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2.
움푹 파인 크레이터 안쪽이 잔열로 이글거렸다.
간간이 남아있는 화염이 제 몸을 불사르며 존재감을 드러냈을 때, 이진한은 그 가장자리에 서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
그는 잠시간 숨을 죽인 채 반쯤 날아간 베히모스의 처참한 몸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 메케한 탄내가 코끝을 찌르기 시작했을 때 허공 위로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다.
[Lv.1254 베히모스를 처치했습니다!]
이진한이 탄식과 함께 미소를 짓자, 그 옆으로 일레이나가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끝난 건가요?”
“몸 절반이 날아갔는데 여기서 또 일어나면 마수가 아니라 마왕이었겠지.”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슬쩍 주위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째 기시감이 느껴지네요.”
“그건 나도 동감이야.”
미들턴에서 이단심문관 퀘스트를 끝낸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거늘 또 이런 상황과 마주하다니.
게임 스토리라 할지라도 이렇게 빡빡하지 않다. 더군다나 서브 퀘스트의 공략 대상으로 베히모스 같은 고대 마수가 나오는 것은 이전에도 없었지 않은가.
“…베르너님.”
엘레오노라의 부축을 받은 미르엘이 비척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포션으로 부상을 회복한 듯싶었지만, 아직 제 상태가 아닌 듯 안색이 창백했다.
엘레오노라가 조심스럽게 그 몸을 내려놓자, 겨우 바닥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힐링].”
남은 마나를 쥐어짜 치료를 해주자 그제야 조금 편안해진 기색을 보였다.
“감사해요. 너무 갑작스러운 순간에 당한 기습이라.”
“잘 막아낸 거지. 네가 아니라 엘레오노라였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걸.”
“그러니까요.”
엘레오노라가 고맙다는 뜻으로 미르엘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녀는 살짝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주인의 팔을 뿌리칠 순 없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덜렁덜렁 흔들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나가야 하죠? 베히모스인지 뭔지 하는 저놈을 쓰러뜨리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레이나가 콜로세움 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베히모스와의 싸움으로 콜로세움은 반파된 지 오래. 하지만 그 뒤에 나타난 것은 꽉 막힌 벽이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진한은 그곳으로 다가가 그 잔해들을 매만졌다.
‘살짝 축축하고 열기가 남아있는 부드러운 토양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서브 퀘스트」 ─ ∑꺼지지 않는 불꽃 달성]
【161:29:41】
이곳 빌헬름에 온 지 여섯 시간이 조금 지난 때에 새로운 퀘스트가 끝났다.
[히든 필드 「콜로세움」의 장벽에 소멸합니다.]
그와 동시에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진한은 황급히 일행을 제 주위로 모아 실드를 만들어냈고, 떨어지는 토사를 치워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어? 저거 보세요.”
찌푸린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뻥 뚫린 천장 위로 그 너머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 그 끄트머리에 자리한 윤곽은 분명 조금 전까지 있었던 제단의 구조물이었다.
“역시 지하였나.”
“영락없이 어디 다른 차원에 갇힌 거로 생각했는데, 조금 실망스럽네요.”
“실망스러울 정도까지야. 여기도 방금까지 엄밀히 말하면 분리된 공간이었잖아.”
“그래도, 그 감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다차원 공간은 쉬이 겪지 못하는 경험이라고요.”
“…막상 갇히면 울고 불며 꺼내달라고 소리칠 것 같은데.”
“명색이 마도사인데 그럴 리가요? 전혀 거리낄 일이 아니죠.”
처음 콜로세움에 갇혔을 때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던가?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돌아가자.”
길이 뚫린 이상 올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진한과 일레이나는 한계에 달했기에 엘레오노라의 마법에 의지해 뚫린 천장으로 올라섰고, 머지않아 다시 제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뀐 건 없네요. 그만한 소란이 있었으니 무언가 숨겨진 거라도 나타났을 줄 알았는데.”
“확실히.”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는 엘레오노라의 말에 이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칭 검은 현자의 유적지라고 불리는 이 공간의 목적은 베히모스를 봉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다.
베히모스가 쓰러졌으니 이제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나타나도 이상하지는 않겠지만, 아쉽게도 제단은 이전과 변함없이 휑한 모습이었다.
대신 보상이라도 후하게 주었으면 했지만, 베히모스 공략 보상으로 알려진 마검 티르빙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진한은 아쉬움을 삼키며 일행과 함께 유적지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눈부신 햇살을 맞이하자 다들 눈살을 찌푸리며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멀쩡한 모습이 없네.”
“그러게요.”
전부 흙먼지는 기본에 여기저기 찢기고 상처가 가득했다.
처음 들어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서로가 쓴웃음을 지었고, 이내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자네들, 어디 습격이라도 당했는가?”
물론, 돌아온 그들의 모습을 본 노인장이 당황한 얼굴로 그러한 의문을 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148:29:41】
베히모스를 쓰러뜨리고 온 뒤 그대로 열 시간 내리 넘게 잠만 잔듯했다.
계획보다 일정이 지체되었기에 그들은 바삐 준비했고,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마차에 올랐다.
“나중에 또 들리게.”
노인장은 말을 어귀까지 나와 떠나는 그들을 배웅했다.
“꼭 다시 올게요.”
엘레오노라가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함과 동시에 미르엘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음, 여기로 가면 조금 돌아가게 되는데….”
