, 제국 지침, 마탑 지침.

지침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꼴 치고는 정상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나갔고, 이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왕실이 내건 의뢰가 있다는 거군요. 이건 그 설명을 위한 회합에 초청하고 싶다는 것이고.”

딱히 자신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수도를 출입하는 평균 이상의 강자에게 모두 한 번씩 찔러보는 듯했다.

사유는 적혀있지 않았지만, 의뢰라는 말을 보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터.

“개개인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이니 물론 불참하셔도 괜찮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부디 회합에 참여하시어 그 고견을 뽐내주시길 부탁드리는 바이지만….”

“흠.”

머쓱한 표정으로 말해오는 그 모습에 일레이나는 침음을 흘렸다.

기사는 불참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막상 불참했다간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 왕실의 일인 만큼 어떤 불상사가 있을지 모르는바.

슬쩍 마차 안쪽의 베르너를 바라보자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짧게 숨을 토해내며 답했다.

“…알았어요. 일정을 맞춰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힘든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기사는 짐짓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레이나는 그것에 대답하듯 옅은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싸늘한 표정과 함께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통과-!”

병사의 말과 함께 그들이 탄 마차는 성벽을 넘었다.

그와 동시에 엘레오노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 했지만, 이진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엿듣는 귀가 많다.’

일레이나가 제 신분을 밝히는 순간 은밀히 마차를 살피는 기척들이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갖가지 장소에서 은밀히 시선을 보내거나, 마법을 날려 내부를 탐색해왔을 뿐.

제법 수준이 있는 마법인 것을 보니 마도사 경지의 직전인 5클래스 마법사가 아닐까 짐작할 수 있었다.

“….”

일레이나 역시 기가 찬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5클래스라 할지라도 마도사인 그녀보단 한참 낮은 경지였다.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티를 내서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불쾌하기 짝이 없네.’

그들은 곧바로 숙소를 잡았다.

수도라 그런 것인지 지나온 도시나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건물들이 많았다.

어차피 돈은 충분했기에 한 곳에 방이 여러 개 있는 큰 객실을 잡았다.

“으-.”

털썩.

사흘간의 마차 생활에서 지친 일레이나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어차피 몸은 클린 마법으로 깨끗했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늦었기에 조금 있다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전까지 잠시 쉬고자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목욕은 하고 싶네.’

클린 마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일이 다 끝나고 자기 전 오랜만에 그러리라 생각하며 침대의 푹신함을 만끽할 찰나, 문가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레이나.”

“…씻었어요? 배고프다고 간식 드시러 가신 줄 알았는데.”

이진한은 바지만 입은 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고, 그것을 본 일레이나는 슬쩍 몸을 옆으로 굴려 공간을 내주었다.

“…후우. 그래도 여관에서 씻는 건 느낌이 다르네.”

이진한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더니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일련의 과정은 일레이나로서 사뭇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며칠간 마차에서 같이 생활했기에 경계심이 옅어진 상태, 그렇기에 단순히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적어도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는 이진한의 적나라한 상체가 두 눈에 가득 담기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

조각 같은 몸이었다.

한 점 비틀림이 없는 완벽한 형태의 근육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곳곳에 여러 상처가 나 있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오히려 성숙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

멍하니 그것에 시선을 빼앗겨 있던 일레이나는 어느 순간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왜 그래?”

젖은 머리를 뒤로 모아 묶으려던 이진한은 갑자기 침대 위에서 경기를 일으키는 일레이나의 모습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요?”

“정보 길드로 갔어. 제국 정세도 알아볼 겸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하는 것도 부탁했다. 아까 너도 느꼈잖아. 성문 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걸. 저녁 전까지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만 조금 쉬자.”

“…그렇군요.”

일레이나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이곳에 단둘뿐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심상치 않은 것은 성문뿐이 아니라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일레이나는 살짝 가쁜 호흡을 내쉬며 제 주먹을 주억거렸다.

너무 경계심이 허물어져 있었다.

다 큰 남녀가 이런 분위기에 있으면 그런 방향으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 촉촉한 눈망울과 입술을 보아하니 적나라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까의 이야기인데. …아니, 진짜로 왜 그래?”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일레이나는 머리 위로 열이 확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가까스로 그 열기를 억누르며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아직 육체적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어요!”

“…뭐?”

“물론,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에요. 그저 개인적인 신념이라고 할까, 이 나이가 되어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옛적부터 마도 연구에만 매진해서 그런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그….”

“….”

“당신이 맹약으로 묶어 강제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거 하나만큼은 알아두세요. 제 몸을 취할 수 있을지언정 언제까지고 제 마음은 얻지 못할 테니, …까?”

조금 횡설수설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일레이나는 나름대로 소신을 담아 말을 마쳤다.

하지만 역시 후환이 두려운바.

말을 끝내며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고, 이내 일그러진 이진한의 표정과 마주할 수 있었다.

움찔.

일레이나로서는 상당히 용기를 내어 말한 것이었다.

그간 겪어온 그의 성격으로 보아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았지만, 왜인지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체 왜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간 거지?”

“…네?”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에 일레이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대체 저 남자는 무슨 소리를….

그와 동시에 그녀는 머리끝까지 끓어오른 핏기가 한순간에 가시며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설마, 나는 터무니없는 착각을…?’

실제로 질색하는 듯한 그 싸늘한 시선에 일레이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곧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는 무어라 형용하지 못할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한참을 그렇게 침묵한 뒤에 눈물이 얼룩진 추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이야기면 먼저 그렇게 말씀해달라고요.”

“먼저 이상한 쪽으로 흐름을 가져간 게 누군데.”

할 수 있었던 것은 침대의 시트를 질끈 붙잡은 채 소심한 반항을 내뱉는 것뿐. 하지만 그마저도 이죽거리며 던져온 말에 격침되고 말았다.

“아. 아니 그도 그런 게 착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단둘이 있었고! 당신 분위기도 묘했고! 옷도 그렇게 벗고 있었으니!”

“마차로 오면서 자주 봤잖아.”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일레이나의 모습에 이진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토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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