일레이나는 출발 직전부터 지도와 눈씨름 중이었다.
빌헬름에서의 원래 일정은 저녁 전까지 유적지의 조사를 끝내고 출발하는 것. 하지만 베히모스와의 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들로선 더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한나절 정도 늦어진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괜찮다고 했지만, 가능한 완벽을 추구하는 일레이나의 성격상 흐트러진 계획을 다시 전면적으로 수정해나갔다.
“….”
골똘히 지도를 살피던 그녀의 시선이 이내 맞은편에 앉아 창가에 턱을 기대고 있던 베르너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수려한 이목구비.
잘생긴 남자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새롭다고 했지만, 미들턴에서 이곳까지 보면 볼수록 정말로 색다르기 그지없었다.
흘러 들어온 바람이 짙은 흑발을 살랑거렸다. 하지만 그 본인은 두 눈을 깊게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었다.
얼핏 보면 자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일레이나는 그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예의 그 문자 때문이겠지.’
「Я буду ждать. Тысячу лет назад.」
머릿속으로 그가 보여주었던 문자를 떠올렸다.
룬어와 유사한 모습이었으나, 생전 처음 보는 형식이었다.
엘레오노라와 자신으로선 그 내용조차 파악할 수 없던바. 하지만 베르너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굳어진 것으로 보아 필시 심상치 않은 내용이리라.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드래곤, 리치킹의 사체에 강림한 마왕, 그리고 고대 마수라 불리는 베히모스까지.
단 한 명이 쓰러뜨린 업적이라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자신 역시 마탑에서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 허풍이 너무 심하다며 코웃음을 쳤을 터.
베르너는 맹약이 끝나는 날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어렴풋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니, 이번 검은 현자의 유적지를 다녀온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엘레오노라는 오스칼 제국의 황녀. 배신자로 낙인찍힌 그녀를 도왔다는 것은 어지간한 담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일신의 무력은 의심한 바가 없다.
마법은 대마도사에 이르렀고, 검과 활,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다른 분야도 역시 수준급에 이르렀다.
마치 고대 영웅이라 불리던 검은 현자가 현세에 강림한 것 같은 모습이 아닌가.
흑발 흑안에 검은 로브까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승과 똑 닮은 특징이었다.
고대 마수인 베히모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나, 대화할 때 말에서 묻어 나오는 현기(玄機)를 보면 그 지식이 예사롭지 않은 깊이에 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희미한 의심이었지만, 검은 현자를 거론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의식하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태도로 보아 일레이나는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검은 현자의 계승자인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베르너가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면 모든 일의 아귀가 맞아떨어지고 개연성이 충족되는바.
특히 검은 현자는 옛적부터 오스칼 황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들었다.
엘레오노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녀인 그녀와 손을 잡고 마족에게 잠식당한 황실을 바로 세우려고 하는 것일 터.
“….”
거기까지 도달하자 열심히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생각 이상의 스케일이었다.
그저 마도 연구의 업적을 쌓아 유명해지려고 했던 속물인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닌가.
딱히 겁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마음이 들뜨며 흥분되기까지 했다. 왠지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 된 것 같았으며, 새로이 쓰인 역사 가운데 발을 내디딘 것 같았다.
“뭘 그리 뻔히 쳐다봐?”
이진한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라봐오는 일레이나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헛기침을 내뱉었고, 살짝 붉어진 얼굴로 허공에 떠오른 지도를 가리켰다.
“…경로 말인데요, 여기서 사흘 정도 더 가면 페르포치아 왕국의 수도인 그르노블에 도착해요. 계획보단 한나절 늦어진 것 같은데, 거쳐 가는 도시 쪽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좀 줄이면 일정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황급히 말을 돌린 것이 먹혔는지 이진한은 침중한 눈빛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정작 그로서는 걸리는 시간과 남은 시간의 유예를 계산하느라 그랬던 것이었으니.
‘남은 시간이 148시간. 사흘을 제외하면….’
대략 76시간 정도가 남았다.
미들턴에서 벨라시온과 맞서 싸울 때 고작 3시간이 남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사정이 훨씬 나아졌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 성격 특성상 꽤 갑갑함이 느껴졌다.
‘차라리 좀 어렵더라도 넉넉히 시간을 줬으면 좋겠네.’
마음 같아서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싶었지만, 제한된 시간 때문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야 했다.
“…잠깐만, 수도까지 거리가 고작 사흘이라고?”
“네. 페르포치아 왕국은 소국이거든요. 제국 쪽이랑은 이동 거리 단위가 다를 거예요.”
“미들턴이랑 그리 멀지도 않은데 며칠 동안 코빼기도 안 비췄다는 거네.”
그곳에서 밤낮을 설쳐가며 고생한 것을 떠올리니 괜히 악감정이 생겨나는 이진한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본 일레이나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소국의 비애죠. 수십만의 몬스터 군단을 직접 상대하기엔 망설임이 생길 테니까요. 그래도 미들턴을 버린 것은 너무했어요.”
“제국이었더라면 절대로 그러진 않을 거예요. 다소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제국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을 챙기려 했을 테니.”
엘레오노라까지 합세해 고개를 끄덕이자 이진한은 괘씸한 마음이 더 커졌다.
“…나중에 날 고생시킨 값이라도 받아내야겠네.”
그와 관련된 귀족과 마주한다면 탈탈 털어먹으리라.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